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 바다의 밤은 뜨겁고 거칠다 #05
* * *
창작물 속에 자주 보던 클리셰가 있다.
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히로인, 들켜선 안 될 두 남녀로 끝나는 클라이맥스.
허나 다음화에서는 주인공이 아슬아슬하게 문고리를 잡거나 여자가 옷장 안에 들어가 간신히 숨는 그런 급박한 전개.
평소의 나는 그런 클리셰를 무척 우습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열리고 있는 문보다 빨리 움직여서 사태를 무마한단 말인가?
“아, 아르틴...?”
“안녕 아그네스, 꽤 늦은 시간인데 무슨 일이야?”
그런데 그게 된다. 이 짧은 찰나에 카르엔에게 투명 마법과 침묵 마법을 걸어 아그네스가 볼 수 없도록 존재 자체를 가리는 것에 성공했다.
초인의 영역에 도달한 신체능력 덕분도 있지만, 마법을 다른 마법사들처럼 가능성의 추구를 위한 지식의 탐구가 아닌 오롯이 전투를 위한 빠른 캐스팅 위주로 익힌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아무튼 불가능에 성공한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칭찬하며 아그네스를 향해 여유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잠깐 대화를 나누려고 왔는데...뭘 하고 있던 건가요?”
“응? 뭐가?”
“옷은 침대에 벗어 던지고...어, 어째서 알몸인거죠? 게다가 나, 남근을 그렇게 꼿꼿하게 세워서!”
아, 옷 입는 걸 깜빡했네.
힐끗 보니까 침대 위에 내가 벗어 던진 옷들이 널브러져 있는 게 보인다. 다행히 카르엔의 옷은 내 옷 밑에 깔린 건지 눈에 띄지 않는 상태.
문이 전부 열리기 전에 막은 덕에 정액과 애액이 찐득하게 묻은 허벅지는 감출 수 있었지만 압도적인 크기 탓에 발기한 자지를 감추는 것은 무리였다.
“...어, 그게. 명상? 그래 명상을 하고 있었어.”
“명상이요? 도대체 무슨 명상을 이런 식으로 한다는 건가요!?”
“음, 전투 전에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거지. 이런 이야기도 있잖아? 격한 전투의 흥분으로 발기하는 전사나 기사들도 많다고. 나는 그걸 미리 끌어오는 셈이야.”
물론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다 싶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다.
내가 말한 설명은 일반적인 전사들이 아니라 어디 야만인 부족이나 오크 전사들을 표현할 때나 어울릴법한 말.
당연히 아그네스도 그런 내 말을 납득하기 힘든 건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런 게 정말...도움이 되나요?”
“물론이지. 마왕의 영토를 누비면서 나는 늘 명상을 통해 언제든지 싸울 수 있도록 자기 조절을 했었거든. 어떤 적과 싸우게 되더라도 그 즉시 반응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걸 꼭 옷을 벗고 해야 하나요?”
“이러는 쪽이 더 집중이 잘 되거든. 그보다 대화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했지? 무슨 일이야?”
“네? 저 그게...”
내 물음에 의심이 가득한 눈빛을 거두고 우물쭈물 거리기 시작하는 아그네스.
좋아,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를 바꾸는 데에 성공했으니, 이제 카르엔이 깨기 전에 아그네스를 돌려보내기만 하면 되겠지.
“─싶어서요.”
“응? 뭐라고?”
평소처럼 당당한 모습이 아닌 수줍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아그네스.
그런 아그네스의 모습이 의아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아그네스의 손에 내 손목을 꾸욱 힘있게 잡았다.
“...아르틴을...보고 싶어서요...”
“...어?”
마치 처음 사랑을 고백할 때처럼,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도 더욱 수줍은 모습으로, 아그네스가 나를 천천히 올려다봤다.
“그게, 아르틴을 떠올리고 아르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아르틴이 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요...정신이 없을 텐데, 실례였나요?”
“어? 응? 아니, 그게...”
얼굴을 붉힌 채로, 눈망울을 글썽이면서 나를 바라보는 아그네스.
그런 아그네스를 보고 있으니 내 심장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점점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건...이건 반칙이잖아. 아그네스의 어리광이라니!’
