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화 〉 미래 계획은 계획적으로 #06
* * *
낮의 회의가 끝났으니 아르틴에게는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셈이다.
걱정과는 다르게 지난번처럼 누가 뺨을 맞거나 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사사로운 기싸움 정도로 회의를 끝낼 수 있었으니 아르틴에게 있어서는 요행과도 같은 일. 특히나 메피스토가 감당하기 힘든 장난을 치고 난 후라서 더더욱 안도할 일이다.
뒤늦게 다시 얼굴을 비춘 알‘미라즈가 얼마나 고개를 연신 숙여대며 메피스토를 데려갔던가,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을법한 상황이었다.
‘그럼, 이 다음은 어떻게 한담...’
그러나 아직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각자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스승을 자처하는 세 여인을 보며, 아르틴은 아무도 모르도록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그러니까...아르틴이 여자가 5명이나 된다고...? 그런데 내가 죽을 수도 있다니...? 게다가 회귀라니...?”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할 것은 세니아 선생님이었다.
요 며칠 바쁜 일정을 끝내고 뒤늦게 회의에 합류한 그녀는 연이어서 듣게 된 상식을 초월한 이야기에 정신이 반쯤 나간상태.
“선생님, 제 연인은 5명이 아닙니다.”
“그, 그렇지? 선생님이 잘못 들은 거지? 헤헤, 우리 아르틴은 그렇게 문란한...”
“한 자릿수가 아니라 10명이 넘습니다. 선생님까지 11명이에요.”
그나마 안색이 돌아왔던 세니아 선생님의 안색이 다시 새하얗게 핏기가 가셨다. 원체 피부가 하얀 탓에 티가 안 나는 것은 다행일까.
‘사실 카르엔까지 더하면 12명이긴 한데...’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세니아 선생님과 뭐라고 말은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는 마리안느 누님을 보고 있으니 아르틴은 옆에 앉아있는 카르엔이 신경 쓰였다.
평상시 자신을 스토킹하던 카이엔 시절의 그녀라면, 여인들에게 보란 듯이 과시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하지만 카르엔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여성이 되고나서 묘하게 수다스럽게 변한 성격을 감안한다면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혹시 어디 아픈 건가 싶어 신경 쓰면 눈을 마주칠 때 마다 다른 사람 몰래 윙크를 해오는 모습을 볼 때면 그 의아함은 배가 되었다. 허나 깊이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솔직히...선생님이 받아들이기는 하나 같이 어려운 이야기야. 정말로...이게 정말로 다 사실이니?”
“이런 대답을 해야 되는 것이 죄송하지만...네, 전부 사실이에요.”
“세상에...세상에...”
세니아 리브스는 가벼운 현기증이 온 듯 머리를 잡고 몸을 의자에 기댔다.
어떤 것이 가장 충격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뿐이다.
하지만 천마의 진지한 표정이, 그리고 마리안느의 결연한 표정이 지금 이 상황이 질 나쁜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애초에 아르틴이 이런 나쁜 장난을 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면 세니아는 교사가 아니라 성녀일 터.
결국 다른 여인들과 아르틴은 세니아를 배려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생각을 받아들일 시간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정말 힘들었겠네. 지금은 좀 괜찮니 아르틴?”
...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세니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르틴의 예상을 빗나가는 말이었다.
“몇 번이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마왕과 맞서 싸운 거잖니? 그런 것을 겪고도 멀쩡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니. 선생님은 손가락만 베여도 그렇게 아픈데...”
아르틴은 여성의 문제로 가장 먼저 혼나고 시작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야기를 겨우 납득한 세니아 선생님은 가장 먼저 제자의 손을 꼭 붙잡고 그 상처를 보듬기 시작했다.
“아팠을거야. 아르틴 너는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해도, 마음이 무척 아파서 죽어갔을 지도 모르는 힘든 경험이잖니. 선생님은 아르틴이 그런 경험을 겪고도 올바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너무 기뻐.”
“서, 선생님...”
“몇 번이나 선생님을 지켜주려고 했던 거지? 선생님은 너무 기뻐. 그렇게 짧은 시간밖에 같이 지내지 못한 선생님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노력해주는 아르틴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기뻐.”
다른 여인들에게 아르틴은 용사나 다름없다. 현재 하렘에 속한 이들 중 어떤 형태로든 아르틴에게 구원받지 않은 여인은 없다.
세니아 리브스도 다르지 않다. 그녀가 이번 회차에 아르틴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장미관의 사건. 그 경험은 아르틴이 그녀의 무의식 안에 백마 탄 기사로 자리 잡도록 만든 강렬한 경험이다.
그렇지만 세니아는 아르틴에게 기대지 않았다. 대신 아르틴의 스승이자 연인으로서 아르틴이 겪었을 고통과 슬픔을 이해하려고 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그 마음을 억누르며 아르틴을 포근히 달래주었다.
