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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230화 (230/266)

〈 230화 〉 개미털기

* * *

“쪼옥. 쪼오옥.“

“...”

도넛 20개를 혼자서 먹어치우고도 모자란 건지, 제 손가락을 빨아대는 천마를 보며 빈센트는 착잡한 심정을 느껴야 했다.

한 때는 정말 하늘처럼 존경하고 따르던 사부지만, 폼 잡을 때와 평상시의 괴리감에 알아버린 이후로는 존경심을 가지려고 해도 한줌의 파편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천마를 보며, 간식 더 없냐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 빈센트 부학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도 설명해주지 않을 생각입니까?”

“응? 뭐가? 도넛? 아침을 안 먹고 와서 그렇다. 하늘같은 스승이 단 것 좀 먹는 게 그리도 배가 아프더냐? 못난 놈.”

“도넛 말고 실습 말입니다. 왜 굳이 참여하시겠다고 나서는 건지 궁금해서 묻습니다.”

그 말에 천마의 표정이 묘하게 구겨졌다. 마치 지금은 멸종당하다시피한 드워프가 갑자기 제 앞에 나타나 수염을 깎는 것을 본 것처럼 말이다.

“스승이 제자들을 돌보러 가는 게 뭐가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저 젖 큰 엘프 여교사도 제 제자들을 돌보는데 나는 안 될 게 뭐 있어?”

“몇 십 년 전에만 해도 그렇게 교육에 큰 뜻을 품은 분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까놓고 말해서 저를 받아주신 뒤에 책임진다 해놓고 손자인 샤오펭에게 방임하지 않았습니까?”

“너는 명색이 아카데미의 부학장이면 교육자의 귀감이 되어야 할 녀석이면서 방임주의를 내세울 셈이냐? 까마득하게 어린 사제??들이 질투나? 못난 놈.”

“...”

멀쩡히 있다가 갑자기 못난 놈 소리를 연거푸 2번이나 들은 빈센트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곧 그 호랑이 같은 성정 탓에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가 느껴졌지만 참아야 했다.

상대는 자신의 하늘같은 스승이고, 자신보다 훨씬 강한 살아있는 전설이 아닌가.

‘그래도 지금이면 전력을 다하면 옷깃 정도는 벨 수 있지 않을까?’

순간 불충한 생각이 빈센트의 머리를 스쳐지나가기도 했지만 천마의 앞에서 티를 내선 안 됐기에 차를 마시며 심신을 안정시켰다.

한편 천마는 늙어서도 여전히 제 성격이나 생각을 감추지 못하고 제 못난 제자를 보고 한숨을 내쉬며 마찬가지로 차를 들이킨 후 입을 열었다.

“카이엔과 아르틴이 그냥 제자더냐? 천상과 초월자들과 북부교단과 세 나라가 인정한 용사와 그 대행자다. 그런 아이들을 재능만 믿고 적당히 키워서야 되겠느냐?”

“원래 그런 식으로 크는 게 천재들 아닙니까? 과한 보호는 천재들에겐 오히려 독이 될 겁니다.”

“평범한 비바람이라면 맞아도 상관없지, 문제는 녀석들이 지난번에 권속하고 싸우지 않았느냐. 군단장도 아니고 권속, 내가 직접 패죽여봐서 아는데 권속이란 놈들은 만만한 게 아니다. 독한 건 어지간히 독하고 뒷 끝도 엄청 길지. 이해하겠느냐?”

“...그 말은, 이번 실습에 마왕군의 간부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가능성은 있다. 얼마나 높은 가능성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단 가능할 지도 모른다가 중요한 거지. 이제 왜 다른 세력들도 앞다퉈 정예 병력들을 배치하는 지 이해했느냐?”

천마의 말에 빈센트는 미간을 찡그렸다. 별거 아닌 줄 알았던 실습이 이렇게 들으니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않지만 귀찮고 난감한 문제가 되었다.

“그렇다 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승님은 방임주의 운운하셨지만 실제로 방임주의에 가까우신 분 아닙니까? 왜 그렇게 카이엔과 아르틴을 신경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십 년 만에 새로 키우는 제자인데, 당연히 신경 써줄 수 있는 것 아니냐?”

“제가 아는 스승님은 멀쩡한 사내를 여자로 변신시키는 수련을 시키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원래는 아르틴 루드비히를 태산도장에 데려가려고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건 누구에게 들었느냐?”

“제게도 귀가 있습니다. 아카데미 내부에서 그렇게 난리를 치셨는데 부학장인 제 귀에 들리지 않으실거라 생각한 겁니까?”

“아까는 귀가 먹어서 질문을 두 번 물어 보길래 늙어서 귀가 먹은 줄 알았지, 아니었구나?”

“...”

빈센트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그의 불같은 성격으로는 천마와의 대화라는 시련을 이겨내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걸 들었으면 뭐...별건 아니다. 내 죽은 서방님이 생각나서 그랬지, 뜻은 큰데 정이 많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 특히 닮았더라고.”

“카이엔 실버소드말입니까?”

