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화 〉 바다의 밤은 뜨겁고 거칠다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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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미카엘호의 선장 더글라스 산타나는 무려 40년이 넘는 세월을 바다 위에서 보내온 노려한 뱃사람이었다.
이번에 그가 맡은 임무는 제국의 기사단과 중요 인사들을 육지까지 안전하게 호송할 것.
무려 2개의 기사단과 그들의 책임자로써, 아카데미의 부학생회장이나 제국의 황녀인 아그네스가 이 배에 탑승해 있기에 세인트 미카엘호의 선원들은 무척이나 긴장한 상태였다.
선장인 더글라스 산타나가 항해보고를 하러 VIP룸을 직접 찾아온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일등 항해사와 갑판장이 하필 제국인이라, 공화 연방 출신인 선장 본인에게 이번 한번만 일을 대신하며 사정사정하며 부탁하는 것이 아닌가.
이해는 한다. VIP룸에 있을 제국인 중에 높으신 사람이 나는 사람이 드물터, 그런 자리에서 긴장으로 실수라도 한다면 본토에 있을 가족들이 무슨 일을 겪을지 두려운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 귀족이 있을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뱃사람은 미신과 징크스에 민감한 법인지라 그런 위험은 사전에 멀리하고 싶은 법이니까.
하지만 지금, 더글라스 선장은 차라리 부하 녀석들을 두들겨 패서라도 직접 오지 않았어야 했다고 깊은 후회감에 빠져 있었다.
“황녀님, 괜찮으세요?”
“...하아.”
“기, 기운을 차려보세요 황녀님...지금 선장님도 와계시니 체통을 지키셔야죠!”
호위대장인 노먼의 외침에도 탁자에 늘어진 아그네스가 기운을 차릴 기미는 보이지 않자. 보고를 위해 서있던 더글라스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지? 이건...육지 사람들이 뱃사람들을 기죽이는 새로운 방법인가?’
본래 육지 사람들은 배라는 작은 세계로 바다와 맞서 싸우는 뱃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더글라스가 한창 이등항해사로 배에 탔을 때는 귀족들의 갑질에 얼마나 많이 시달렸는가.
그런 괴롭힘 중에서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바로 하염없이 앞에 세워두고 기다리게 만들던 갑질이었다. 1시간이 넘도록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현장 체질인 뱃사람들의 인내심을 괴롭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벌어진 일은 단순히 뱃사람을 골탕 먹이는 육지 사람의 갑질이라고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일단 황녀라 불린 학생 아가씨의 양 옆으로 서있는 기사들의 곤란한 표정만 봐도 그 분위기가 이해됐기 때문이다.
“체통...그래요, 체통. 저라도 체통을 지켜야죠,. 그렇죠? 아르틴의 체면은 땅에 떨어졌으니까요.”
“그,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그네스 황녀님..!”
더글라스 선장의 추측은 실제로 사실이었는데, 아르틴이 만인의 앞에서 유니코르를 올라탄 채로 행진하는 기괴한 모습을 보인 후로 아그네스는 쭉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일부 사람들은 그 여자아이가 유니코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모습을 목격한 모두가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아니다.
즉, 아르틴의 현재 이미지는 수직으로 하강하고 있다는 이야기.
호사가들의 입방아가 끊이지 않았을 지금이라면 학생들 사이에서 어떤 소문이 돌고 있을지 아그네스 스스로도 알기 힘들었다.
“애초에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습니다. 그런 근본도 없는 왕국의 하급 귀족이 감히 황녀님의 약혼자라니요!”
“라크 경, 말조심하세요. 아그네스 황녀님의 약혼자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입니까!”
“노먼 대장님, 이건 약혼자라고 해서 편을 들 일이 아닙니다! 황실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진 일 아닙니까!”
‘젠장, 내가 여기를 왜 와서...’
이제는 황녀를 앞에 두고 기사들끼리 말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자, 더글라스 선장은 있어선 안 될 자리에 온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를 살펴야 했다.
“...좋아, 결정했어요.”
그때, 이 난장판에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아그네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네? 그게 무슨...?”
“혼자 고민해서는 아무런 답도 나오지 않아요! 누구보다 아르틴에 대해 잘 아는 사람과 대화해보려고요!”
“네? 황녀님? 갑자기 어딜 가시는 건가요 황녀님?!”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그네스가 방을 박차고 나섰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기사들과 시녀들, 선장을 뒤로 한 채 아그네스는 각 배에 연결된 포탈 마법진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그래서 찾아온 게 나라고? 왜?”
“당신이 제가 아는 사람 중 아르틴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니까요.”
