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 미래 계획은 계획적으로 #02
* * *
싸늘하다.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는 이 공간에서 존재할리 없는 침묵이 계속해서 내 목을 조르고 있다.
그 침묵이 5분, 10분, 점점 늘어갈수록 더더욱 숨을 쉬기가 힘들다. 왕국 최강의 여전사와 인류 최강 후보 중 한명에게 직접 전수받은 호흡법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아직 패닉에 빠지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꺄르륵! 꺄르르!”
“...!”
내 품에 안긴 붉은 머리의 악마소녀가 웃음을 터트릴 때 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 소녀에게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붉은 머리를 확인한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내 머리카락으로 올라간다. 그럼 다시 이 상황에 대해 해명하라는 침묵의 시위가 시작되는 법이다.
이러다가 정말로 숨 막혀서 죽겠네.
“저기...”
결국 이 분위기를 참지 못한 내가 가장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연인들 중 가장 순수한 세니아 선생님과 조력자중 가장 타락한 것 같은 사르디엘이 오기 전에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자 다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다.
이걸 뭐라고 이야기하지? 어떻게? 아그네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카르엔, 왜 배신당해서 중독으로 죽을 때 보다 상처받은 표정인데?
“...일단 오해입니다. 다들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정말로 오해입니다.”
“오해? 무슨 오해요? 오라버니가 잘~설명해 주기 전까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죠.”
샤오메이의 목소리가 장벽 너머의 겨울보다 시리게 차가웠다. 지난번에 4p난교를 들켰을 때도 이 정도로 차갑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게다가 본래라면 저런 공격적인 어투를 말려야할 아그네스조차 이 상황에는 당혹을 가리지 못하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즉, 지금 내 하렘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라는 거지.
어쩔 수 없다. 천마와 조르바의 시선이 따갑기는 하지만, 정면으로 나설 수밖에.
“예전에 너희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지, 마왕을 토벌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2세를 가지지 않을 거라고. 그 날 이후로 나는 피임마법까지 직접 정관과 낭심에 새겨가며 확실히 피임을 해왔어.”
“네, 그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럼 이 꼬마아이는 대체 뭔가요?”
“그에 대해서지만, 나는 정말로 단 한 번도 피임을 게을리 한 적이 없어. 정말이야. 게다가 얘를 봐. 못해도 6살은 되어 보이는데 내가 그런 아이가 있겠어?”
“그, 그건...”
“내 첫 경험은 반년이 지나지도 않았어. 그건 너희들이 가장 잘 알고 있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만한 딸이 있겠어?”
내 논리적인 설명에 이야기를 듣던 연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기 시작했다. 내 숨겨둔 자식이라고 하기엔 자칭 내 딸은 너무 나이가 많은 상황.
그래, 논리적으로 내가 이 나이대의 자식을 가지는 것은 무리다. 내 첫 섹스가 아직 3달이 안 됐는데 어떻게 이만한 아이가 있겠어.
“아니야! 우리 아빠야! 나도 아빠도 머리가 빨게!”
이야기에 여자아이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나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이미 타당한 이론을 하나 준비해놨지.
“꼬마야 잘 보렴. 내 머리도 빨갛지만 저기 조르바 오빠의 머리도 빨갛잖아? 네 나이를 고려하면 내가 아니라 조르바의 아이가 맞지 않을까?”
수군수군, 그 말에 주변의 여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조르바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르바는 극히 드물게 매우 당황한 얼굴로 양손을 내저으며 격렬히 부정했다.
“자, 잠깐만 아르틴! 내가 많은 연인과 관계를 맺긴 했지만 나도 늘 피임은 확실히 했다고! 게다가 나는 뿔 달린 여자랑 한 적은 없어!”
“잘 생각해봐. 1명쯤은 정체를 숨기고 네게 안긴 악마나 마족이 있을 수도 있잖아? 어릴 적부터 그렇게 많은 여자들과 교류를 했다면 너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했을 수도 있지.”
“이, 이봐...아르틴, 왜 그런 오해를 하는 지 모르겠지만 나는 억울하다고...?”
