〈 229화 〉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 * *
내 걱정과 함께 시작된 회의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원활한 진행과 함께 눈 깜짝 할 새에 끝이 났다.
“그러면 북부교단에서 안전을 위해 교황 직할 성기사단과 사제들을 파견하는 게 좋겠네요. 통솔자로 토마스 사제님을 보내면 어지간한 중상으로는 죽지 않을 테니까요?”
“학생회에서도 후배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싸움 잘하는 선배들을 몇 명 보내는 게 좋겠네. 학생회장은 아그네스가 구워삶을 수 있지?”
“그쪽은 저한테 맡기세요. 아카데미 사무처하고도 어느 정도 교섭을 끝내둔 상태니까 어렵진 않을 거예요. 부족하면 황실 시녀대와 친위 기사단도 몇 명 파견을 보낼까요?”
“세니아 선생님은 걱정하지 마, 나랑 알‘미라즈가 최대한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지켜줄게! 이번에 혹시 몰라서 언니들한테 골렘들도 받아왔거든!”
“어...응...”
솔직히 말해서 내가 진행할 게 없었다. 지금의 나는 가진 세력이나 연줄이 빈약한 아그네스의 약혼자일 뿐이니까.
하지만 내 연인들은 달랐다. 아무렇지도 않게 황실 친위대니 교황 직할 성기사단 같은 게 언급 되자,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도대체 어떤 여자들을 건드려 온 거지?’
이대로 내 연인들을 모아서 세계정복을 계획해도 가능할 법 싶어 어쩐지 부담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 여자를 홀려도 이런 대단한 사람들만 꼬신 걸까?
이 복잡한 심경 탓에 내가 대화에도 함부로 끼지 못하고 있자, 말없이 이 회의를 지켜보던 천마님이 내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줬다.
“천마님..?”
“걱정 말거라, 나도 너희를 따라가마.”
“네?”
“너도 카이엔도 없는 아카데미에서 내가 뭘 하겠느냐? 아무것도 할 일 없이 뒷방에 쳐박혀서 궁상이나 떠는 것은 태산도장에서도 충분히 해온 일이란다. 이제는 제자를 챙겨줄 때지.”
아마도 천마는 회의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 안심하지 못한 걸로 착각한 것 같다. 내 표정이 굳은 이는 그게 아닌데...
그런데 내가 여전히 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자, 천마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렸다.
“뭐, 나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느냐? 삼검성 같은 애송이 녀석들을 데려와서 나보다는 못 할 텐데? 아, 지옥의 대군주를 보고 왔으니 그야 눈이 높아질 수밖에 없겠다만...”
“아뇨, 아뇨 그런게 아니라 황송해서 그렇죠! 제가 어떻게 사람을 가리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렇지? 그래야지. 내가 누구? 마왕군 간부를 둘이나 황천길로 보낸 천마.”
“네, 대단한 분이시죠. 믿음직 스럽습니다.”
...아까 어른스럽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고 잊었는데, 원래는 애 같은 면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 깜빡했다. 자신감과 자존감은 넘쳐흐르는데, 속은 묘하게 좁은 할망구.
“지금 속으로 내 욕을 한 건 아니지?”
“설마요.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그렇지 유니코르?”
나는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유니코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유니코르도 천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날 도와주겠지?
“그럼, 아르틴의 계약자로써 본좌가 생각을 읽을 수 있지만, 욕설은 한마디도 떠올리지 않았다!”
“거봐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욕 같은 건 한마디도..”
“애초에 할망구라는 말은 욕이 아니라 사실이니 흠이 될 것도 없잖겠느냐! 설마 인간의 몸으로 100년이나 넘게 살아놓고 아가씨 소리라도 바란 것이냐?”
“아.”
그런데 유니코르가 날 배신했다. 아주 비릿한 웃음과 함께.
승후 이후로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목숨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신뢰한 사람의 배신에 속에서 쓴맛이 올라왔다.
[순순히 받아 들이거라, 본좌와 샤오메이를 속이고 마계에 간 벌이다.]
“...호오, 할망구?”
“아.”
내 어깨를 주무르던 천마의 손길이 어쩐지 점점 무거워졌다. 그리고 많이 아팠다. 3회차 시절 이교도들이 대접해줬던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익숙한 손길이다.
“끄에에에에엑.”
“이 썩을 제자놈이!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억울했다. 별 다른 이유는 아니고 내 머리카락은 검은색이 아니라 붉은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는 천마의 손길이 부드러워지는 일은 없었다.
**
다음날 아침, 조회시간에 아르틴을 볼 생각에 들뜬 채로 학교에 온 세니아는 출근한지 10분 만에 당혹감을 느껴야했다.
“네? 이번 던전 실습에...사제단과 성기사단이 참여한다고요..?”
“그렇습니다. 교단에서 내려진 지침이니 세니아 부담임 선생님은 숙지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죄송해요. 전례가 없던 일이라 잠시 당황을..”
갑작스러운 세르게이 담임선생의 말에, 세니아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세니아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세르게이 첼레프스키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아카데미에서 공식적으로 내려온 변경된 지침이 적힌 서류를 내밀었다.