그런 아그네스가 제 방문을 노크도 없이 열고 들어오자, 조르바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르틴과는 다른 형태긴 하지만, 제 나름의 하렘을 가진 조르바로서는 이번 던전 실습이 고요함을 즐길 몇 안 되는 기회.
물론 곧 있으면 마왕군이 습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세니아 선생님과 함께 천마에게 보호를 받기로 정해져 있었기에 반쯤은 휴가를 온 기분으로 쉬고 있던 차였다.
“학생회의 도도한 얼음황녀라는 별명까지 있으신 분이, 이렇게 외간 남자의 방에 마음대로 들어와도 괜찮은 건가?”
“저는 저보다 약한 남자에게 정조의 위험을 받는 경험은 한 적이 없답니다. 조르바 펠카스. 당신이 그런 남자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그냥 후자만 말해도 깔끔하지 않았겠어? 아무튼 자리에 앉아.”
그제서야 허둥지둥 방에 쳐들어온 자신의 몸가짐이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아그네스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런 아그네스의 모습이 조르바는 퍽이나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확실히 놀랍단 말야. 내가 알던 아그네스 황녀님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위해서 언제나 철두철미하게 품행을 정돈하는 사람이었는데. 이게 사랑의 힘이라는 건가?”
“놀리시는 건가요? 저희가 그 정도로 친근한 사이는 아니었을 텐데요.”
“고민을 상담하러 온 사람한테 이정도 농담도 못하면 쓰나, 내가 아르틴 녀석을 위해 해주는 게 얼마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면서.”
“그건...”
저 말은 사실이었다. 같이 다니던 용사가 여자가 되고, 그 주변에 여인이 하나 둘 늘어가 염문이 퍼지고, 심지어 둘째 누나라는 작자가 이상한 헛소문을 퍼트릴 때 아그네스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조르바였다.
요즘도 카이엔의 친구인 클레어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조르바가 아니던가, 클레어를 수습해주겠다던 아르틴의 기약 없는 약속에도, 조르바는 내색하지 않고 제 하렘의 여인들에게 부탁해 저 머리에 꽃이 핀 시골처녀를 돌보고 있다.
아르틴은 모르지만, 그의 하렘이 유지될 수 있는 것도 조르바의 영향력이 컸다. 아그네스 혼자만으로 벅찬 정치적인 움직임을 케어해주는 인물이 바로 조르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탁하고 싶은 건 이미 처리해놨어.”
“네?”
“아르틴에 대한 소문 말야. 대충 천마님이 괴상한 요구를 한 거라고 둘러댔거든. 천마님이 온갖 기상천외한 기행을 펼치고 다닌 탓에 소문을 잡던 것도 쉽더라고?”
조르바는 그렇게 말하며 느긋하게 아그네스의 맞은편에 앉아 홍차를 홀짝였다. 다른 이라면 염두도 내지 못할 뒤처리를 마치 방청소라도 한 듯이 말하는 면에서 이 남자 조르바 펠카스의 면모가 보이는 듯 했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유능한 남자 중 하나. 아카데미의 절반을 제 수족으로 부린다는 소문까지 도는 남자. 아그네스와 마리안느를 비롯한 학생회의 OB가 졸업하고 난다면 다음 학생회장이 될 가능성이 가장 유력한 남자. 그리고 아르틴의 가장 큰 조력자.
그런 남자가 자신이나 아르틴을 흑심이나 대가없이 도와준다는 사실에 아그네스는 안도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마워요. 이번 일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고맙기는, 황녀님을 위해서 한 것도 아니고 아르틴을 위해서 한 건데. 동생을 챙기는 건 형의 의무잖아? 아르틴이 드디어 자유롭게 살고 있는데 누군가 그걸 방해하게 둘 수는 없지.”
“하여간 아르틴도, 그런 이상한 부탁은 거절하면 좋았을 텐데...”
이번 출항식은 많은 VIP들이 보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은 아르틴 본인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이번 출항식에서 가장 언급과 관심을 많이 받는 것은 천마, 카이엔, 그리고 아르틴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천마는 무인이라면 모두가 동경하고 무인이 아니더라도 경외할 수밖에 없는 살아있는 전설. 그리고 용사인 카이엔과 그의 동반자인 아르틴은 그런 천마의 제자다.
그러니, 아르틴은 누구보다도 멋진 모습을 그 자리에서 보여야 했는데...
“화라도 난건가 황녀님? 아르틴이 그렇게 못난 모습을 보여서?”
“...화나진 않았어요. 아르틴이 그런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흠?”
유니코르의 바보 같은 부탁, 그런 것을 굳이 들어준 아르틴이 호구 같아 보일 수는 있으나, 아그네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여인이 부탁했다는 이유로, 제국의 내전에 참가해 싸웠던 사람인걸요. 그러니까, 자신의 연인이 부탁한다면 어지간하면 들어주겠죠.”