내 합리적인 추측에, 조르바도 확신에 찬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도 100% 확신은 없다는 거겠지. 상인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조르바는 그런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을 테고.
좋아, 이대로 몰고 가서 흐지부지로 만든 다음, 이 일이 대체 어떻게 된 건지 확실히 조사해야...
“아니야! 저 아저씨는 아빠 아니야! 엄마가 아빠 이름은 아르틴이랬어!”
“거 봐!!! 나 아니잖아! 내가 아니라고! 아르틴 네 녀석 아이잖아!”
여자아이의 확고한 대답에, 조르바가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그와 동시에 여인들의 시선이 더욱 날카롭게 내 온몸을 난도질 해대기 시작했고.
시발 좆됐다. 내 아이라고? 정말로? 쾌락 없...는 책임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그럼 아가야, 엄마의 이름이 뭐니? 누가 아빠가 아르틴이라고 했어?”
그때 바이올렛이 떨리는 목소리로 최대한 상냥하게 묻자, 여자아이가 다시 한 번 당당하게 외쳤다.
“우리 엄마는 메피스토펠레스야! 지옥에서 가장 쌘 왕이야!”
“세상에 여신님 맙소사! 아르틴 너어!?!”
“아,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저는 메피스토와 피임을 확실히 했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가장 먼저 목소리를 높인 마리안느 누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나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부정해야했다.
그와 동시에 뿌득 이를 갈며 당장이라도 피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카르엔, 분한 표정으로 눈물을 훌쩍이는 시온까지. 점점 상황이 개판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세상에, 뿔을 보고 조금 예상은 했지만. 메피스토랑 나의 아이라고?
‘치, 칭호 효과에는 내가 원하는 사람만 임신 시킬 수 있다고 했었는데. 게다가 피임은 2중 3중으로 확실히 했는데?!’
아니, 다시 보니까 ‘동시에 원한다면 언제든지 임신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있었다. 이거 그럼 피임은 선택의 유무가 아닌 건가?
내 강력한 정자가 결국 피임 마법을 뚫고 메피스토의 난자를 채웠다고?
“아니 잠깐. 생각해보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난 지옥에 다녀 온지 아직 일주일도 안 지났는데 이만한 아이가 어떻게 나와?”
“...그것도 그렇긴 하구나. 바이올렛. 마녀인 너라면 알고 있지 않느냐?”
“글쎄...벌레나 군체의 악마도 아닌 이상 그렇게 빠를 리는 없는데...대군주의 혈통이라 그런 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지옥에서 메피스토펠레스라면 신이나 다름 없을 테니까...”
그럴 수가. 나는 확실히 피임을 했는데 아이라니. 마왕 토벌 하나만 신경 쓰는 것도 벅찬데 이제 육아까지 해야 한다고?
“나, 나는 억울해...피, 피임 했다고...확실히 피임 했는데...”
“쯔읏, 결국 못난 제자가 사고를 쳤구나. 다른 여자도 아니고 대악마의 자식이라니. 이제 어쩔 셈이냐?”
천마의 힐난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자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미니 아르틴이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아이를 눈앞에 두고 말해야 한다고? 너는 피임 실패의 결과물이라고?
‘...절대, 절대 그럴 수 없어.’
고아원 시절, 아이들의 따돌림과 누명으로 생각하는 방에 홀로 갇힐 때면 생각하지 않았는가. 나는 왜 부모님에게서 버려져서 고아원에 오게 된 걸까 하고.
내 아이만큼은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할 수는 없었다. 비록, 비록 내가 계획적으로 낳은 아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빠?”
“...미안해. 네 앞에서 너무 못난 모습만 보여 버렸네. 못할 말도 잔뜩 한 것 같고. 내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마렴. 알았지?”
──내 첫 딸아이 꼭 끌어안아주며 다정하게 등을 쓰다듬어주자, 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빠 말 신경 안 쓸게!”
“아, 아빠라니...서방님. 그 아이를 받아들일 건가요? 정말 악마의 아이를?”
“받아들여야지. 내 아이라잖아. 그럼 내가 책임을 다해야지.”
여전히 메피스토가 내 아이를 임신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나중에 이유를 묻더라도, 지금은 믿음직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줘야만 하지 않을까.
