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 미래 계획은 계획적으로 #04
* * *
마족들에게 ‘도살자’라고 불리던 남자가 있었다.
이전부터 마왕군에 맞서 싸운 것도 모자라, 감히 겁도 없이 마왕의 영토에 홀로 발을 들인 미치광이.
남자가 마왕의 영토 외각에서 하급 마족으로 이루어진 순찰대 100여명을 단번에 도살했다고 들었을 때, 마왕의 간부들은 그런 남자를 비웃었다.
지난 200년 간, 남자와 같은 시도를 했던 영웅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10년에 1명꼴로 하늘이 내려준 재능과, 광기에 가까운 목적을 지닌 이들이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여신에게 선택받은 초대 용사. 당시 인류의 열세였던 대전쟁의 대전투를 몇 번이고 승리로 이끌던 인류의 구원자.
예를 들어, 제국의 천제가 손수 길러냈다고 전해지는 인류의 비밀병기. 나뭇가지 하나만 들고 있어도 군단장을 압도하는 전투의 화신.
예를 들어, 남편을 잃은 천마가 복수심에 길러낸 최악의 제자. 그 성격과 수단이 너무 난폭해 마왕보다 위험하다고 불리던 무술가.
예를 들어, 누구도 정체를 알지 못한 수수께끼의 마법사, 그가 구사한 마법의 대부분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해명되지 못한 시대를 앞서간 천재.
그 중 몇몇은 생명이 살기 힘든 동토의 땅을 넘어 간부들의 영토에 발을 내딛기도 했으며. 그 일부 중의 일부는 간부들을 대면하고도 살아남아 마왕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 중 살아서 인간의 땅으로 돌아간 자는 단 1명도 없었다.
그들은 마왕성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고작해야 간부들과 마족들의 습격을 끊임없이 견뎌내다가 마왕성을 먼발치에서 보면서 쓰러지는 것이 고작.
가끔 간부를 쓰러트리며 분전하는 자가 있었으나, 쓰러진 간부 중에 권속은 없었다.
그저 권능을 하사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군단장이 방심하다 쓰러진 것이 전부였을 뿐, 유의미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그 혼백을 불태우다 꺼져버리는 것이 전부였다.
이번에도 그와 다르지 않다. 아니 그보다 변변찮은 결과나 낼 것이라고 당시의 간부들은 확신했다.
지금 마왕의 땅에 발을 들인 남자는, 앞서 말한 ‘영웅’들에 비하면 한없이 보잘 것 없는 개인에 불과했으니까. 간부들의 영토에 발을 들이기는커녕 동토에서 그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간부들은 남자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들이 그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정확히 반년 후의 일이었다.
**
“그 당시 마왕군은 인류와의 전선을 다섯 곳이나 포기해야 했어. 단 반년 만에 동토에서 떠돌던 하급 마족의 절반 이상이 몰살당해 전선을 감당할 수 없었으니 말이야.”
“3개월이 지났을 때는 간부들의 영토 두 곳이 무너졌지. 아르틴을 포획하기 위해 전력을 투입 했다가 대부분의 부하와 권속이 죽고 그 힘을 잃어서 열락했으니까.”
“마지막 3개월에 있어서는 더 대단했지. 거인들의 왕인 로키와 블랙드래곤 카르지오네를 잃은 마왕군이 모든 간부와 전력을 동원해 아르틴을 추적했어. 그럼에도 아르틴이 마왕성에 도달하는 걸 막을 수가 없었고.”
“마족들은 아르틴을 도살자라고 불렀어. 아르틴이 가는 곳에는 워낙 마족의 피와 살점이 즐비한 탓도 있었지만, 영웅다운 이름을 붙여주기에는 너무 두려운 존재였거든.”
사르디엘의 이야기에 나는 얼굴을 들기 힘들 정도로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 과하게 띄워줘서?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저 당시의 기억이 내게는 딱히 영광스러운 추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무 띄워주지 마세요. 결국 저도 마왕의 육체에는 흠집도 내지 못하고 죽었잖아요. 아직도 그 때만 생각하면 아까워서 죽겠는데.”
“에이,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니까? 그때 천국에서도 다들 얼마나 숨죽이고 지켜본 줄 알아? 정말 예상치 못한 전개라서 대천사들까지 너를 주시할 정도였어.”