“오, 그 말로만 듣던 전 회차의 이야기인가?”
아그네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아르틴이 제대로 처음 만난 3회차라고 불리는 시절. 당시 마왕군의 대대적인 침공에 맞서 싸우던 아르틴과 아그네스는 절대로 친하다고 할 수 없는 사이였다.
그저 몇 번 전장에서 마주친 동료, 새로 떠오르는 전쟁 영웅. 불쾌한 예언자라고 불리던 남자.
“그 회차에서는 오라버니가 마왕군의 손에 의해 죽고, 아버지는 마왕군의 간자들에 의해 타락해버리고 말았어요 보다 못한 천제님이 직접 나섰지만...”
그 틈을 마왕군은 놓치지 않았다. 모든 군단장과 권속들이 나서서 제국군의 경계를 두드리고 반란군을 지원하며 제국을 안팎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국의 가장 큰 위기, 그 당시에 아그네스가 할 수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주기사라고 불리며 전장을 호령하던 그녀가 용사와 그 일행에게 보호를 받는 무력한 여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때 아르틴이 했던 말은 지금도 기억나요.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말이지만.”
“흠? 뭐라고 했길래?”
“그러니까, 분명...”
“울지 마라 아그네스. 최애캐가 우는 모습은 보기 싫으니까.”
“..최애캐?”
“보통은 창작물에 등장하는 캐릭터에게나 붙이는 말이거든요. 가장 좋아하는 등장인물이라는 뜻으로요.”
“아니, 그건 알고 있는데...”
현실의 여자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그런 말을 꺼내려던 조르바는 아그네스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아르틴은 그때부터 저를 짝사랑 했던 거 아닐까요. 제가 아르틴을 알기 전부터..아르틴은 절 줄곧 사랑했다는,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인거죠.”
여인들과 깊은 관계를 나눠온 조르바는 알고 있었다. 분위기에, 추억에 취한 여인의 꿈을 박살내는 것만큼 멍청한 행동은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냥 아무런 부정없이 그저 맞장구만 치기로 했다.
“그거 참 낭만적인걸.”
“그렇죠? 그러니까 아르틴이 제게 다시 찾아온 거죠.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제게, 그렇게 적극적으로...”
“그래서 황녀님은 아르틴에게 그렇게 관대한 건가? 당신을 위해 제국과도 맞서 싸우고 기억을 잃은 당신에게 찾아와서?”
조르바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아그네스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뇨, 그냥 제가 아르틴을 사랑하고, 아르틴이 저를 사랑하니까요. 죽음도 저희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 격렬하게.”
“낭만적인걸.”
“맞아요, 로맨틱하죠, 소설 속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처럼.”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의 아그네스를 바라보며, 조르바는 묘한 기분을 받았다.
자신의 하렘에 속한 여인들도, 자신을 저렇게 사랑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사랑 받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내어줘야 할까.
‘조금은 부럽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의 능력을 넘는 연인을 품느라 고생하던 아르틴이 부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런 인연이야 말로 천금을 내주고도 사지 못할 테니까.
“그러고 보니까, 아르틴이 오늘은 홀로 있고 싶다면서 독방을 쓰고 싶다고 했던가?”
“네? 맞아요.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휴식을 취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고...”
“한번 찾아가 보는 건 어때? 아르틴이 외로워 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차, 찾아가다니..아르틴은 혼자 있고 싶다고 했는걸요? 그런데 무례하게 찾아가는 건...”
그 말에 조르바는 고개를 저었다.
“마왕군과의 전투잖아? 아르틴 녀석도 당연히 긴장하고 있겠지. 그러니까 더더욱 사랑하는 연인이 곁에 있어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 녀석이 당신들 곁에 있어줬던 것처럼 말야.”
“...”
아그네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저 말이 사실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지금 이 순간 아르틴이 보고 싶었다. 만나서 뼈가 으스러지도록, 온 힘을 다해 아르틴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렇다면, 저 말을 핑계 삼아 찾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아르틴은 그런 걸로 화낼 사람은 아니니까.
“가 봐, 다음부터는 들어올 때 노크부터 하고. 나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으니까.”
“...고마워요, 조르바 펠카스.”
아그네스는 더 이상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처음 방에 들어올 때처럼 막무가내와도 같은 그 행동에 조르바는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연애사까지 도와줄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지.’
뭐, 이것도 형이 할 일이지. 라고 생각하며 조르바는 다시 창가로 향했다.
고요한 밤바다는 평화롭고 잔잔했다. 이 바다에 폭풍이 도착하기 전 까지는, 그 평화를 누려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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