“아르틴 루드비히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이엔은 덤이고 아르틴이 내 본심이지. 그 아이가 아니었으면 진작 태산도장에 돌아갔을 거다. 애초에 밖으로 나올 일도 없었겠지만.”

저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빈센트는 확신했다. 자신이 천마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기어코 태산도장 밖으로는 나오지 않으며 제 몸을 돌보고 아득바득 수명을 늘리던 스승님이다.

뭐라고 했던가, 자신이 죽고 나면 쉔 즈웨이라는 사람을 온전히 기억해줄 사람이 이제 기분 나쁜 엘프 공주 밖에 없을 거라나. 그 꼴은 죽어도 못 본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건강을 챙기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아는 천마는 그런 사람이니 아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평생을 태산도장에서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빈센트는 더더욱 지금 상황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고작 그 이유 하나입니까? 돌아가신 지아비를 닮은 것? 저는 아르틴 루드비히의 그 특출나다 못해 특이한 재능에 반하신 줄 알았습니다만.”

천마의 미간에 주름이 2개가 졌다. 하나는 반하다라는 말이 제 남편에 대한 순애보와 지조를 깨는 것만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하나는 생각한 이유를 말하기가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지. 내가 마왕군 군단장은 생각이 깊어서 때려잡을 줄 아느냐?”

그래서 그녀는 적당히 무대포로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그 말에 빈센트는 딱히 더 캐묻지 않았다. 100년 넘게 제멋대로 산 천마라는 존재를 제 기준으로는 더 이해하기 힘들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차나 마시거라, 다음에는 다과 좀 더 준비하고.”

“다음에 또 오신다고요?”

“왜, 늙은 스승이 꼴보기 싫어서 내쫓기라도 할 셈이냐?”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빈센트는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는 생각하던 것을 바로바로 입으로 내뱉다가 천마에게 호되게 혼나던 젊은 시절의 기억 덕분이다. 그 사실이 더욱 빈센트의 입을 쓰게 만들었다.

*

기어코 다과를 한 차례 약속받고서야 부학장실을 나온 천마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스스로가 원하는 바를 전부 이뤘음에도 말이다.

“...하아, 정말로 늙어서 이게 무슨 고생인지.”

천마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달맞이관으로 돌아오자, 임시로 만든 훈련장에서 수련을 몰두하고 있는 두 남녀, 아니 여인이 보였다.

한 명은 자신의 귀여운 증손녀,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갑자기 상태창의 저주인지 축복인지를 받아 여자가 된 현 시대의 용사였다.

“흐읍!”

제 손녀가 진각을 크게 밞자 주변의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동시에 샤오메이의 발과 팔이 날카롭게 쭉 뻗어나가 카이엔을 향해 쇄도했다.

‘음, 역시 내 증손녀야. 외공과 내력의 조화가 훌륭해.’

천마가 보기에 샤오메이의 수준은 썩 만족스러웠다. 어린 나이에 초인의 경지에 도달한 제 손녀는 분명 하늘이 내려준 기재요 저 제국의 황태자를 뛰어넘는 무재임이 틀림없다.

제 나이 또래에는 이미 비견될 사람이 없다. 아니, 만약 제국의 황태자나 왕국의 마리안느 왕녀가 없었다면 다음 세대의 최강은 샤오메이였을 것이며, 어쩌면 자신의 천마라는 별호를 그녀가 이어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아앗!!”

샤오메이가 내지른 일격들이 카이엔의 팔과 다리에 막힐 때마다 공기가 폭발하는 격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산도장의 일류 사범들도 받아낼 수 없을 그 일격들을, 카이엔은 땀을 흘리면서도 하나하나 받아내고 있었다.

주먹을 내지르면 흘려보내고, 발차기를 뻗으면 자세를 비틀어 충격을 최소화한다. 때로는 샤오메이의 공격보다 빠르게 움직여 피하거나, 아예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팔다리를 멈춰 공격 자체를 무위로 되돌린다.

천마가 보기에는 카이엔도 기가 찰 천재였다. 지금 카이엔의 움직임은 남자일 때 보여줬던 카이엔의 전투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에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몸으로는 강과 쾌의 묘리를 살리면서, 여자의 몸일 때는 움직임 하나하나에 유와 쾌의 묘리를 담아서 움직여?’

말이 쉽다. 속도야 어느 체형일 때나 빠르기에 그저 움직임만 달리하면 되는게 아닌가 싶지만, 강과 유라는 대척에 가까운 자세를 소화하면서도 쾌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특히나 여성의 몸으로 싸우는 법을 배운지 아직 1달도 안 된 시점이라면 더욱 말이 안 된다. 천마가 보기에는 천년에 한번 나올 천재라는 제국의 황태자도 저 속을 알 수 없는 용사에게는 한 수 접어줘야 할 것이다.