반짝이는 은발, 보석처럼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 도도하면서도 때로는 여린 모습을 보여주는 성격에 보이는 것보다도 더 대단한 몸매까지.
...회귀 직후 아그네스가 고백했을 때, 그 고백을 바로 받아들인 이유를 다시금 떠올리는 것 같았다.
내가 직접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이상형의 여인. 아그네스는 내게 그런 여인이었으니까.
“실례였다면...이제 그만 돌아갈게요, 미안해요 아르틴.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이런 약한 소리만 하고...”
그런 아그네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내가 당황하는 얼굴을 본 탓에 말이다.
“아, 아니야! 실례는 무슨, 나도 아그네스가 찾아와서 좋은 걸!”
“정말요? 다행이네요...아르틴의 표정이 어두워서 괜히 찾아왔나 싶었는데...”
아, 젠장. 나도 모르게 아그네스를 붙잡고 말았다. 진짜 병신인가.
“저, 그럼 혹시 안에 들어가도 될까요..? 조금 오붓하게 있고 싶은데...”
“잠깐, 안은 안 돼! 그...룬 마법을 준비 중이거든. 피부에 새기는 마법인데 발키리가 아닌 여인이 의식에 참여하면 효과가 떨어져서 말야.”
하지만 역시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큼은 막아내기로 했다. 카르엔의 옷이라도 들키는 순간 해명하기 어려워진단 말이지.
“...그런 마법이 있다고요?“
“있고말고! 거인들의 왕 로키의 영토를 건널 때 익힌 마법이거든. 사실 혼자 방을 쓰고 싶다고 한 것도 그런 이유야.”
물론 적당한 개소리에 불과했지만, 실제로 거인족 주술사를 상대할 때 룬 마법을 익힌 적은 있었다. 아프고 비효율적이라서 안 쓰던 건데, 이번 전투에서는 억지로라도 써야겠네.
“아...저는 그냥 아르틴이 저희랑 같이 있는 게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내가 왜 너희를 피곤해 하겠어? 너희랑 같이 있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데.”
나는 아직 완전히 납득하진 않은 듯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그네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 아르틴?! 여기는 복도라고요...!”
갑자기 나신으로 자신을 끌어안는 내가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공개된 장소에서 스킨쉽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건지 아그네스의 얼굴이 눈동자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느긋하게 데이트라도 하자. 저번처럼 같이 책이라도 읽으면서 데이트 하는 거 어때?”
“...정말요?”
“대신 이번에는 이상한 책 대신 좀 더 로맨틱한 책으로 가져와야해. 알았지?”
“지, 지난번에는 그냥 실수였다고요! 그 소설도 뒤로 가면 얼마나 로맨틱 한데요!”
지난번 실수를 언급하자 눈에 띄게 허둥거리는 아그네스, 허나 몇 달 사이에 부쩍 커진 덩치와 단단히 붙은 근육 탓에 아그네스는 내 품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와락 안겨왔다.
품에 안긴 아그네스는 내 대흉근에 고개를 파묻거나 내 등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식으로 내 몸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에로틱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온전히 친애라고도 하기 힘든 묘한 스킨쉽.
‘내가 가슴을 주무르고 허리를 쓰다듬는 게 연인들한테는 이런 느낌일까?’
그런 아그네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아그네스가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봤다.
“아르틴, 소원이 하나 있어요.”
“소원? 갑자기?”
“네, 소원이요. 꼭 들어줘야 해요. 어기면 큰일 나는 소원이에요. 유니코르도 들어줬는데 제 소원도 들어줄 수 있죠?”
“...윽.”
가불기에 걸려버린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런 수치플레이까지 해놓고 안 된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동시에 조금 불안해졌다. 도대체 무슨 소원을 요구하려는 걸까.
아그네스를 빤히 보고 있으니, 내 눈을 말없이 쳐다보던 아그네스가 천천히 내 손을 붙잡아 깍지를 껴왔다.
“저랑 약속 해줘요. 이번에는 꼭 다시 돌아온다고.”
“...아.”
“이게 제 소원이에요. 아르틴의 약혼녀인 아그네스가 바라는 가장 간절한 소원.”
