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 바다의 밤은 뜨겁고 거칠다 #07
* * *
아그네스가 방을 떠난 직후, 나는 섣부르게 움직이는 대신 집중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아그네스가 떠나가는 인기척을 확인했다.
“갔나? 갔지? 갔네.“
아그네스의 머뭇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떠나고 나서야 나는 방을 나올 수 있었다.
설마 마지막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고 방 앞을 서성이며 감시할 줄이야.
‘아니지, 생각해보면 불륜의 현장을 들킨 셈이니까 당연한가?’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별다른 추궁 없이 순순히 떠난 아그네스가 의아하게 느껴지긴 했다.
화나거나 슬퍼보이지도 않던데, 여자가 너무 많아지니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일단 그에 대한 추측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지금은 아그네스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카르엔! 괜찮아?!”
“아하하, 생각보다 빨리 왔네 파트너, 황녀님에게 들키면 어쩌려고?”
나와 같은 배를 쓰는 카르엔의 방에 쳐들어가자, 입술이 파랗게 질린 카르엔이 새 옷을 꺼내 입고 있던 차였다.
표정은 꽤나 놀란 상태인데, 아마도 내가 바로 상태를 확인하러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거겠지.
“이 정신 나간 녀석아! 아무리 들키기 싫어도 그렇지, 밤바다에 뛰어드는 녀석이 어딨어!?”
“안 들켰으니 결과적으로는 좋은 거잖아? 게다가 우리는 초인이니까 그 정도로는 죽지도 않고.”
“그래도! 초인은 안 죽어? 차라리 정령술이나 마법을 써서 날아가던가! 그런 거 잘 쓰잖아!”
“제왕안에는 전부 들킬 텐데 이쪽이 확실하잖아? 나도 아르틴이랑 한 약속을 지키고 싶었는걸.”
카르엔의 말대로 초인의 경지에 오른 우리가 밤바다에 뛰어드는 정도로 다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전신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어도 과다출혈로 죽기는커녕 어디 해변가에서 주워지지 않을까?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냅다 뛰어내리는 건 무슨 발상이란 말인가, 마왕군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위험한 행위고.
“하아...그래, 안 다치고 상태도 멀쩡하니 다행인 것 같네. 컨디션은?”
“괜찮아. 왜 감기라도 걸렸을까봐?”
문뜩 즐거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카르엔. 사람이 걱정하는데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당연히 웃음이 나오지. 이제는 내가 조금만 다쳐도 아르틴이 이렇게 걱정해 주는 데.”
“변태야? 마조히스트냐? 그 때는 당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렇지.”
나는 그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야 카이엔 시절의 녀석은 내가 신경을 별로 써주지 않기는 했다.
하지만 나보다 강하고 튼튼하고 재생력도 좋은 녀석을 내가 왜 걱정하겠어. 드래곤 하트를 품은 녀석의 피는 일반인의 피가 아니라 용의 피가 흐르는 셈인데.
“그럼 지금은 이런 사소한 걸로도 걱정할 필요가 있다는 거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들뜬 목소리로 나를 바라보는 카르엔.
그런 카르엔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걱정한 내가 바보가 된 것 같다.
“멀쩡한 것 같으니 난 이만 간다.”
“응? 벌써 가게? 기왕 찾아왔는데...”
내가 뒤를 돌자 뭔가 갑자기 내 소매를 카르엔이 붙잡았다.
힐끗 보니, 눈에 빔이라도 쏠 것 같은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초롱초롱 바라보고 있다.
“카르엔, 너 혹시 마족의 피가 흐르고 있어?”
“응? 갑자기 그건 왜?”
“왜긴 왜야. 곧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데 또 나를 붙잡으니까 그렇지. 정신 좀 차리자!”
“...파트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묘해.”
내가 뭐, 나도 참을 때는 참는 다고. 아까는 생리 백신 주사 소리 듣고 자제력이 떨어졌을 뿐.
“컨디션 관리 잘 해놔.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니까. 알았지?”
“...알았어. 준비하고 있을 게.”
카르엔의 어깨를 가볍게 안아 토닥여주자, 카르엔은 내심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 이상 무언가 요구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강렬한 포옹, 그것 하나로 만족했다.
*
“그럼...진짜로 새겨야 하나?”
