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 용사 길들이기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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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모든 상황은 사르디엘이 지상에 떨어진 직후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드디어...드디어 최고의 기회가 찾아왔어.”
임시라고는 하지만 여신에게 반항한 벌로써 지상에 추락해 타천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느 천사라 할지라도 멘탈이 흔들릴 상황 속에서, 늘 모니터 너머로만 바라보던 아카데미의 풍경을 실제로 본 사르디엘은 기쁨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늘 관리자의 입장에서 소극적인 응원 밖에 할 수 없었어...기나긴 고난의 시간이었지...”
그럴 수밖에, 아르틴을 수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켜보며 몰입했던 사르디엘에게 이번 일은 최고의 기회였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커플링인, 아르틴x카르엔을 밀어 붙일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 기회.
“아르틴이 카르엔을 개처럼 따먹게 하는 거야...그럼, 그럼 분명 카르엔 정실파의 숙원이 이루어지는 거지...”
타천사(임시)가 된 사르디엘은 그리 맹세하며 행동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조르바와 아그네스의 탄압으로 박살난 만화부를 자신의 손에 넣었다. 그리고 아르틴이 보면 기겁할 내용의 동인지를 제작해 사방팔방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이 행동에는 보기와는 다르게 정말 많은 의도가 담긴 한 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아르틴x카이엔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기 위한 의도였다.
늘 고립되기만 했던 카르엔의 연애전선에 내밀어진 구원의 손길. 분명 카르엔이 어떤 형태로든 잡으러 올 거라고 사르디엘은 확신하고 있었다.
‘카이엔이 여체화? 제타엘 녀석, 드디어 한 건 해냈구나!’
카르엔이 본 모습으로 돌아간 것을 만화부원에게 들었을 때는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카르엔의 폴리모프를 이렇게 가볍게 해결할 수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대부분 사르디엘의 생각대로 흘러갔다. 자신을 찾은 아르틴의 곁에 무난하게 합류했고, 지옥으로 가는 아르틴에게 카르엔이 합류하여 마음의 빚을 만들어졌다.
카르엔의 스승 겸 연애 코치를 맡고 있는 천마가 아르틴의 하렘에 불만을 느끼고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해왔을 때는 속으로 여신을 찬배하는 찬송가를 부르기까지.
‘정말 모든 게 완벽해! 이대로 계획대로만 진행되면, 아르틴이 카르엔을 개처럼 따먹게 할 수 있을 거야! 한 2년 내로!’
이 모든 상황을 미리 안배하거나, 자신이 생각해 놓은 상황으로 흘러가게 만든 흑막의 타천사 사르디엘의 계획은 사실 무척 간단했다.
아르틴에게 오랜 시간에 걸쳐 여성으로서의 카르엔을 노출 시키고, 동시에 마음의 빚을 차곡차곡 쌓아 터트려 언젠가 카르엔의 고백을 아르틴이 받아 주도록 만드는 것.
타인이 들으면 가능할까 싶은 이 계획에 사르디엘이 확신을 가진 것은,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 아르틴을 지켜보며 그의 행동을 관찰하고 성격을 이해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계획도 비슷했다.
앞서 개수작을 부린 대악마의 계획을 참조해 아르틴의 기억 속의 풍경까지 재현해 만든 꿈의 세계.
그 세계에 강제로 카르엔과 아르틴을 가둬두고 야릇한 상황을 연출하며 깊은 대화를 나누게 하는 것이 이번 계획의 골자였다.
‘물론 이번 일로 급격한 진전은 없겠지. 하지만 아르틴이 카르엔을 여자로 인식하는 것만 해도 충분해. 단순히 게이 용사에서 벗어나 히로인으로서의 위엄을...’
즉흥적인 계획 치고는 꽤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했고, 사르디엘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도 단 하나 실수를 꼽자면.
이번 계획의 효과가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는 것이다.
*
[앙♡ 흐앙♡ 흐으아앙♡ 아, 아르티인♡ 또오 기절할 것 가타...!]
[참아봐, 이제 고작해야 4발 밖에 사정 안했잖아. 더 버틸 수 있지?]
[으응♡ 흐읏, 노력♡ 노력 해볼게에에♡]
“...”
“...”
몽마 시르카가 만든 꿈의 세계를 비추는 거울.