“지난 번 장미관 사건에서 용사 카이엔과 아르틴이 마왕군의 간부에게 노출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카데미로써도 수십 년 만에 탄생한 용사와 그의 동반자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일 테지요. 교단에서는 이번 일에 적극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아..그렇네요? 듣고 보니 평상시처럼 안일하게 대처하면 안 되겠네요!”
“이해해주셔서 다행입니다. 이번에는 저도 같이 현장에서 학생들을 통솔할 테니 그냥 숙지만 하고 계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차분하고 합리적인 세르게이의 설명에 세니아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끝이라면 아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이번 던전 실습에 황실의 친위 기사단이 참가한다고 합니다. 이유요? 황실의 부마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들으셨어요 세니아 선생님? 이번 실습에 학생회 간부 중 몇 명이 졸업반 애들하고 함께 참가한다나 봐요! 뭐라고 했지? 신입생 새내기들에게 선배와의 교류의 장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랬나?”
“세니아 선생! 이번에 왕국의 전사단이 참여한다는 소리 들었지? 왜냐고? 왜긴 왜야! 지난번에 렉스턴 와이즈 사건 기억 안나? 피해자인 아르틴 루드비히 한테 무슨 일 생기면 큰일이니까 그렇지! 그럼 알고 있어!”
“본좌도 이번 실습에 참가해도 되겠느냐? 말썽부리지 않고 조용히 다니마! 아르틴이 없으면 심심하단 말이다!”
“에...? 네...?”
단순한 던전 실습이 아니라 어디 마왕군이라도 막으러 갈 것 같은 추가 참가자들의 라인업을 보고 세니아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지막에 떼를 부리며 참가한 유니코르는 그렇다 쳐도, 아무리 생각해도 제국의 기사에 교단의 성기사, 왕국의 전사가 전부 참여하는 것은 과한 전력이 아닌가.
‘원래 던전 실습은 1학년 아이들에게 실전 경험을 쌓아 주기 위해 누구나 참가하는 거 아니었나...?’
마왕의 권속이 둘이나 죽은 이후로, 학생들이 실습을 나갈 때 이만큼이나 되는 경호 인력을 배치한 적은 처음이다. 그게 벌써 백년이 더 된 이야기니 세니아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전개였다.
아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 과할 정도의 보호 인력에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의심을 가지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래도 안전한 게 좋긴 하겠지? 아르틴과 아이들도 괜히 위험에 빠지면 안 되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세니아에게 그 정도의 눈치는 없었다.
대신 그녀는 안심했다. 공화연방에서 자신들도 참가하겠다고 나서지 않는 게 어디인가? 만약 그랬다면 사막 건너에 존재하는 사막술탄국을 제외한 인간계의 모든 인간세력이 이번 실습에 참가하는 게 될 것이다.
세니아에게는 그런 거창한 단체를 이끌고 인솔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은 고작해야 올해 처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부담임이자 초임교수일 뿐이니까.
‘어라? 뭔가를 잊은 것 같은데? 뭐지?’
문뜩 세니아의 커다란 가슴에서 무언가 불안감이 기어 올라왔다. 마치 중요한 뭔가를 잊은 것 같은 감각.
─딩~동~댕~동
“아! 아침조회시간이다! 빨리 가야지!”
하지만 그 작은 불안감의 불씨는 아르틴을 만날 수 있다는 세니아의 기대감에 간단히 꺼지고 말았다.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 사소한 불안감은 별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나이가 먹더니 귀가 먹었느냐? 감각이 하나 부족하면 그만큼 다른 감각이 발달한다던데 너는 어째 외눈깔이면서도 귀도 안 좋은 지...쯧쯧.”
빈센트 노팅햄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비록 자신이 몇 년 전에 공작의 작위를 양도하고 아카데미에 뼈를 묻기로 결심했으나, 여전히 자신은 전대이긴 해도 삼검성 중 하나였으며 아카데미의 부학장이다.
게다가 자신이 공작위와 삼검성의 칭호를 반납한 이유가 무엇인가? 북방전선에서 마왕군의 군단장하고 치열한 전투 끝에 자신의 군단을 지키는 대신 한쪽 눈을 잃은 탓이었다. 아직 그의 검술은 녹슬지 않았으나, 실전에서 외눈이라는 것은 쓰라린 부상이다.
빈센트 부학장은 그런 자신의 눈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마기 탓에 복구도 불가능한 이 눈을 그는 훈장으로 여겼다. 자신의 명예와 공훈을 증명하는 둘도 없는 훈장.
그런 그에게 감히 외눈깔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이곳이 아카데미라면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자신을 보고 외눈깔이라고 부른 여인에게 빈센트는 감히 그 무례를 벌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연하다, 자신은 한쪽 눈을 바쳐 전선을 지키고 자신의 군단을 살렸지만, 눈앞의 여인은 제 몸을 마기로 물들이는 대가로 마왕군의 간부 둘을 죽이고 공화연방과 대부분의 인류를 지켜낸 살아있는 전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지금 얼마 후에 있을 던전 실습에 참가하고 싶다고 말하셨습니까?”
