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243화 (243/266)

〈 243화 〉 미래 계획은 계획적으로 #05

* * *

“짜증나. 그 망할 년들.”

아카데미의 북부교회 예배당,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올가는 미간을 찡그리며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참가했던 회의는 저녁이 되기 전에 끝났다. 사실상 해야 할 조치들은 이미 저번 회의에서 이미 논의되고 준비가 끝난 탓이다.

그렇다고 아르틴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뒤늦게 돌아온 그 가슴 큰 엘프 여선생을 포함한 선생들을 데리고 용사와 함께 개인전투 준비를 한다고 했던가.

올가 자신도 아르틴의 수련을 돕겠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고작 수련의 기력회복에 성녀의 기적이나 되는 것은 필요 없다며 등 떠밀리다시피 내쫓긴 참이었다.

“마리안느 그 여자, 뒤늦게 아르틴의 밑에 깔려서 앙앙거린 주제에 누님거리면서 견제나 하고...!”

올가는 아르틴의 하렘에 속한 여인들을 대부분 싫어했다.

싫어할 이유도 명확하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다 가진 주제에 투정부리는 바이올렛.

아무도 없을 때 가장 먼저 아르틴을 채간 아그네스.

늘 생각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생각이 짧고 멍청한 샤오메이.

처녀에 미친 유니콘이나 악마 사역마, 마왕의 부하나 창부 기사는 더 할 말도 없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어떻게 단 한명도 없을까 싶지만 정말로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 전에 하렘에 참가한 마리안느 왕녀도 마찬가지다. 스승이자 친한 누나라는 포지션을 이용해 아르틴의 곁에 맴돌며 자신과 아그네스에게 추한 경쟁심을 뽐내는 꼴이라니.

이번에 올가를 돌려보낼 때 말을 보탠 것도 그녀였기에 짜증은 배가 되었다.

과거 아르틴과 연애감정이 없던 마리안느랑은 썩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마리안느에 대한 욕을 곱씹으며 올가는 서랍 안의 술병을 꺼내들었다.

“...”

동시에 시선이 술병 옆에 놓인 작은 병으로 향했다. 저 약을 술에 조금 타서 마시는 것만으로도 지금 느끼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야...내일 마왕군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괜히 약에 취했다가 일을 그르치면 큰일이야.’

약에 대한 중독성을 떨쳐낸 순간, 올가는 서랍을 닫고 순수한 고급 포도주를 잔에 담아 홀짝였다.

북부교단의 수도원 중 한 곳에서 생산된 이 포도주는 그저 입에 머금기만 해도 향긋하면서도 부드러운 신맛이 감돌아 올가의 기분을 한껏 나아지게 만들었다.

도수가 꽤 높기는 했지만 약을 타지 않아 버틸 만 했고, 몇 차례 홀짝인 올가는 조금 짜증이 풀린 얼굴로 의자에 눕듯이 몸을 기대며 노곤함을 즐겼다.

‘이 정도면 충분해. 오늘도 약은 안 할 수 있을 것 같아.’

최근 올가는 약물에 대한 중독성을 이겨내고 있었다. 아르틴과 사랑으로 이어진 후로 약물에 대한 집착이 낮아진 덕이었다.

그것은 아마 사랑의 힘일 것이다. 사랑.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가치이자 덕목이여.

늘 마음에도 없던 여신의 사랑을 입에 담던 올가지만, 요즘은 그 말이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느낄 수 있었다. 전부 아르틴의 덕이었다.

행복하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이 든다.

‘서방님의 일부가 아니라, 그의 전부를 내가 독점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생각을 하는 동시에 올가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비웃었다. 독점이라니, 꿈도 크지.

그렇게 생각하니 올가는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지옥의 대악마에게 더럽혀지는 것도, 다른 여인들이 물고 빠는 것도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그네스랑 마리안느, 그 두 여자만 제칠 수 있다면 하렘의 주도권은 확실히 내가 잡을 수 있을 텐데...’

처음에는 하렘을 붕괴시키거나 조각내는 것도 생각했지만, 요즘 들어 부쩍 행복한 아르틴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올가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하렘의 주도권을 자신이 잡자고 생각했지만, 그것조차 저 두 사람 탓에 여의치 않았다.

‘뭐, 의붓누나? 누님? 서방님이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그 빈틈을 파고 들어서 큰 소리 치기는, 그래봐야 남이면서.’

마리안느의 전략은 그녀가 보기에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지능적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제 스승에 대해 깍듯하고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아르틴의 약점을 하나하나 노려 아르틴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전략.

워낙 마음이 착하며 여린 면이 있는 서방님이 그런 유혹을 견딜 수 있을 리 없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몽마나 다름없는 방식이다.

하지만 올가가 생각하기에 가장 위험한 적수는 마리안느가 아니었다.