그 거울이 비추는 풍경을 보며 천마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화, 확실히 천사양반 당신이 말한 대로 효과가...어, 엄청나긴 한데..저, 저 큰 게 저렇게 들어간다고...?”
꿈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과격한 성행위는 100년 전에 남편을 여의고 독수공방으로 세월을 보내던 천마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애초에 옛 시대 사람인 천마에게 성행위란 서로를 마주보며 손을 맞잡고 사랑을 나누는 고귀한 행위, 저런 천박한 행위가 아니었기에 천마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다.
‘저, 저런 거대한 양물로 여성을 농락하다니! 아르틴 녀석, 음적이 따로 없는 녀석이구나! 이 색마..!’
천마는 어째서 증손녀가 아르틴에게 매달리는 지 조금은 알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해지는 기분을 곱씹었다.
동시에, 짐승처럼 카르엔을 범하는 아르틴과 짐승처럼 헐떡이는 카르엔을 보며 결국 버티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 그래도 너무 격렬한 것 같은데...몽마 너, 정말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느냐?”
“그러게요...? 저도 모르게 매료마법을 사용했나...?”
당혹스러운건 시르카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처럼 매료의 권능을 담아 빔을 쏜 것도 아닌데 거울 속 아르틴의 모습은 몽마섹스빔에 당했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저게 주인님의 본모습이 아닐까? 나를 처음으로 범했을 때도 무척 거칠게 희롱하셨고...’
사실 유니코르의 계약자인 아르틴이라면 자신의 권능에 어느 정도 저항력을 지니고 있을 터였다, 장미관에서도 몇 번이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이후에 아르틴은 자신의 몽마섹스빔에 이상할 정도로 무력하게 당하여 폭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게 사실 아르틴의 본성에 가까운 거라면?
‘내 권능은 사실 촉매제에 불과하고, 본래 주인님이 좋아하는 섹스는 저런 격렬한 섹스가 맞겠지.’
그것을 깨닫자 시르카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조차 몰랐던 주인님의 본성을, 천사 사르디엘은 어떻게 간파하여 이토록 확실한 계획을 세웠단 말인가?
“대단하네요. 확실히 주인님의 수호천사다운 일처리였어요. 이렇게 정확하게 주인님의 취향을 노리실 줄은...”
“히, 히익...저, 저렇게 큰 걸 저렇게 과격하게? 주, 죽는 거 아니야?!”
“...사르디엘?”
시르카가 감탄을 담아 칭찬을 위해 고개를 돌리자, 사르디엘은 양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의 틈새로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쩜?! 가슴이 터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 아르틴 이 무서운 아이...우, 우리는 이제 어쩌지..?”
“잠시만요 사르디엘, 우리라니요?”
“이, 이정도로 효과적일 줄은 몰랐단 말야. 그냥 적당히 관계가 더 좋아지고, 우리는 꾸중이나 들을 줄 알았지!”
물론 여신에게 소원으로 교배프레스로 엉망진창 당하는 카르엔을 빌기는 했다. 하지만 설마 소원이 이루어질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와 동시에 위기감이 몰려왔다. 그냥 간단한 헤프닝으로 끝났다면 이 일을 계획한 세 사람도 별일 없이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개가 이렇게 된다면?
‘다, 당장은 그냥 넘어가도, 분명 나중에 이걸 빌미로 뭔가 과격한 짓을 당할지도 몰라...!’
근거에 기반한 예측은 아니었다. 사실 사르디엘의 썩은 뇌가 만든 음란한 상상에 불과했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짐승 같은 성행위에 사르디엘의 상상도 점점 구체적인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
[사르디엘, 잘도 나를 가지고 노셨겠다?]
[지, 진정해 아르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못된 천사에겐 벌을 줘야죠. 인간의 거대 자지로 타락할 준비는 됐습니까?]
[잠깐, 거기는! 하읏...♡]
...지난번 메피스토를 범하던 아르틴을 훔쳐봤을 때의 상상에 살이 덧붙여지기 시작하자, 사르디엘은 자신도 모르게 거울 속의 카르엔에게 자신을 이입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직후 사르디엘의 아랫배가 심장처럼 쿵쿵 울려대기 시작했다.
자신이 천사가 아닌 여인이라는 것을 자각한 사르디엘의 육신이 거울 속의 수컷에게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다 정말 아르틴에게 범해지기라도 한다면, 나는...’