“그러니까 너무 부담감 가지지 않아도 돼. 선생님은 아르틴의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감동했으니까! 알겠지? 선생님은 아르틴의 짐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처음 이야기를 듣던 세니아는 눈치 챘다. 아르틴이 몇 번이나 자신을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목소리가 떨리던 것을.
세니아는 이것이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본래라면 자신이 지켜줘야 할 학생이, 스승을 지키지 못했다고 죄책감을 가지다니.
다르다. 아니, 틀리다. 이 상황은 옳지 않다. 고작해야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못한 아이들인데, 이런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너 혼자 고민하지 않아도 돼. 아르틴, 네 곁에는 친구들도 동료들도, 하다못해 믿음직한 스승님들도 이렇게 많잖니?”
“그러니까, 앞으로는 전부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우리에게 기대기도 하자. 선생님하고 약속?”
세니아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르틴을 안아 토닥였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아르틴은 불현 듯 자신이 바이올렛에게 무시당해 죽고 싶다고 외치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선생님은 이렇게 자신을 안아 토닥여주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었다.
“...네, 약속할게요 선생님.”
그때는 반쯤 장난스럽게 걸었던 새끼손가락을, 이제는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꼬옥 걸었다. 약간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아르틴의 모습을 본 세니아는 그제서야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분명 늘 어른스러운 모습만을 보여준 아르틴이었지만, 세니아는 이런 모습이야 말로 아르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묘한 가시감이 아른 거린 탓일지도.
어쩌면, 자신이 알고 있던 아르틴은 이런 모습이 먼저였을지도 모른다.
*
결국 눈물을 몇 방울 찔끔 흘리고 나서야 아르틴은 세니아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것을 고깝게 보는 여인은 없었다. 다들 아르틴이 어떤 힘든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기에 그 상처를 보듬는 것마저 질투하진 않았으니까.
“크흠...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너무 힘들면 포기해도 좋아. 대신 선생님하고 즐겁게 연구하면서 지내는 것도 좋은 학창생활이 되지 않겠니?”
“...그거, 대학원생이 되라는 말 아닌가요? 저는 공부에는 관심이 없어서 사양하겠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시험을 잘 치면서 공부에 관심이 없다니! 그냥 안 해봐서 그러는 거야! 해보면 엄청 재밌다니까?”
세니아의 집요한 권유에 아르틴은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달래주기 위한 농담치고는 재미없는 농담이라서 더더욱 그 진의가 깊게 느껴졌다.
“하하하, 괜찮아요. 이제 진정했으니까 마왕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 갈까요?”
“...정말 재밌는데...”
아니, 농담이 아닌가?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세니아를 보며 아르틴은 묘한 소름이 돋았다.
“그래, 그 대학원 이야기는 그만 하고 당장 내일 군단장을 어떻게 상대할지 고민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아르틴 네가 과거에 아무리 강했다고 해도 그건 과거의 너니까 말이다.”
세니아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진정한 듯 하자, 천마는 그제서야 자신들이 이곳에 모인 용건을 꺼내기로 했다.
바로 내일 있을지도 모르는 군단장과의 싸움에 대비해 아르틴을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아직도 아르틴 네가 과거에 그렇게 강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는 구나, 내 기습도 카이엔과 힘을 합쳐서 간신히 막아내던 녀석이...”
“지금이랑 과거의 아르틴을 비교하면 이상하지. 애초에 천마 당신이 날리는 기습을 막아낼 수 있는 1학년이 세상에 쟤네 말고 있을 거 같아?”
마리안느는 천마와는 다르게 4회차의 아르틴을 알고 있다. 아니, 연인인 아그네스보다도 아르틴의 ‘강함’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 당시의 아르틴의 강함을 한계까지 다듬으며 조율하고, 직접 대련까지 해가며 실전 경험까지 쌓을 수 있게 도와줬던 사람은 마리안느였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알던 아르틴도 군단장의 목을 서걱서걱 벨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어. 그럼에도 그럴 수 있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사르디엘의 발언에도 유일하게 동요하지 않았던 마리안느인데, 그녀가 동요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가 알고 있던 아르틴의 장점이 그 강함을 납득시켰기 때문이다.
“아르틴은 4회차 당시 단 2년 만에 나를 힘으로 찍어 누를 정도로 강해졌어. 남부교단의 신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축복을 받은 걸 고려해도 말도 안 되는 속도라고.”
“그건 그냥 네가 수련을 게을리 한 것 아니냐?”
“아니, 그 때에 나는 아르틴의 수련을 보조한다고 나도 벅찰 정도로 하드 트레이닝을 했었거든. 그때가 가장 강했으면 강했지 약해지진 않았던 때라고.”
