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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238화 (238/266)

〈 238화 〉 용사 길들이기 #05

* * *

그 뒤로 나랑 카르엔은 묘하게 어정쩡한 분위기가 되었다.

갑자기 결혼반지를 요구하는 카르엔에게 당황한 나.

다시 음습하게 나를 탐하기에는 정신을 차린 듯한 카르엔.

결국 우리 두 사람은 적당히 느긋하게 누워 옛날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기억나? 너 나랑 처음 만났던 회차 때 던전 실습 전에 강해지겠다고 밤새서 검술 연습했던 거? 그때 땀흘리는 모습 참 멋졌는데...”

“3회차인가? 레비아탄의 힘을 얻겠다고 심해의 던전에 떨어졌을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심해의 제독 암모서스가 던전 밖에서 대포로 포격해서 언제 무너져도 안 이상했었잖아. 그때 아르틴이 절망한 우리들을 이끌어줬고.”

“지난 회차 때는 정말 오붓하게 대련도 많이 했었는데, 참 그립다...응? 데이트 방해? 그...런 일이 있었던가? 기억이 잘 안 나는 걸...”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야기를 주고받은 건 아니었다.

대부분 카르엔과 과거에 있었던 일들의 이야기였는데, 카르엔은 신나서 떠들었지만 나는 이 대화를 썩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고?

그 때를 아련하게 떠올리고 싶어도 추억 속의 파트너는 아름다운 미녀가 아니라 고고한 미청년 카이엔 실버소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있으니 기분이 또 이상해지려고 하네.’

마치 유니코르의 유니콘 모습을 상상하면서 인간 모습의 유니코르를 껴안고 있는 기분, 절대 좋다고 할 수 있는 느낌은 아니다.

그렇다고 언짢은 표정을 짓기도 힘들다.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렇게 즐거운 표정으로 떠드는 파트너의 모습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괜히 뭐라고 했다가 분위기가 여기서 더 어색해지면 그건 또 어떻게 풀어.

그래도, 이 대화가 기분 나쁘기만 했냐면 그건 또 아니다.

“그리고, 그리고...”

‘...여태까지 나를 좋아했던 게 진심이라는 건 잘 알겠네.’

함께 겪으며 해쳐 나왔던 아수라장의 경험부터, 나조차도 잊고 있던 나에 대한 소소한 기억까지 전부 기억하는 카르엔.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느끼고 겪었던 모든 것을 추억으로 삼으며 말하는 카르엔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반지, 결혼반지라...’

사실 이번 던전 실습이 끝나면 연인들을 위한 선물을 하나씩 준비할 생각이었다.

시험 전에 약속한 데이트도 몇 개나 밀린 상황, 공정성을 위해 모든 연인들과 데이트를 해준다고 생각하면 몸이 3개라도 부족하겠지.

하지만 메피스토가 나를 위해 손수 귀걸이를 만들어준 것처럼 악세사리를 만들어주면 다들 데이트 때 까지 기다려 주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섞인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카르엔 이 녀석이 결혼반지를 받고 난 이후에 벌어질 일이겠지.

‘다른 얘들도 분명 목걸이나 귀걸이, 브로치 같은 거 대신 반지를 요구하겠지? 누구 한 명 다른 걸 만들어주면 말이 나올 거고...’

내 왼손 약지는 하나인데 10쌍이 넘은 결혼반지를 각각 다른 디자인으로 만들어서 껴야한다?

어쩐지 상상만으로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다. 정면으로 돌파할 방법이 전혀 떠오르질 않아.

‘...어떻게든 우회할 수 있도록 꼼수를 좀 써야겠다.’

결국 10명이 넘는 연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답은 언제나 차선과 차악을 오고갈 뿐이다.

그걸 최선인 것처럼 잘 포장하는 게 능력이겠지.

...이 또한 숫사자의 고충이라 생각하고 참자.

“아르틴? 듣고 있어? 혹시 다른 생각해? 설마 다른 여자 생각하는 거야?”

“...듣고 있어. 예전에 언더 시티 정리할 때 암살자들하고 열흘 동안 싸우던 이야기 하고 있었잖아.”

“정말 듣고 있네? 그 때 잠도 못 자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기억하지? 그 여자가...

딴 생각을 하는 나를 향해 섬뜩하게 눈을 부라리던 카르엔이 다시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말이 적던 카이엔은 조금 그리워 질 것 같다. 몸이 바뀌면 정말로 정신도 여자다워 지는 걸까?