주륵. 촉촉한 물줄기가 허벅지를 타고 흐르자, 백색 깃털 몇 가닥이 회색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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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제타엘은 발을 동동 구르며 모니터 너머의 아르틴과 카르엔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매뉴얼에 따르면 아르틴 루드비히가 카르엔과 몸을 섞는 건 최고등급 비상사태인데!?”
제타엘 본인도 카르엔을 여자로 만들 때는 이런 상황까지 예상하진 못했다. 그저 하계에 내려가기 전 사르디엘이 했던 푸념이 떠올라서 한번 깜짝 이벤트로 벌인 일이었다.
[카르엔이 본 모습만 밝히면 둘이 정말로 사이가 좋아질걸? 남체화? 그거 그냥 여신님이 심술 부리는 거라니까! 우리라도 응원해 줘야지! 여자 모습 몇 번 보여준다고 별 일이야 있겠어?]
“별 일이 생겨도 크게 생겼잖아요 선배님!!”
처음 제타엘이 이곳 상태창 관리부서로 임명받았을 때, 제타엘은 1만 페이지가 넘는 매뉴얼을 전부 완독하며 규칙을 철저히 익혔다.
그 수많은 규칙이 넘치는 매뉴얼에서도 가장 중요한 규칙이라며 강조한 것이 바로 카르엔과 아르틴의 관계에 대한 규칙이었다.
카르엔의 정체를 철저하게 숨길 것, 특히 아르틴에게는 절대로 들키지 말 것.
카르엔과 아르틴이 친구나 동료 이상의 관계가 되지 않도록 절대로 조심할 것.
이 두 가지 규칙은 매뉴얼에서 100번 이상 언급될 정도로 신신당부 되는 사안이었고, 그 때문에 제타엘은 튜토리얼을 일찍 완수한 카르엔이 정체를 밝히지 않게 하도록 최선을 다해 카르엔을 케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제 머리를 뜯어져라 움켜쥐며, 제타엘은 과호흡이 올 것 같은 제 몸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상황을 파악했다.
“이런 건 비밀로 했다가 나중에 들키면 정말 큰일나고 말 거야. 그 아크라엘처럼 지옥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눈앞에서 아크라엘이 타락하는 모습을 봤던 제타엘은 공포에 부르르 떨었다. 이 사건은 자신이 혼자 입 다물고 묻기에는 너무 크고 위험한 사안이었다.
늘 모범생 같은 삶을 살던 제타엘은 그 부담감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모니터 옆에 놓인 전화기를 떨리는 손으로 들어 올려 다이얼을 눌렀다.
평생 누를 일 없을 거라 여기던 번호를 꾹꾹 누르자 잠시 후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고, 차라리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제타엘의 염원은 곧 이어 들려온 남자의 미성에 무너지고 말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대천사장 미카엘입니다.]
지난 번 사건 이후로 처음 듣는 천국의 2인자이자 가장 위대한 대천사의 목소리에, 제타엘의 온몸은 석화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미카엘님. 상태창 관리부서의 하급천사 제타엘이라고 합니다.”
[제타엘 양이군요. 지난번에 부서에서 직접 만난 이후로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무려 천사장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준다!
평소라면 감격했을 일이지만 지금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 그게, 지금 아르틴과 카르엔에 관련해서 비상사태가 발생해서, 그, 급히 보고를 드리고자 연락을 드렸습니다.”
[비상사태..말입니까?]
“그,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요령이 있는 사르디엘이라면 몰라도, 매사에 있어서 FM으로 살아가던 제타엘에게 비상사태를 포장해서 말하는 재주는 없었다.
결국 제타엘은 사르디엘이 타락한 이후 자신이 카르엔을 본모습으로 변하게 한 점부터 사르디엘과 아르틴의 행동을 하나하나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
그 보고를 전부 들은 미카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30초 남짓도 안 되는 짧은 침묵이었지만 제타엘에게는 마치 30시간처럼 느껴지는 고통스러운 침묵이었다.
허나 그 침묵을 깨고 들려온 답변은 제타엘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따.
[결국 그렇게 됐나요? 조금 더 나중에 벌어질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네?”
[그렇게 됐다는 군요. 어떻게 할까요 여신님? 스피커폰으로 해서 다 들으셨을 텐데 어서 빨리 답변을 해줘야 제타엘 양이 안심하지 않겠습니까?]