아그네스 에르멘가르트, 그 얌전한 고양이인척 하며 부뚜막에 가장 먼저 올라간 여자야 말로 하렘 장악 계획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빈틈이 안 보여. 안정적인 수만을 고집하니까 파고들 틈이 없어.’

처음으로 사귄 연인, 첫 경험을 나눈 여자. 약혼자. 현 하렘의 정실.

얄팍하게 기믹으로 아르틴의 곁에 어슬렁거리는 마리안느랑은 달랐다. 아그네스가 쟁취한 타이틀은 하나같이 그의 연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들뿐이었다.

‘존재감도 약하고, 매번 뒤에서 예스나 외치면서 아르틴의 비위나 맞추는 주제에...!!’

말은 이렇게 했지만, 올가는 사실 아그네스를 볼 때 마다 위기감을 느꼈다. 3회차 시절 아르틴이 했던 말 떄문이다.

­“내 이상형? 아예 백발이거나...아니면 아예 흑발이 좋아. 다정하고, 상냥하고, 로맨틱한 것을 좋아하는 여자면 좋겠고. 눈도 붉은 색이면 좋겠어. 응, 너처럼 아름다운 붉은 색 말이야.”­

처음 저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칠흑 같은 흑발에 붉은 눈. 다정하고 상냥하며 로맨틱 한 것을 좋아하는 여자. 바로 자신이 아닌가!

...적어도 올가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기에 한 때 자신의 가장 강력한 연적이었던 바이올렛을 볼 때도 묘한 승리감을 느끼고는 했었다.

머리색이 분홍색과 보라색을 오락가락하는 바이올렛은, 아르틴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여자니까. 그 옆자리는 자신이 분명 쟁취할 수 있으리라.

아니었다. 그 자리를 차지한 여인은 바로 아그네스였다. 눈처럼 반짝이는 하얀 머리에 붉은 눈동자. 제 나이를 모르고 여전히 로맨스 소설을 동경하는 푼수 같은 여인.

마치 자를 대고 그린 것 같은 아르틴의 이상형에 가까운 모습에, 올가는 아그네스를 보며 이유 모를 패배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외모로 동점이라면 다른 곳에서 점수를 벌어야해. 그리고 이번 마왕군의 습격은 점수를 딸 가장 좋은 기회야.’

그래서 올가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패를 꺼내들었다. 교황을 타박해 북부교단 최강의 전력인 교황질항 성기사단과 사제단을 파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습격에서 중요한 것은 공세가 아닌 수호와 호위.

얼마나 많은 학생들을 지키나, 그리고 그 가슴 큰 엘프 여선생을 누가 구하냐에 따라서 아르틴의 칭찬과 보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임무는 전사단과 기사들보다 성기사와 사제들의 주특기. 질 가능성은 현저히 적었다.

무엇보다 아르틴이 격한 전투로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를 간호하는 것은 자신의 몫. 그리고 맞닿는 시선과 마주잡는 손. 오붓한 시간.

‘놓칠 수 없어. 아르틴과의 행복한 시간은...! 전부 내 꺼야...!’

실패는 없을 것이다. 그 어벙한 아그네스나 한창 훈련 코치에 바쁠 마리안느가 이런 부분까지 신경 쓰지는 못 하리라.

오붓한 아르틴과의 데이트를 상상하자,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식히 억누르며 올가는 미리 축배를 들며 포도주를 홀짝였다.

어느새 신 맛도 느껴지지 않는 포도주가 너무 달고 맛있게 느껴져, 올가는 한 병을 다 비울 때 까지 멈추지 않고 술을 홀짝였다.

이른 축배였다.

*

“기억해두세요, 내일 있을 마족과의 전투에서 시녀대와 황실 친위대가 최고의 공을 세워야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그네스를 모셔온 황실 시녀대의 부대장. 여기사 주느비에브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아그네스 황녀님. 너무 부담감이 크신 것 같습니다. 조금 마음을 편히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다른 학생들 앞에서는 차갑고 도도하며 똑 부러지는 여인을 연기하는 아그네스지만, 오랜 시간 그녀를 모셔온 주느비에브는 알고 있다.

아그네스가 사실은 평범한 다른 여자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는, 낭만적인 것을 좋아하는 순수한 소녀에 가깝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 아그네스의 모습은 평소의 그 상냥하고 여린 아그네스랑은 거리가 멀었다. 세간에 알려진 차가운 부학생회장 아그네스가 오히려 어울리는 모습이 아닌가.

“애초에 마족이 습격한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지 않나요? 저희 시녀단의 조사 결과, 지난 수십 년간 첫 번째 던전이 마족에게 습격을 당한 일은 없었습니다.”

사실 이번 던전 실습은 정상적으로 생각한다면 시녀단은 몰라도 황실친위대는 파견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쉬운 일정이다.