아니면 카르엔이 원래 여성적인 면이 있어서 나에게 반한 걸지도 모르고, 이건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기 힘들어서 나는 그냥 카르엔이 계속해서 떠드는 수다에 적당히 맞장구만 치며 녀석의 풍만하고 부드러운 가슴을 마음껏 주물럭거렸다.

카르엔도 얼굴만 붉힐 뿐 딱히 손을 거부하지는 않아 시간이 다 될 때 까지 가슴만 주무르다가 끝난 것 같다.

왜 여자들이 액체괴물에 그렇게 열광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

“으그그극! 잘 잤다.”

이야기를 듣다가 체감 시간으로 1시간이 지난 것 같자, 그 직후 귀신 같이 카르엔이 잠들었다. 나도 그 이후 쏟아지는 잠에 눈을 감자 현실에서 상쾌하게 눈이 떠졌다.

요 며칠 쌓였던 조금 과로를 해서인지 쌓였던 피로도 말끔히 풀린 상태.

꿈속에서는 그렇게 격렬하게 성행위를 했는데도 몸은 푹 쉬었다는 게 좀 이득을 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기분이 나쁜 척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찡그려야했다.

“저...주인님? 저 1시간째 무릎 꿇고 반성하고 있는데...헤헤...”

“...”

“아잉~♡ 용서해주세요오~♡ 주인님~♡ 네? 시르카가 잘못 했으니까아~♡”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반성의 자세로 침대 밑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시르카였다.

이번 사건은 본인을 제대로 혼내려고 한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평소라면 뻔뻔하게 나왔을 시르카가 내 눈치를 보며 애교까지 떨고 있었다.

“시르카.”

“네!”

“일단 앞으로 2주간 야한 짓 압수야.”

“네?!?”

“꿈에서도 압수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스킨쉽 포함해서 내가 먼저 하기 전 까지는 일체 금지야. 유혹도 안 돼. 알았어?”

“그, 그럴...수가...”

내 단호한 처벌에 시르카의 얼굴 표정이 순결한 처녀가 더럽혀지는 모습을 본 유니콘 같은 표정이 되었다. 억장이 무너졌다는 뜻이지.

“서큐버스에게 야한 짓 금지라니! 절 굶겨 죽이실 생각인가요?”

“시르카 너 130년 동안 처녀로 살았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정기야 당연히 나눠줄 테니 걱정 하지 마.”

“이미 맛 본 이상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요! 이미 인생의 절반을 손해 봤는데 어떻게 그 시절로 돌아가요! 하, 한 번만 선처해주세요!”

“안 돼. 안 바꿔줘. 용서받고 싶으면 이쁜 짓 착한 짓 많이 하던가. 그러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으으...괜히 도와줬어...”

시르카는 제 하트 모양 꼬리를 축 늘어트린 채로 쪼그려 앉아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 이것만 해도 많이 봐준 거다. 이러다가 사고치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 솔직히 데이트 압수 안한 것만 해도 고맙게 여겨야지.

“저...저어기...♡”

“...?”

하지만 시르카보다 더욱 이상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사르디엘이었는데, 이쪽도 평소답지 않게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인 채 양팔을 가슴으로 모아 수줍음을 온 몸으로 있는 힘껏 표현하며, 당시에 다리를 살짝 배배 꼬는 상태.

그러면서도 그 눈은 미안함이라기보다는 두려움과 기대감이 공존하는 눈빛이라,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지 여간 알기가 힘들었다.

“나, 나는 어떻게...할 생각이야? 서, 설마 네 수호천사이자 계약자를, 마악 험하게 대할 그럴 생각은 아니지? 우리 잘 생각해야해. 나는 천사라고, 천사. 순결과 미덕을 상징하는...”

“도대체 뭘 상상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 좀 하세요. 제가 잡아먹기라도 하겠습니까?”

상태가 이상한 사르디엘을 내가 진정시키려고 하자, 사르디엘은 오히려 경악한 표정을 짓더니 파르르 몸을 떨기 시작했다.

“자, 잡아먹어?! 그,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본색을 드러냈구나, 아르틴! 이 짐승 같은 남...”

“그냥 입 다물고 시르카 옆에서 손 들고 서있으세요.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손 들고 있으라고? 지금, 천사를 손들기로 벌을 주겠다는 거야...?”

“이건 벌이 아니죠, 제대로 된 벌은 나중에 줄 테니까 지금은 일단은 벽보고 서있으세요. 저랑 눈 마주치지 말고. 딴 짓 하지 말고. 시작!”

내 말에 사르디엘은 굉장히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빛에 감돌던 공포나 기대가 사라지며 허망한 표정으로 벽보고 손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뭘 할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걸까? 아까부터 상태가 이상하네.