...물론 연인들의 안색이 점점 새파랗게 질리거나 훌쩍이는 분위기가 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나중에 달래더라도 내가 책임을 져야한다.
문뜩 알’미라즈가 왜 설명 못하고 도망쳤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건 그녀에게는 큰 부담감이 됐겠지. 하지만 알‘미라즈를 탓 할 수는 없다.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니까.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 이름이 뭐니? 메피스토가 예쁜 이름을 지어줬어?”
“이름? 응! 엄마랑 이모가 지어줬어! 내 이름은──!”
“..응? 다들 분위기가 왜 이래? 왜 우는 거야?”
드르륵.
아이가 제 이름을 소개하려던 찰나, 사르디엘이 뒤늦게 문을 열고 지하기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마치 장례식장이라도 된 것 같은 방안의 분위기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아르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게다가 그건 또 뭐고?”
“그거라니요! 제 아이한테! 아무리 악마의 피가 흐른다지만 함부로 막 부르지 말아주세요!”
전에 느끼지 못한 벅찬 부성애를 느낀 나는 딸아이를 지키듯이 끌어안으며 동시에 사르디엘을 삐죽 흘겨봤다. 어떻게 사람을 보고 그거니 저거니 하는 대명사를 쓴단 말인가.
그런데 내가 화를 내자 사르디엘은 오히려 영문을 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내 딸아이를 가리켰다.
“무슨 소리야? 아이라니?”
“이 아이는 저랑 메피스토의 아이에요. 저도 오늘 알게 되었지만, 제가 메피스토를 임신 시켜서”
“그거, 호문쿨루스잖아? 그것도 빙의용으로 제작된 호문쿨루스.”
“...네?”
“게다가 조종하는 거 딱 봐도 메피스토잖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아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 딸아이가 사실은 호문쿨루스라고?
그 말도 안 되는 괴상한 소리에 연인들의 울음소리가 줄어들고, 모두의 시선이 내 딸아이를 향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의 시선도.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방금 전까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던 내 딸아이가, 갑자기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콧방귀를 끼는 것이 아닌가?!
“이런, 벌써 들켜버렸구나. 오랜만에 장난이 꽤 재밌어서 유쾌해졌는데 말이다.”
“...메...피스토?”
“후후후, 하지만 나쁜 경험은 아니었어, 아르틴이 이렇게 책임감 있는 아빠가 되려고 할 줄이야! 이제 진짜 아이를 만드는 건 어떨까? 나는 언제든지 OK인데!”
“...메피스토?”
동시에 그녀의 품에서 옅게나마 풍겨오는 대악마의 기척. 이곳에는 더 이상 순진무구한 빨간 머리의 여자아이는 없었다.
그 대신, 그 붉은 머리가 다시 칠흑처럼 검게 물들며, 귀엽게 나있던 작은 뿔이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메피스토 그 자체가 된 딸아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니, 딸아이가 아니라 호문쿨루스...?
“헤헤, 며칠 만에 보는 데 마치 몇 년 같네! 아르틴도 나 보고 싶었지?”
“....”
“응? 보고 싶었지? 대답해줘!”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졌다. 궁금한 것도 많았다. 왜 이런 장난을 친 걸까. 어떻게 바이올렛의 도움도 없이 메피스토가 인간계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분노로 머리가 점점 새하얗게 변하자, 그런 궁금증은 머리에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신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리에 가득 찼다.
“메피스토.”
“응! 아르틴, 재밌었지?”
“일단 좀 혼나자.”
“어?”
나는 혹시나 지옥에서 이런 일이 있을까봐 미리 인벤토리에 준비해놨던 회초리를 꺼내들었다.
무려 성목의 가지를 성수에 푹 담궈서 만든 대악마 전용 병기라고 해야 할까.
“지, 진정해 아르틴. 이거 장난이잖아? 응? 솔직히 너도 재밌었잖...”
“종아리 걷어 메피스토!!!”
얼마 후, 지하 기지 안이 메피스토의 흐느끼는 목소리와 회초리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메피스토는 워낙 서럽게 울어댔으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못된 아이 한테는 매가 약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