그렇게 기대했으면 나한테 용사의 자격을 주던가.
결국 마지막까지 마왕의 육체에 조금도 피해를 주지 못한 나는 독약을 먹고 자살했던 기억뿐이다.
‘어지간히 열 받았었지. 그래서 홧김에 렉스턴의 얼굴을 박살냈었는데.’
이게 몇 년 정도 지난 기억이라면 추억보정이라도 들어갈 텐데, 내게는 아직 반년도 지나지 않은 수치스러운 패배의 기억이다.
가끔도 그 때의 기억을 복기하면 자다가도 이불을 발로 찬다. 차라리 한 번 후퇴해서 재정비 한 후에 카르엔을 데려왔으면 마왕을 죽였을 텐데.
“홀로..그런 싸움을 했던 건가요 아르틴...?”
내 손을 감싸는 따뜻한 온기와 떨리는 목소리, 아그네스의 흔들리는 시선을 나는 애써 모른 척 피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 큰소리 떵떵 치고 갔는데 빈손으로 돌아오기 뭐했거든, 마왕의 목이라도 들고 가야 멋지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지.”
“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신건가요! 그렇게 힘드셨다면 무리하지 말고 바로 돌아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그네스의 울먹이는 목소리에도 나는 차마 변명을 하지 못했다. 사실 그 때 나는 반쯤 미친 선택을 했던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 꼴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계속된 전투 탓에 온몸에 영구적인 부상을 입었던 나는 이미 신체의 절반 이상이 작동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요양을 선택했다면 마왕의 부활을 막지 못했을 테고, 그럼 나랑 아그네스, 그리고 내 친구들은 전부 마왕의 손에 죽는 결말이 확정이다.
그래서 도박수를 던져야 했다. 마왕의 목만 베어낼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이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자, 잘 이해가 안 되네요. 주인님이 그 육체보다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군단장도 아니고 권속인 카르지오네님의 목을 베어내다니요? 게다가 거인의 왕 로키는 권속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강한 무투파 군단장이라고요?”
“저도 시르카의 의견에 동의해요. 도련님과 직접 결투까지 했었지만 그 정도로 강한 건 아니였어요. 차라리 샤오메이나 리처드 황태자가 아득히 강할 텐데요?”
시르카와 시온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나랑 직접 적으로 싸워본 두 사람은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였을까?
“시온하고 싸웠을 때는 아르틴이 진심이 아니었지, 시르카하고 싸울 때는 고작해야 각성도 하지 못한 상태였고, 아르틴은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육체능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그 진면목이 나오는 타입이라고?”
확실히 그 말대로 내 전투법은 기술을 극한까지 닦는 것과는 거리가 멀긴 하다. 나는 샤오메이나 카르엔처럼 천재가 아니니까.
대신 죽어라 노력해서 얻은 힘에 몇 번이고 사경을 넘으며 쌓아온 경험을 더해 싸우는 견고한 타입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면 고작해야 초인의 초입도 아슬아슬한 지금의 육체도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메피스토에게 지혜의 열매를 얻으려고 한 이유도 그런 부족함을 보충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간부가 나타난다면 이번에는 아르틴과 카르엔에게 축복과 지원을 몰아주는 게 최고의 전략일거야. 다른 사람들은 학생만 지켜주면 둘이서도 충분할 걸?”
“아니, 저는 아직 그 정도로 강하진 않다고요? 고작해야 시간을 버는 정도...”
“어머, 전 대천사인 내가 도와줄 텐데 그런 걱정을 해? 부족한 힘은 내가 축복과 법술로 보충해줄 테니까 걱정 하지 말라고!”
제 가슴을 두드리며 본인만 믿으라고 소리치는 사르디엘.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믿어도 될지 걱정부터 들기 시작했다.
“그럼 저희는...”
“우리 주인공들이 간부를 상대하는 동안 시간을 벌어 줘야지. 다들 그 정도는 준비했잖아? 안 그래?”
설마 그 정도도 하지 못하냐는 뉘앙스에 가까운 도발에 몇몇 여인들이 발끈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말한 대로 왕국의 늑대 가죽 전사단이 이번 실습에 참가할 거야. 대부분의 전사가 마왕군과 5년 이상 싸운 경험이 있는 강군인데다가 내 동생 오지에가 직접 이끌 테니 짐은 되지 않을 거고.”