“팔 좀 더 높이 드세요. 신체능력도 좋은 사람이 왜 그렇게 쭉 못 뻗어요?”

“...가, 가슴이 크니까 어깨가 결려서 그래!”

“제 연인 중에 사르디엘님보다 가슴 큰 사람도 손 들기 잘 하니까 그냥 드세요. 어차피 나중에 줄 벌은 이보다 더 힘들텐데 지금부터 앓는 소리 하지 말고요.”

“...히잉.”

그제야 사르디엘의 팔 높이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높이 올라갔다.

그 모습이 썩 보기가 좋아 흐뭇한 미소를 짓던 나는 문뜩 보여야 할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스승님이랑 카르엔은?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자고 있나?”

“카르엔? 아, 용사 말인가요? 방금 정신을 차리자마자 천마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던데요? 용사가 주인님보다 먼저 일어났거든요.”

“카르엔이 스승님을 데리고 나갔다고?”

“네, 아마 멀리 가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찾아볼까요?”

음, 카르엔과 할 이야기도 좀 있지만 천마랑도 할 이야기가 있긴 한데. 일단 왜 이 이상한 계획에 스승님이 가담했는지 부터 물어보고 싶다.

그런데 묻는다고 순순히 답해줄지는 의문이다. 유치하게 굴 때는 천마가 아니라 한 없이 유치한 좆마가 되는 분이 아니던가.

게다가 밤이 꽤 늦었는지 달맞이관 주변의 산에서 밤벌레나 짐승들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시르카, 내가 여기 온지 몇 시간이나 지났어?”

“음~대략 한 3시간 정도 지났죠? 현실하고 시간이 2배 정도로 차이 나도록 조정해놨거든요.”

3시간이라, 그럼 더 늦으면 슬슬 유니코르가 어디 있냐면서 텔레파시로 나를 잔뜩 쪼아댈 시간이다. 오늘은 더 이상 텔레파시로 머리 아프고 싶진 않아.

“나는 그럼 먼저 돌아갈 테니까, 카르엔하고 천마님은 내일 작전 짤 때 보자고 전해줘, 알았지? 오늘 일은 비밀로 하고.”

“어라, 아르틴 너 먼저 돌아가면 우리는? 나도 슬슬 잠자고 싶은데...?”

벽보고 손들고 있던 사르디엘이 다시 기대감이 섞인 목소리로 말해왔다.

그 말에 나는 작게 고민했다. 평소라면 벌을 주기 위해서라도 사르디엘을 데려갈 텐데 지금은 사르디엘의 상태가 많이 이상하단 말이야. 자꾸 뭔가를 기대하는 모양새고.

“어차피 며칠 정도는 안자도 충분히 괜찮은 분이잖아요? 그냥 여기 있다가 시르카랑 같이 와요. 사르디엘 이야기도 내일 아침에 들을 테니까 준비해 두시고.”

더 귀찮아 지기 전에 오늘은 여기서 머리 좀 식히게 해야겠다.

게다가 오늘도 다른 연인들하고 잠자리를 같이 해야 하는데 사르디엘이 있으면 침대를 다른 곳에서 써야 한단 말이지. 눈치도 좀 보이고.

“그, 그런...! 나를 극진히 모시던 아르틴은 어디 간 거야? 이러다가 내 호감도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뭐 요즘 보니까 저 많이 아끼시는 것 같은데, 조금 떨어지는 건 감수하죠 뭐.”

“그, 그럴 수가!”

사르디엘은 내가 자신의 요청을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이런 계획을 진행하고도 내 무상의 호의가 계속될 줄 알았나 보지.

이 기회에 따끔하게 벌을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좀 제대로 된 벌을 준비해 볼까.

“저는 그럼 갑니다. 서로 누가 팔 안 내리나 감시하고 있어요. 알았지?”

““네...””

내 말에 천사와 마족이 동시에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달맞이관의 옥상, 달빛이 세상을 은빛으로 물드는 아름다운 풍경이 인상적인 곳에 두 여인이 서있었다.

“아르틴이 갔구나, 시간이 늦었으니 제 연인들을 챙기러 가나 보지.”

천마는 마나를 흩뿌리며 빠르게 기숙사로 달려가는 아르틴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쯧쯧 차고는 카르엔을 바라봤다.

“보았지? 이대로는 너는 온전한 관심을 얻지 못한다. 그러니까 계획한 대로 이제 2번째 계획을 진행할 때다. 알겠느냐?”

천마에게 이번 계획은 단순히 카르엔과 아르틴을 이어주기 위함이 전부가 아니었다. 제 증손녀인 샤오메이가 아르틴에게 단단히 쓰인 콩깍지를 벗겨내는 것이 가장 큰 목적.