‘지금도 저리 강한데, 몇 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정말 나와 같은 경지에 오르거나, 어쩌면 마왕을 해치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물론 그 날이 온다면 천마는 슬프기보다 기쁠 것이 틀림없다. 자신의 제자가 자신과 지아비의 원수를 갚고 세계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그녀에게도 분에 넘치는 영광이 틀림없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천마는 도리어 웃을 수가 없었다. 시선이 카이엔을 몰아붙이는 자신의 증손녀에게 향할 때 마다 착잡한 마음은 배가 되었다.

‘..지금은 샤오메이가 강하지만 앞으로도 그렇다는 법은 없지. 그런 아이를 돕는 게 맞는 걸까?’

이 이야기는 무술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천마 린 샹페이는 어제 아르틴의 방에서 봤던 일들을 떠올렸다.

──황녀, 왕녀, 성녀, 대마녀, 자신을 괴롭힌 여기사에 유니콘, 악마와 마족, 엘프 여선생에 이번에는 지옥의 대군주까지, 자신의 증손녀를 포함하면 무려 11명이나 되는 여자가 손을 들었다.

반한 여인도 아니고, 이미 아르틴과 정을 나누거나 사랑을 약속한 여인이 11명이다. 헛웃음도 나오지 않을 그 광경을 보며 얼마나 오랜만에 가슴을 졸이며 그 모습을 바라봤던가.

‘그건, 그건 아니야...최소환 쉔은 순애보가 깊은 남자였어. 나라는 한 여자만 사랑했다고...’

본래는 아르틴도 순애보를 꿈꾸던 청년이라는 것을 천마는 알 수 없기에 그녀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일전에 제 손녀의 사랑을 응원하고 돕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저건 정상적인 사랑의 형태가 아니다. 평범한 여자들도 11명을 모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암투의 장이 될 것인데, 아르틴의 하렘은 천마가 생각하기에는 살벌하기 그지 없는 최악의 하렘이었다.

그런 하렘에 증손녀를 밀어 넣고 응원하는 것은 못할 짓이었다. 늘 짧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10년 넘게 지아비와 사랑을 나누고 아이도 가지며 오순도순 살아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샤오메이도 자신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그때 그 눈...’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방안에 샤오메이를 들여와 진지하게 그녀를 꾸짖으며 동시에 아르틴의 여색에 대해 논했을 때를 말이다.

­“증조모님,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이건 개미털기에요, 버텨야 할 때라고요.”­

­“뭐? 개미털기?”­

­“오라버니가 어떤 분이에요? 세계를 구하기 위해 4번이나 목숨을 투신한 남자 아닌가요? 어떤 영웅도 세계를 위해 4번이나 죽진 못했어요. 그러니 오라버니는 이 세계에 둘도 없는 영웅호걸이자 협의지사인 셈이죠. 그런 남자를 독점하는 거? 저도 한 때 욕심냈지만 무리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버텨야죠. 늘 곁에서 지켜봐온 여인, 가족 보다 더 친한 여인, 이제는 가족 보다 깊은 관계. 조금만 더 버티면 더 깊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뭐...?”­

­“생각해보세요, 만약 제가 가장 첫 아이를 임신한다면 어떻겠어요? 정실? 뒷배? 전부 의미없어요. 아르틴 오라버니의 씨앗을 누가 가장 먼저 임신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정실을 가리는 승부처라고요! 다만 지금은 오라버니가 생각이 없어서 승부가 밀릴 뿐이죠. 두고 봐요,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오라버니의 아이를 먼저 임신할 테니까...”­

천마는 무서웠다. 광기에 가득 찬 미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며, 사내의 애정을 갈구하는 제 증손녀가 무서웠다. 그 말을 하며 번뜩이던 이성을 잃은 눈깔은 더더욱 무서웠다.

‘...빨리 구해 내야해. 아르틴은 좋은 제자, 좋은 영웅이지만 좋은 남자는 못 된다. 그 사실을 샤오메이에게 빨리 알려야해!’

하지만 어떻게? 이미 말한테도 박고 마족에게도 박고 악마에게도 박고 원수에게도 박아댄 녀석이다. 그런 녀석을 보고도 콩깍지가 씌인 아이를 어떻게 구해낸단 말인가?

‘...한 가지, 방법이 있을 지도 모르지.’

천마의 시선이 샤오메이를 떠나, 그 옆을 향했다.

아르틴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아이, 그러면서도 늘 곁에 두고 친구를 자처하는 아이. 남자로서의 그 음습한 면을 주변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아이. 본래라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짝사랑을 억지로 이어나가는 아이.

‘만약 네가 좋아하는 남자가, 먹기 좋다면 남자도 가리지 않고 덮치는 아이라도 버틸 수 있겠느냐. 샤오메이?’

천마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일찍이 카이엔에게 사랑을 이루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오늘 할 일은 그 부탁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개미털기라, 확실히 어울리는 비유일지도 모른다.

오늘 천마는 제 증손녀를 아르틴의 하렘에서 개미털기 해내겠다고 다짐했다.

역사상 전례가 없던 개족보 하렘에서 최대한 빠르게 탈출시키는 것, 그것이 진정 샤오메이를 위한 것이라고 믿으며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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