그 도발에 먼저 반응해 나선 것은 마리안느 누님이었다.
“게다가 내가 직접 아르틴의 옆에서 싸움을 도울 테니까 가장 큰 전력이 될 것은 안 봐도 뻔하지. 안 그래?”
“확실히 누님이 곁에서 싸워주면 든든할 것 같네요. 저랑 파트너만으로는 아직 불안한 면이 있으니까요.”
왕국 최강의 여전사인 마리안느 누님과 누님만큼은 아니어도 강한 전사인 오지에 왕자가 전사단을 이끌고 참전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한 일.
내 신뢰의 눈길을 느낀 마리안느 누님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승리자의 아우라를 풍겼다.
“저희 제국에서도 황실의 친위 기사단이 직접 참가할 거예요. 아시죠? 친위 기사단은 대전투에 참여하는 최정예 기사단과 비슷한 수준의 강자들로만 이루어진 기사단이란 걸? 물론 저도 황실 시녀대를 이끌고 세니아 선생님을 호위할 거고요.”
“오, 정말로 친위 기사단을 보내준다고? 그 짠돌이 황제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현재 제국은 2명의 지배자가 공동 통치를 하고 있다.
제국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철혈의 황제, 아그네스의 아버지인 ‘황제’ 에드워드 에르멘가르트.
그리고 제국의 살아있는 신이라 불리며 마왕과 대적중인 초대황제인 ‘천제’ 알프레드 에르멘가르트.
자세한 사정은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제국의 무력 대부분은 천제의 휘하로 흘러들어가 마왕군의 전선에 투입된다.
하지만 그 중 일부는 황실로 돌아와 황실을 지키는 검이자 방패가 되는 데, 친위 기사단은 그런 제국의 기사들 중에서도 최정예들만 모은 엘리트 기사들이다.
아마 나와 카르엔이 없어도 친위 기사단만 있다면 군단장 정도는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황실의 여인들을 모시기 위해 엄선된 여기사들만 모인 시녀대도 그런 친위 기사단에 꿇리지 않는 전력이다. 오히려 과하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오랜만에 오라버니랑 아버지에게 애교를 부렸죠. 천제님에게 직접 편지도 보내야 했답니다.”
“아그네스가 엄청 노력해줬네, 정말 고마워 아그네스.”
“뭘요, 아르틴은 제 약혼자이자 남편이 될 사람이잖아요?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랍니다.”
겸손한 말과 다르게, 아그네스는 마주 잡던 내 손에 깍지를 끼며 보란 듯이 과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정실의 품격을 내보이는 그 모습에 방금까지 기세등등하던 마리안느 누님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둘이 사이좋은 거 아니였나?
“...”
“성녀는? 저번에 교황 직할 성기사단을 데리고 온다고 하지 않았나?”
“네, 성기사단과 사제단은 이번 실습에 참가할 거예요. 참가할 테지만...”
“음? 그런 것 치고는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만, 무슨 일 있나?”
천마의 물음에, 성녀가 한숨을 내쉬더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저 당연한 도움 이상의 것을 아르틴에게 해주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랍니다. 이런 당연한 일을 자랑하는 것도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니잖아요?”
“...뭐?”
“그렇잖아요. 이미 지난 회의에 결정된 사안을 마치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조금 추잡하다고 해야 할까...품위가 떨어지는 모습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묘하게 비릿하게 웃는 올가.
올가의 비꼬기에 욱하는 성질이 있는 마리안느 누님은 물론이고 늘 차분한 것으로 유명했던 아그네스까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올가를 노려봤다.
올가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는 탓에, 무시무시한 기 싸움이 시작된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아, 도망치고 싶다.’
갑자기 위가 아파졌다.
홀로 마왕성으로 향할 때 보다 지금 상황이 두려운 거 같은 건 내 착각일까.
‘여기다가 카르엔이 하렘에 참가했다는 말을 하면 내 사지가 찢겨나가지 않을까...’
어쩌면, 마왕군 간부랑 싸우는 게 내 하렘을 달래는 것 보다 더 쉬울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이것도 업보라면 업보겠지. 달게 받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