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 용사 길들이기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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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액─새액─
카르엔의 가냘픈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처음 섹스를 시작 했을 때의 거칠고 힘찼던 호흡을 생각하면 기절했나 생각이 들 정도.
‘진짜 기절 했나?’
혹시나 싶어 품안에 안긴 카르엔의 등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가벼운 자극을 줘봤다.
“하으읏...♥”
내 손길이 닿기가 무섭게 뜨거운 숨결을 내뱉는 카르엔, 반응이 빠른 걸로 봐서는 기절은 아닌 것 같다.
사실 기절을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창문 밖이 아직 어둡긴 했지만 내 체감으로는 카르엔과 5시간은 넘게 해댄 것 같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잘 버티긴 했지. 샤오메이나 시르카말고 첫 경험에 이 정도로 오래 버틴 사람이 없었는데.’
샤오메이는 수인의 피가 섞인 초인이고 시르카는 몽마라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안 그래도 처음 해보는 아날섹스라서 좀 더 과격하게 한 것 같은데도 잘 버텼으니, 이정도면 인류의 대표인 용사다운 근성을 보여준 셈이지.
“카르엔, 아직도 힘들어? 좀 더 누워 있을래?”
“아...아르틴...♡ 조, 조금만 더어...이렇게 있으면 안 될까...?”
다정한 목소리로 괜찮은지 물어보자, 카르엔은 야릇한 신음 같은 한숨을 내뱉으며 내 품안에 파고들었다.
카르엔의 부드러운 살결은 격렬한 정사로 인해 마치 오일이라도 바른 것처럼 땀으로 반들거리는 상태.
평소라면 끈적거려서 기분 나쁘다고 밀쳐냈을 상황이지만, 지금의 나는 카르엔을 밀쳐내는 대신 부드럽게 한 팔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래, 좀 더 쉬자. 어차피 꿈의 세계니까 느긋하게 있어도 괜찮을 거야. 정신 차릴 때 까지 기다려 줄게.”
“저, 정말? 그럼 10분..아니, 30분만 더 쉬면 안 될까...?”
“그럼 1시간 누워 있다가 일어나자. 그 정도면 정신 차릴 수 있지?”
“응! 고마워 아르틴♡”
내가 자신의 어리광을 받아줄 거라고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건지, 카르엔은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내 품에 꽉 안겼다.
내 가슴 품에 얼굴을 부비기도 하고, 킁킁거리며 내 냄새를 만끽하는 것이 꼭...
‘개 같네.’
욕이 아니라 정말 말그대로 개 같은 느낌이었다. 남자일 때는 역겹기만 했는데 여자의 모습으로 이러니 강아지 같아서 귀엽다고 해야 할까.
“스읍...하아...이게 아르틴의 냄새...아르틴의 촉감...♡ 아르틴의...뜨거운 피부...♡”
‘...아닌가? 그냥 변태라고 해야 하나?’
모르겠다. 평상시에도 변태 같던 녀석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평소랑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제 그런 변태가 내 연인이라고 생각하니, 속으로 비꼬면서 욕하는 것도 영 즐겁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제 연인을 깎아 내리는 남자야 말로 가장 병신이 아닌가.
‘이런 날이 올 줄은 나도 상상도 못했는데, 카르엔과 연인이라니...다른 얘들한테는 어떻게 설명하지?’
생각해보니 조금 좆 된 것 같다. 연인들이랑 주변 사람들에게 카르엔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카이엔이 여자가 되니까 너무 꼴려서 그만 유혹에 넘어가서 연인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문장을 늘어놓고 보니 조금 이상한데.’
솔직히 내 고추를 잘못 휘두른 탓에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손톱만큼 떳떳한 부분은 있다. 일단 카르엔의 변한 모습이 너무 꼴리는 데 어쩌겠는가?
게다가 이곳에 내 발로 걸어 들어온 것도 아니고, 무방비하게 왔다가 반쯤 강제로 당한 셈이니 조금의 명분은 있는 셈이다.
“카르엔. 냄새 맡는 도중에 미안한데 뭐 좀 물어봐도 될까?”
“쓰읍...하아...츄릅...응? 무슨 일이야 아르틴?”
내 가슴 골에 얼굴을 파묻다 못해 이제는 혀로 흐르는 땀을 맛보는 카르엔의 표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척이나 순수해보였다.
정말로 순수하게 욕망에 충실하다고 해야 하나.
“이번에 나 납치하는 데 도와준 사람. 누구누구야?”
“...어? 응?”
“일단 시르카랑 스승님은 도와줬잖아. 맞지?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두 사람 말고 조력자가 또 있는 것 같거든. 맞지?”
“...”
방금 전까지 솜사탕을 먹는 어린 아이처럼 행복해보이던 카르엔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표정만 봐도, 내 추측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족인 시르카의 힘을 이용해서 우리 둘을 가둔다니 스승님이 생각해내기엔 너무 과격한 방법이지. 그렇다고 시르카가 짠 계획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담백해. 녀석이었으면 아마 다짜고짜 몽마섹스빔부터 갈기고 시작했겠지?”