그것을 위한 2단계가 바로 하렘의 연인들에게 카르엔과 아르틴이 있었던 일을 알리며, 카르엔이 하렘에 정식으로 참가하는 것이었다.

“1단계 계획이 그렇게 순조롭다 못해 과하게 잘 될 줄은 몰랐지만...오히려 좋지 않으냐? 남자였던 너를 아르틴이 품었으니 반응을 보이는 여인들이 나올 터다.”

본래라면 아르틴에게 입맞춤을 받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지만 목표치는 1000%는 넘게 달성한 셈, 이 기회를 천마는 놓칠 생각이 없었다.

“다들 알게 될 테지. 아르틴이 좋은 사람, 좋은 영웅, 좋은 친구는 되더라도 좋은 남자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럼 하렘의 결속에는 금이 갈 테고 정신을 차린 녀석들이 하나 둘 나오게 될 것이야. 그 틈을 노려 네가 아르틴을 독점하는 것이다.”

아르틴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그런 난장판에 자신의 증손녀를 내버려뒀다가는 죽어서 남편을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아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다.

“내일, 계획을 점검하기 위해 다 같이 모이는 날 터트리는 거다. 알겠느냐? 망설이지 말고 단번에...”

“스승님.”

그것을 묵묵히 듣고 있던 카르엔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천마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저는 이번 사건에 대해 한동안 함구하고 있을 생각입니다.”

“...뭐라고?”

천마의 미간이 주름이 새겨졌다. 이 제자가 뒤 늦게 반항기라도 오기라도 한 것인가?

“네 목표는 고작 아르틴의 하렘 중 하나가 되는 것이었느냐? 정신 차려라, 그래서는 10명이 넘는 연인 중 하나에 불과한 삶을 살 것이야.”

“평생 입 다물고 있겠다는 게 아닙니다. 곧 있으면 큰 전투가 있을 지도 모르는데 아르틴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웃기는 소리를, 당장 어제만 해도 각오를 다지지 않았느냐? 뒤늦게 마음이 바뀐 이유라도 있느냐?”

이미 이번 전투에서 군단장이나 권속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고도 아르틴을 흔들기 위해, 그리고 아르틴의 하렘을 흔들기 위해 이런 강수를 준비하지 않았는가.

아니, 이런 중요한 순간에 여인을 늘리기에 아르틴의 모습을 고발하기에 더욱 좋은 법이다. 그래서 천마는 조금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니다. 왔을 때 잡지 않으면 놓치고 만다. 그것을 알고도 너는...”

“저는 제 사랑으로 아르틴에게 상처를 주기 싫습니다.”

허나 카르엔은 의지를 굳혔다. 방금 전 달콤한 꿈에서 아르틴이 보여줬던 모습들을 떠올렸다.

“제게 그렇게 다정하고 상냥하게 대해줬던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입히고 싶진 않아요.”

“...너?”

“만약 이번 습격에서 누군가 죽기라도 한다면...그리고 그 이유가 자신의 이유라면, 아르틴은 슬픔을 버티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르틴과 대화하며 떠올렸던 과거의 아르틴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언제나 아르틴의 계획이 성공했던 것은 아니고, 지키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그럴 때 마다 아르틴은, 제 살이 찢겨지고 영혼을 칼로 베인 것처럼 슬픈 표정을 짓곤 했다.

카르엔은 그런 표정을 하는 아르틴을 볼 때 마다, 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아픔과 슬픔을 느끼곤 했었다.

“밝힌다고 해도 습격 이후에 밝히겠어요. 만약 그 전에 천마님이 밝힌다면 제가 직접 나서서 부정 할 겁니다.”

“...그걸로 괜찮겠느냐? 정말로?”

잠시 침묵한 천마가 내뱉은 괜찮겠냐는 말은, 실로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그 말에 카르엔은 잠시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지금 자신의 가슴은 어떤 상태일까.

──따뜻하고 포근했다. 과거와 현재를 합쳐도 이토록 행복한 감정을 느낀 적이 없을 정도로.

“네, 충분해요.”

문뜩 카르엔은 아르틴의 연인들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런 행복을 준 남자를 위해서라면, 제 자신을 조금 희생해도 괜찮지 않을까.

“분에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한 걸요.”

──달빛을 받아 미소 짓는 카르엔의 표정은 더 없이 아름다웠다. 그래서 천마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냐...”

천마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달을 바라봤다.

어쩐지 오늘은 달빛이 너무 밝아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찬란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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