기이할 정도의 노력과 정신력, 평상시에는 맹한 구석이 있는 주제에. 제 자신을 갉아먹으며 노력하는 것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런 혹독한 수련에 무너질 테지만, 아르틴은 그것을 본인이 만든 엘릭서와 신들의 축복, 마녀의 약초 따위로 보완해 무너지지 않고 견뎌냈다.
“당신도 알잖아. 우리 아르틴이 훈련에 있어서는 얼마나 독종인지. 가끔 그냥 죽으라고 시킨 훈련도 이 악물고 견뎌내는 노력가라니까?”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누님?”
“확실히 아르틴이 근성은 꽤 있긴 하지만...마왕군의 간부는 근성과 노력만으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잖느냐,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이고.”
“아니 지금 뭐라고...”
“그건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우리가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 그만이잖아?”
사실 마리안느가 생각하기에 아르틴의 강점은 단순한 노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강점은 말로 해서는 알기 힘들고 체감해야 알 수 있는 부류이다.
그러니, 그녀들은 강점을 갈고 닦는 것이 아닌 아르틴의 가장 큰 약점을 오늘 밤새 보완해주기로 마음먹고 모였다.
“...부족하다고 표현하니까 조금 기분이 이상한데, 저 정도면 충분히 꽉 찬 육각형 아니에요?”
아르틴은 그녀들의 대화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표했다. 누구나 약점은 있다지만 자신 정도면 다재다능, 팔방미인이라는 말이 제격인 남자가 아닌가?
실제로 4회차 때 아르틴이 목표로 하던 강함은 천마나 마리안느처럼 한 분야에 최강이 아닌, 모든 분야에 있어서 천재적인 재능을 뽐내던 황태자나 카르엔의 강함이기도 했다.
그것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 검술과 마법, 신성력을 다루는 법술까지 모든 장기를 한계까지 가다듬기도 했다.
그것으로 마왕의 군단장이나 권속의 목까지 베기도 했으니, 부족하다는 것은 좀 표현이 아상하지 않은가? 아직 신체능력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맞상대는 가능할 정도로 단련했다.
“확실히 아르틴 너는 센스도 좋고 재능도 있어. 특히 자신의 강함을 낭비하지 않고 잘 싸운다고 해야 할까? 그쪽에 있어서는 독보적이라고 봐도 좋지.”
“단순한 무인이 아니라 할 줄 아는 것이 많은 것도 좋다. 같은 수준의 강자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대응능력이 좋아서 상대하는 쪽이 골치가 아플 정도지.”
“거봐요, 그럼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게 없잖아요. 두 사람이 생각하는 제 약점이 뭔데요?”
도대체 문제가 뭐냐는 아르틴의 질문에, 두 여인은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기술이 깊이가 부족하지, 그렇지 않느냐?”
“깊이가 부족하다기 보다는...얕다고 해야 하나?”
“...제 기술이 깊이가 부족하다고요?”
그런 그녀들의 대답은, 아르틴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자신이 마리안느 누님이나 샤오메이처럼 한 분야에 있어서 정점을 찍는 타입은 아니긴 하지만, 부족하다 못해 얕다고 표현 하다니.
“제 기술이 도대체 어디가 부족한 거죠? 실전에서 썼을 때 부족하다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요.”
당장 시온과의 결투 때만 해도 부족한 신체능력을 3주 밖에 배우지 않은 무술과 마법 능력으로 찍어 눌렀을 정도로 제 전투방식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아르틴이였다.
허나 아르틴의 질문에 마리안느랑 천마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아르틴을 바라봤다.
“마법을 쓰지 않고 단순히 보법의 깊이만으로 강을 달리고 바다를 건널 수 있느냐?”
“...네? 그걸 어떻게 해요? 제가 나가도 아니고.”
“아니면 검을 휘둘러서 앞에 있는 사과를 베지 않고 뒤에 있는 벽을 벨 수 있어?”
“그건 마법을 쓰면 가능은 할 것 같은데...아니, 그건 기술이 아니라 묘기에 가깝잖아요. 그런게 기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아르틴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두 사람의 시선이 옆에 앉아있던 카르엔을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 아르틴의 시선이 카르엔을 향했다. 그런데 아르틴의 시선을 받은 카르엔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카르엔, 너?”
“나, 나는 여태 아르틴도 당연히 할 수 있는 줄 알고 있었지...개, 괜찮아! 아르틴의 말대로 묘기에 가까운 기술이잖아. 그렇지?”
그 순간 아르틴은 깨달았다. 외눈박이만 있는 곳에서 눈이 두 개인 사람은 비정상이라는 사실을.
억지로 만든 자신의 재능과는 다르게, 이 세 사람의 재능은 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개 억울하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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