“그, 그건...”
“카르엔 네가 구상한 계획도 아닐 거야, 이 장소, 겉보기에는 장미관의 환각하고 비슷하지만 창밖의 풍경이 너무 구체적이거든. 그럼 보자...”
나를 단번에 기절 시킬 정도의 실력을 지닌 사람. 아마도 날 불러낸 천마겠지.
내 마법으로도 간단히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환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시르카일 테고.
그럼, 내가 원래 살던 세계의 풍경을 알고, 카르엔을 돕기 위해 두 사람과 협력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람은...
“나, 나는 말 못해...날 도와준 사람들인걸!”
내가 머릿속에서 스스로 정답에 도달하자, 뒤늦게 카르엔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나랑 눈을 못 마주치는 걸 보면 내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좀 더 캐물으면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르고.
‘카르엔이 나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할 리가 없지...’
그 강렬한 집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바로 나다. 원작의 히로인들의 어필들도 무시하고 언제나 나만 바라보던 녀석 아닌가.
“그래, 대답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어라? 더 안 물어봐?괜찮아? 호, 혹시 화났어?”
“화 안났어. 너무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나는 캐묻는 대신 불안한 눈으로 나를 힐끔거리는 카르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안심시켜줬다.
안 그래도 인간관계가 협소한 카르엔인데 여기서 조력자들을 말하게 시키면 악영향만 늘어날 터. 이제 연인이 되기로 했는데 나라도 카르엔을 좀 챙겨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카르엔 아니더라도, 이번 사건에 대해 추궁할 사람은 더 있었다.
[자, 그러면 이번에 마음대로 날 가뒀으니 벌로 시르카도 3일간 계약의 룬 안에 갇혀도 되겠지?]
[네?! 갑자기 저한테 왜 그러세요 주인님!?]
[왜 그러긴. 내가 저번에 몽마섹스빔 쏘고 튀었을 때 말했지? 또 이러면 가만히 안둔다고.]
내 다음 타겟은 시르카였다. 평소 죄질이 무거운 탓에 벌을 주는 것도 어렵지 않은 만큼, 겁을 주는 것도 딱히 어렵지 않았다.
[이, 이건 가정 폭력이에요! 저도 주인님의 연인이자 하렘 아닌가요? 도대체 어느 남편이 아내를 마음대로 3일간 가두나요!]
[아내가 남편을 마음대로 가두는 건 말이 되고? 게다가 이미 전과가 3번이 넘잖아. 매번 혼내준다고 말만 하고 안 혼내니까 계속 이러는 것 같아. 이번에는 진짜 가둬야겠어.]
[그럴 수가...저, 저는 그저 부탁받은 대로 했을 뿐이라고요! 억울해요!]
내가 진짜로 계약의 룬 안에 가둘 것처럼 엄포를 놓자, 시르카는 정말로 억울한 듯 살짝 울먹이기까지 했다.
제 딴에는 매료의 권능도 안 썼는데 전부 뒤집어쓰는 게 억울하다는 거겠지.
[뭐, 갇히지 않을 방법은 있지. 네가 주동자를 말해주기만 하면 처벌을 좀 낮춰줄 수 있는...]
[천마님하고 사르디엘이요! 천마님이 맨 처음 부탁했고 사르디엘이 판을 전부 짰어요! 저를 끼워 넣은 것도 사르디엘이에요!]
[..어? 그, 그래? 사르디엘이라고?]
[네! 이제 계약의 룬 안에 가두시진 않을 거죠 주인님? 바로 말씀드렸잖아요!]
사르디엘이 주동자 중 하나라는 사실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지만, 시르카의 빛보다 빠른 배신은 나조차 당황스러운 속도였다.
[...뭐, 그렇다고 하는데 사르디엘. 뭐 할 말 없어요?]
당황을 억누르고 나는 나지막이 사르디엘을 불렀다.
사실 방금 심문은 사르디엘을 자극하기 위한 심문이기도 해서 텔레파시의 대상을 두 사람으로 지정해뒀으니 전부 들었을 것이다.
[...나는 묵비권을 행사하겠어.]
[예? 묵비권이요?]
이게 무슨 개소리야?
[그래! 묵비권! 나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도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 아니, 나도 이 사회의 피해자야! 아르틴x카이엔을 미는 게 도대체 뭐가 나빠!]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미란다의 3원칙을 고지하며 스스로를 변호하는 사르디엘의 뻔뻔함에 나는 순간 속으로 감탄을 하고 말았다.
게다가 묵비권을 행사한다면서 반쯤은 스스로 자백까지 하고 있네.
[좋아, 두 사람은 현실로 돌아가서 봅시다. 벌은 그 때가서 생각해보죠.]