“그래, 잘 알아들었는데 왜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느냐? 지금 나랑 기싸움이라도 하자는 것이냐? 요즘 젊은 것들은 예의가 없어, 우리 때는 질문에 대답이 안 나오면 머리가 깨지도록 맞았어!”
천마의 장대한 개소리에 빈센트의 하나 남은 눈이 가늘게 치켜세워졌다. 그녀가 아버지와 가문의 만류를 무릅쓰고 무술을 배우고 아카데미에 갔으며 약혼자를 스토킹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유명한 일화가 아닌가?
만약 웃어른에게 대들거나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가리가 깨지도록 맞아야 했다면, 그녀의 두개골은 이미 가루가 되어 남해 바다에 뿌려졌을 것이다.
“쓰읍, 눈깔. 하나 남은 눈깔이면 곱게 뜰 줄 알아야지 감히 어디서 눈을 치켜 떠?”
“...말 같은 소리를 하십시오 천마님. 고작해야 1학년들 실습 나가는데 거기에 천마님이 왜 따라 가십니까?”
“내가 귀 안먹었다고 했지? 성기사단도 가고 기사단도 가고 전사단도 가는 거 다 들었는데, 왜 나만 안 돼?”
“예? 그건 또 어디서 들었습니까?”
“달맞이관에서 명상하다가 엿 들었지, 천마의 눈은 천리 밖을 보고 귀는 천리 밖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느냐?”
“예, 솔직히 말해서 드래곤로드도 그딴 짓거리는 못할 것 같군요.”
“그래서 드래곤로드는 신이면서도 나보다 약한 거지. 그래서 대답은?”
안 된다. 곧 바로 그렇게 대답을 해야 했지만 호랑이 부학장이라고도 불리는 불같은 성질의 빈센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건 눈앞의 여인이 단순히 살아있는 전설인 천마여서가 아니라, 젊은 시절 빈센트가 기사수행을 위해 공화연방에 갔다가 천마의 도움을 크게 받은 적이 있어서였다.
“천마님이 머무시겠다고 하셔서 루베루스 학장의 제자까지 불러서 달맞이관도 복원해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꼭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셔야 겠습니까?”
“아무렴, 낡은 건물에 거처 하나 마련해주는 게 외인에게 사문의 절기를 전수해주는 것보다 어렵겠어? 기억하지?”
기억한다. 젊은 시절 지금보다 불같은 성질을 지녔던 빈센트가 다짜고짜 찾아와 태산도장의 정수, 무술에 대해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얼마나 큰 사단이 났던가.
아직도 그 때만 생각하면 빈센트 부학장은 자다가도 이불을 발로 찬다. 공작가의 후계자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느라 몇 달을 도장 앞에서 노숙하는 탓에, 제국과 공화연방의 외교 분쟁으로까지 이어질 뻔 했으니 말이다.
“그때 절대 안 된다고 길길이 날뛰던 아들 녀석 조용히 시키고, 유례가 없는 일이라면서 너를 두들겨 패서라도 쫓아내려던 장로들 막아준 게 누구?”
“...그야, 천마님이지요.”
“자신의 무술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며 싫다고 드러누운 손자한테 용돈까지 줘가며 무려 반년이나 대련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준 게 누구?”
“......”
“그렇게 반년 간 가르쳐놨더니, 소문으로만 접하던 천마신공에 도전하고 싶다며 끝까지 꼬장을 부리던 애송이에게 친절하게 격의 차이를 알려주며 정진하게 시킨 게 누구였지???”
“아 예! 알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마음대로! 안 말릴 테니까 천마님 하고 싶은 거 다~하세요!”
결국 빈센트의 불호령 같은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천마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빈이 내 말을 어기면 안 되지. 안 그래?”
“제 나이가 이제 50이 넘었습니다. 빈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엔 체면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나이가 100살을 넘은 후로 세고 있질 않다. 요즘도 나이가 궁금하면 우리 증손녀한테 물어봐. 내 앞에서 나이자랑 더 하고 싶니?”
“아닙니다. 제가 또 괜한 소리를 했나봅니다. 빈이고 빈센트고 바니고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십시오.”
빈센트 부학장의 주름이 깊어졌다. 그러면서 내심 아직도 20대처럼 탱탱한 외모를 지닌 천마가 부러우면서도 원망스러웠다.
제 나이가 몇 인데 남에게 나이로 놀림 받아야 한단 말인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번에 시집을 간 자신의 딸도 눈앞의 여인보다는 늙어보일 것이다.
“쓰읍, 눈깔 착하게 뜨기! 따지고 보면 내가 네 스승인 셈인데 그런 눈깔로 보면 되겠니?”
“...시정 하겠습니다 천마님. 그러니 제발 준비한 도넛이나 먹으면서 심신을 다스려주세요.”
“으흠, 네 성의를 봐서 그리하마.”
자신의 옛 스승이 단 것을 좋아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빈센트가 특별히 준비한 도넛은, 20개가 넘는 개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지는 데는 단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물론 준비한 빈센트는 단 1개도 먹지 못했지만, 눈 곱게 뜨라는 천마의 말에 눈깔을 내리 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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