그 말을 들은 순간, 예전의 아그네스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겹쳐서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다치지 말고, 무리하지 말고...이번에는 꼭...돌아와 줘요. 아르틴.”
4회차에서 마지막으로 아그네스와 작별 인사를 나눌 때에도, 이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약속했었다.
다치지 않고, 무리하지 않고, 너의 곁으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그 때는 힘이 부족해서, 내가 너무 성급해서 지키지 못한 약속.
“응, 이번에는 꼭 약속 지킬게.”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마왕의 땅으로 돌진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마왕군과 싸우는 것.
게다가 그를 위해 준비도 철저하게 했다. 동료들도 만전의 준비 중이고, 무엇보다 나는 약한 시절의 내가 아니다.
“대신 다른 소원을 생각해봐. 그런 건 소원이 아니어도 꼭 지킬 테니까.”
“...정말로요?”
“그럼, 아그네스에게는 늘 신세만 지니까, 가끔은 아그네스가 원하는 걸 들어줘도 좋지.”
“제, 제가 이상한 소원을 요구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유니코르의 부탁보다 훨씬 이상한 부탁이면 어쩌려고요?”
“아니, 그럴 일은 없어.”
“네?”
유니코르보다 이상한 부탁은 없을 거라고 나는 확신에 차 대답했다.
‘...유니코르가 날 태우고 행진하는 게 두 번째 소원이라는 걸 다른 얘들은 모르겠지.’
사실, 두 번째 소원도 최대한 거절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소원 뭐 없어? 그거 빼고는 어지간한 건 전부 들어줄 테니까!”
“정말이느냐? 그럼 저번에 말했던 대로, 본좌는 폴리모프 상태가 아닌 본모습으로 그대와 뜨거운 사랑을...”
“...아까 뭐라고 했지? 행진은 네 발로 하고 싶다고 했나? 아니면 목말을 탈까?”
정말로 뭘 부탁해도 그보단 나을 것이다. 소녀틱한 감성을 지닌 아그네스가 내가 들어주기 힘든 부탁을 할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뭐든지 말해봐. 당황하는 걸 보니까 뭔가 생각하는 건 있나 본데?”
“그, 그으게에...”
조금 야한 소원인지, 아니면 창피한 소원인지 아그네스는 아까 내가 끌어안을 때보다도 얼굴을 더욱 붉힌 채로 머뭇거렸다.
그런 아그네스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아빠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때.
──주물럭.
“응?!”
“아, 아직 말 안했어요 아르틴! 왜 놀라고 그러세요!? 혹시 독심술이라도 익히셨나요?”
“어?그,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놀라자 아그네스가 더 크게 놀라 나를 바라봤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감춰야 했다.
‘뭐지? 왜, 누가 내 자지를 주무르는 것처럼 느껴지지...?’
아그네스는 포옹 중에 내 자지가 닿는 게 부끄러운 건지 하반신은 묘하게 떨어진 상태.
그러니 허공에서 껄떡거리고 있어야 할 내 자지에 어째서인지 부드럽게 감싼 채 주무르는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주물주물♡
아니, 같은 게 아니라 확실히 느껴진다! 분명 아그네스의 손은 내 손을 맞잡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자지에서 딱 여자 손 크기의 손짓이 느껴지고 있다!
[꽤 즐거워 보이네, 아르틴.]
당황하던 내 머리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텔레파시 마법으로 전해진 것 같은 그 목소리는 아직 묘하게 낯선, 그러면서도 익숙한 질투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카, 카르엔? 지금 뭐 하는 거야?!]
[뭘 하긴, 괘씸한 바람둥이를 괴롭히고 있지. 어때? 기분 좋아?]
그 말과 동시에 등 쪽에 느껴지는 풍만하고도 부드러운 촉감. 그리고 불알과 자지를 정성스럽게 주물러오는 세심한 손길.
“괜찮아요 아르틴? 갑자기 표정이 이상해졌는데...”
그리고 내 품에 안긴 채로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그네스.
“괘, 괜찮...흐읏...”
그 순간 나는 깨닫고 말았다.
현실에서 봤던 투명인간 컨셉의 야한 동영상.
거기에 나오는 여자 배우들은 정말로 연기를 잘하던 것이라는 것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