[버, 벌? 무슨 벌?! 서, 설마..나, 나는 네 수호천사야 아르틴! 그런 음란한 건..!]
[시르카, 1시간 지나면 여기서 꺼내주고 그 때까지는 현실이랑 연결 끊어줘. 느긋하게 쉴거니까. 알았지?]
[네! 충성스러운 하인 시르카. 주인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두 사람이 떠드는 텔레파시 탓인지 머리 안이 너무 시끄러워 어지러워진 나는 시르카를 시켜 꿈의 세계와 현실과의 연결을 끊기로 했다.
그 직후, 공간이 살짝 일렁이는 느낌이 들자 이내 사르디엘의 이상한 헛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비로소 내게도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저기, 아르틴...정말 화 안 났어?”
“너도 참, 괜찮다니까? 방금 시르카한테 시켜서 현실하고 연결도 끊었으니까 너도 편히 쉬어. 나도 피로 좀 풀다가 가야지.”
내가 괜찮다며 기지개를 켜며 자세를 바로 눕자, 카르엔은 머뭇거리는 표정을 하면서도 내게 부둥켜 안겨와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명확하게 전달해왔다.
아마도 내가 계속된 텔레파시로 머리가 지끈거려 표정이 안 좋으니 자기 때문인 줄 알고 불안한 느낌인 거겠지.
결국 이럴 때 달래주는 건 남자의 몫이 되겠고.
“너무 걱정 하지 마 카르엔, 나 정말로 화 안 났다니까?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
“알잖아. 나 내 여자한테는 엄청 관대한 거.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오붓하게 이 시간을 즐...잠깐, 너 지금 우는 거야?”
카르엔을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이던 나는 갑자기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상냥하게 대해주고 있는 데 울기까지 한다고? 내가 그렇게 무섭게 느껴진 건가?
“아, 아냐 아르틴. 이건 기뻐서...기뻐서 그래...”
내가 놀라서 당황하자 카르엔은 미소를 지으며 제 눈물을 손으로 훔치고는 두 팔로 내 목을 끌어안았다.
“이 순간이 너무 꿈만 같아, 너무 행복해서 이대로 잠에서 깨면 없던 일이 되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기쁜 걸...”
“...없던 일로 하다니,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 같아?”
“후후후, 그런 건 아니야. 아르틴도 말했잖아? 본인이 자기 여자한테 무척 약한 거.”
서로의 살결이 맞닿자 카르엔의 풍만한 가슴이 내 가슴을 기분 좋은 무게감으로 짓눌렀다.
내가 그녀의 무게와 온기를 느끼는 것처럼, 카르엔도 자신의 살결에 맞닿은 내 촉감과 온기를 다시 만끽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르틴, 나 부탁이 있어.”
“부탁?”
“나, 아르틴이 만들어준 악세사리 가지고 싶어. 그리고 무기도.”
갑자기 이상한 요구를 해오는 카르엔에,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카르엔은 고혹적인 미소로 나를 바라봤다.
“지난번에 연금술 동아리에서 네 연인들이랑 친구들은 다 받을 때에도 나는 아무것도 못 받았잖아? 이제는 받고 싶어.”
“...그랬지 참. 그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응. 그날 서러워서 방에 돌아가서 혼자 울었거든. 특히 유니코르가 얼마나 부러웠는데.”
...그 날 카르엔에게 아무것도 안 주기는 했지만, 설마 울기까지 했을 줄이야. 그때 알았으면 별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이렇게 알몸으로 카르엔과 마주보고 있으니 묘한 죄책감이 몰려왔다.
“하아, 알았어. 받고 싶은 건 뭐든 만들어줄게. 말해봐. 어떤 악세사리로 줄까? 무기는 검이면 충분할 테고.”
“...정말? 뭐든 만들어 줄 거야?”
“그래, 뭐 만드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받고 싶다면 뭐든 만들어 줄게. 한동안 상태창 상점도 안 썼으니까 포인트도 넉넉하고. 뭘로 만들어줄까? 브로치? 귀걸이? 머리핀?”
“반지.”
“...응?”
“나는 반지를 받고 싶어. 왼손 약지에 낄 수 있는 거.”
왼손 약지라니, 그거...
“...커플링? 아니면 약혼반지?”
“그런 게 아니란 거, 너도 알고 있잖아 아르틴.”
...설마, 결혼반지?
내가 입을 뻐끔거리자, 카르엔은 내 입모양을 읽더니 그게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트너끼리의 약속이니까, 당연히 지켜줄 거지? 너무 화려하진 않아도 좋아. 대신 너도 낄 수 있게 한 쌍으로 맞춰줘. 다른 여자 걸 같이 만드는 것도 안 돼. 오로지 한 쌍이야. 알겠지?”
“어, 으응...아니..그...”
“알겠지?”
갑자기 카르엔에게서 묘한 박력이 느껴져,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거 내가 당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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