고작해야 고블린 무리, 고작해야 오크 두 세명. 가끔 아주 둔한 골렘이나 등장하는 허접하기 짝이 없는 던전.

이런 던전에서도 다치는 학생들은 나오긴 했지만 목숨을 잃는 일은 없던 것이다.

“정말 만약에, 황녀님과 약혼자이신 아르틴 루드비하가 말한 대로 군단장이 출현한다고 해도...준비된 저희 전력을 생각한다면 자살시도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마족의 입장에서 말이지만요.”

무려 3곳의 세력에서 정예 병사들을 보낸다. 그것도 모자라 살아있는 전설인 천마가 대동한다. 그 사실 만으로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주느비에브는 확신하고 있었다.

아마 약혼자인 아르틴님이 장미관에서 겪을 일 때문에 과민반응을 하는 게 아닐까.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황녀님. 기왕 이렇게 된 거 약혼자인 아르틴님과 가볍게 나들이를 간다는 느낌으로 즐기시는 게 좋지 않으실까요.”

“주느비에브, 저는 지금 위험을 운운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네? 그러면 뭐 때문에 그리 다급하신 건가요?”

주느비에브가 이해하지 못하고 묻자, 아그네스는 제 책상에서 소설하나를 꺼내 보였다.

“‘장미정원 아래에 요정이 산다’라는 소설을 보신 적 있나요? 이 책에는 평민 여자아이를 연적으로 두고도 방심하다가 제 약혼자를 뺏기는 귀족 영애가 등장한답니다.”

“예? 약혼자를 뺏긴 다고요?”

“오만한 탓이었죠. 어릴 때부터 남주를 좋아했고, 또 약혼까지 했으니 당연히 자신을 선택해줄 거라고 믿은 탓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귀족영애는, 결국 남주에게 버림받아 약혼까지 파혼 당한답니다.”

어린 아그네스는 이 소설을 보며 한 때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약혼이라는 것은 귀족 가문에 있어서 중대사 중 하나인데, 그런 것을 평민과의 사랑을 이유로 파기하는 것이 현실에서 허락될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어릴 적 아그네스가 했던 생각을 지금은 주느비에브가 하고 있을 것이다.

당장 어떻게 말 하면 제 주인이 정신을 차리고 원래대로 돌아올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확실하다.

“주느비에브, 제가 설마 소설과 현실도 구분하지 못해서 여러분을 닦달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아니었나요?”

“중요한 것은 오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확실히 붙잡기 전 까지는, 이 손에 잡히기 전 까지는 확실한 것은 결코 없어요.”

허공을 주시하는 아그네스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지금 정실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르틴의 곁에서 행복을 만끽하다. 어느새 하렘의 정실 자리를 뺏기고 마는 끔찍한 그림이 말이다.

“저는 아르틴의 약혼녀에요 주느비에브. 저는 꼭 앉아있고 싶은 자리지만, 사실 누구나 들어와도 될 수 있는 자리고, 저는 이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무려 지옥을 좌지우지하는 대악마, 이 세상의 모든 신도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성녀, 자신보다 월등하게 강하면서도 장점이 겹치는 마리안느 언니까지.

아르틴을 위해 목숨을 포기하고 내세를 꿈꿨던 유니코르나 아르틴이 직접 구해준 바이올렛은 또 어떤가.

그녀가 생각하기에 만만한 상대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특히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은 바로 샤오메이였다.

아르틴의 가족 보다 더 가족 같은 그 아이는 아르틴의 첫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이다.

“우승자는 왕관을 지켜내야 해요. 그 왕관의 무게를 버틸 수 있는 자만이, 가장 많은 영광과 보상을 쟁취하는 법이에요.”

그러니, 이번에 압도적인 공을 세운다. 세니아 선생님을 구하고 학생들을 지켜내, 할 수 있다면 군단장의 목까지 베어 이 정실의 자리를 지켜내고 마리라.

“그러니까 주느비에브, 황실친위대와 시녀단에게 전달해주세요. 내일 있을 전투에서는 목숨을 다해 지키고 최선을 다해 맞서 싸우라고. 제가 직접 여러분과 함께 할 거라고.”

뺏길 수 없다. 아르틴의 가장 가까운 옆자리를 누구에게도 내어 줄 수는 없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아그네스는 뭐든 해내리라.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주느비에브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틴, 그 남자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길래...우리 황녀님이 이토록 깊이 반한 걸까?’

동시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서류로만 봤을 때는 특별한 구석도 별로 없는 그 남자가, 어떻게 황녀님의 마음을 이토록 깊이 사로 잡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

“에취!”

“왜 그래 아르틴, 감기라도 걸린 거야? 유니코르 불러 올까?”

“아, 별거 아니야 누님. 그냥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서...”

어디서 제 이야기라도 하는 걸까

연신 재채기를 해댄 아르틴은 간신히 진정하고 자신의 스승을 자처하는 세 사람을 바라봤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