“네? 에? 여신님이 듣고계셨다고요?”
제타엘은 잠시 미카엘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실수에 대한 보고를 여신님이 직접 들었다고?
평소라면 그것만으로도 혼절할 만한 일이었겠지만, 더 놀라운 일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상태창 관리는 미카엘 네 담당이잖아! 내가 신경쓰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방치하더니!]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제가 그것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20년 넘게 막았으면 제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시끄러워! 애초에 말이 안 되잖아. 내 이상형은 저런 타입이 아닌데, 카르엔은 왜 첫눈에 반해서 저 난리...]
[투정은 나중에 하시죠. 일단은 상황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아, 제타엘양. 듣고 계신가요?]
“네..? 그, 그게..”
제타엘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방금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분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대화의 내용은 평범한 하급 천사인 자신이 들어도 될 만한 내용이 아닌 것 같았다.
평상시 몇 번이고 교육을 받았던 세계를 창조하신 여신님의 위대함이나 고귀함, 위엄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대화였기 때문이다.
그런 대화를 엿듣게 된 셈이니, 잘못 대답하면 자신의 존재가 소멸하는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
[반응을 보니 들으신 것 같군요. 방금 대화 내용은 외부에 유출하는 일이 없으셨으면 합니다. 이해하십니까?]
“무, 물론이죠! 악마들이 저를 납치한다 해도 이 사실은 소멸할 때 까지 비밀로 하겠습니다!”
[다행이군요. 사르디엘이라면 분명 천국에 퍼트렸을 것 같으니까요.]
“그, 그럴리가요, 아무리 선배님이라도..그럴리는...”
부정하려던 제타엘은 저도 모르게 말을 흐리고 말았다.
사르디엘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같은 대천사였던 미카엘님이 아니겠는가.
[그럴 아이입니다. 똑똑한 것 같지만 무척 충동적인 아이니까요. 아무튼 이번 아르틴과 카르엔에 대한 것은...]
“가, 강제 회귀를 준비 할까요?”
제타엘은 인과율이 최대치가 된 이후로 언제든 누를 수 있게 반짝이는 강제회귀 버튼으로 시선이 향했다. 정녕 자신의 실수 때문에 이 버튼을 눌러야 하는 걸까?
[아뇨, 내버려두십시오.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인데 강제로 손보는 것도 모양새가 나쁠 것 같으니까요.]
“네? 그럼...”
[저희의 방침은 계속 유지하세요. 여신님께서는 아직 고집을 못 버리신 것 같으니 저희 같은 말단은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잠시만요...]
곧 이어 들려오는 여인의 고성에 제타엘은 슬그머니 전화기에서 귀를 멀리 떼며 최대한 모른 척을 해야 했다.
[휴...아무튼 좋습니다. 기존의 매뉴얼대로 계속 해주세요. 아르틴과 카르엔을 케어하고, 정체는 숨기도록 하고, 둘의 관계에 직접적인 간섭은 하지 않으면 될 겁니다.]
“현상유지라는 말인가요? 관계를 강제로 떼어낼 필요도 없고?”
[그게 올바르지 않겠습니까. 다른 부서에서 뭐라 하면 제 이름을 팔아도 좋습니다. 제타엘의 판단을 믿고 맡기도록 하죠.]
최대 소멸까지 각오하고 보고를 올렸음에도 돌아오는 이 온건한 반응에 제타엘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물어봐야 할 질문이 있어 그녀는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전화기를 꾹 움켜쥐었다.
“...히로인 공략 특전은 어떻게 할까요? 호감도는 이미 최대치일 텐데?”
그러자 다시 전화기가 침묵했다. 이번 침묵은 무려 3분이나 길게 이어졌다.
[...일단 보류로]
“보류?”
[네, 그 외에는 제타엘이 알아서 해주세요. 전화 끊겠습니다.]
달칵. 전화가 끊기는 소리와 함께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 정적 속에서 제타엘은 멍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잠을 너무 안 잤나봐. 오늘은 1시간이라도 자야겠다.”
오늘 겪은 일들은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일들이었고, 결국 제타엘은 정신적인 도피를 선택한 후 모니터를 끈 뒤 알람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심장이 워낙 강하게 뛰고 있는 바람에, 실제로 잔 시간은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10분이 제타엘의 2주 만의 첫 수면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