방에 돌아온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그네스에게 말한 룬 마법을 피부에 새겨야 할지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핑용 물약도 인벤토리에 가득 채워놨고, 엘릭서도 상점에서 사놨고, 마법도 전부 메모라이즈 해놨는데...굳이 룬 마법까지 새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룬 마법의 준비 방식은 암기 마법의 메모라이즈와 유사한 형태를 지닌다.
다른 점이라면 암기 마법은 마법을 내 마나에 각인 시켜 필요할 때 영창을 간략하게 줄이거나 생략하고 사용하는 방식인 반면 룬 마법은 피부를 직접 그어내야 한다.
당연히 끔찍하게 아프다. 단순히 피부를 그어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검 끝에 마나를 일으켜 절대로 지워지지 않도록 피부의 재생력을 강제로 죽여 버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젠장, 얼마 전이었으면 이런 고민은 하지도 않을 텐데...’
고작해야 변명을 위해 떠올린 고대마법에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뀌어버린 전투 방식 때문이다.
마왕성 백도어 작전을 위해 마왕의 영역에서 보낸 1년. 그 1년이 내 전투 방식을 완전히 바꿔놨다.
“나도 몰랐지. 설마 내 전투 방식이 그 정도로 투박하게 바뀌었을 줄이야.”
마왕의 영역에서 내가 상대해야 했던 마족들은 평상시 만나던 마족들과는 질도 양도 궤를 달리했다. 마왕의 힘을 받은 탓에 평소보다 더 질기고, 더 강하고, 더 튼튼한데다가 숫자도 미친 듯이 많았으니까.
사실상 마족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국가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곳에서 나는 몰래 숨어 다니며 동시에 마왕의 최정예간부와 근위병들을 쳐 죽여야 했고.
단적으로 인간과 마왕의 국경에서 벌어지는 전장에서 거인은 1마리만 나타나는 것만으로 전투의 양상을 뒤집는 전쟁병기 같은 존재지만, 장벽 북쪽에서는 근위대랍시고 4~5마리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간부들도 급이 달랐다. 렉스턴이나 망령왕 같은 인간의 형태를 한 중간 보스 정도의 군단장들과는 다르게, 그곳의 군단장들은 하나 같이 자연재해처럼 강력해, 권속과 같은 급이라고 봐도 무방한 하몬의 비밀병기들.
그런 녀석들을 상대하며 나는 더 강하고 묵직한 검을, 오로지 나보다 강한 괴물들을 죽이기 위한 전투법을 점차 익혀야 했다.
문제는 그게 세밀함하고는 거리가 아주 멀다는 점.
직접 카르엔과 싸워보니 알 수 있었다.
빠르면서도 아름다운 카르엔의 검은 마치 그림을 그리는 천하제일 화공의 붓과 같이 거침없이 움직이지만, 칼의 끝이 그려낸 궤적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에 반해 내 검은 오로지 살의, 만약 꿈이 아니었다면 카르엔이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 몇 번이나 나왔을 정도로 무겁고 날카로웠다.
‘오히려 제국검술이나 왕국 전투술을 쓰는 게 더 효율이 떨어지는 걸 보면 완전히 버릇이 된 모양인데...’
육체가 약할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육체가 전성기의 힘을 찾아갈수록 내 정신이 전성기의 전투법을 떠올리는 상황.
사실 카르엔에게 미련 없이 내가 직접 만든 검을 넘긴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한 손으로도 휘두를 수 있는 무게중심이 가벼운 검보다는, 확실하게 내려찍어 버릴 수 있는 검이 내 손에 더 익다보니 검 자체에는 별 미련이 없어졌다.
“뭐, 아카데미 창고에 있던 무기를 몇 개 들고 왔으니까 대충 이거라도 쓰면 되겠지.”
인벤토리 한 쪽에 우겨넣어 가져온 거대 중병기들. 그 이름들도 대단한 무기들뿐이다.
최초의 용살자 지크프리드가 썼다고 전해지는 대검 발뭉,
천마의 아버지가 휘둘러 타락한 바다신을 베어 죽였다는 방천화극.
그 외에도 대부분 전설 속에 나오거나 이름 있던 영웅들이 쓰던 무기들이 관리가 완벽히 된 채로 내 인벤토리 안에 넣어져있다.
참고로 내가 털어온 것이 아니다. 천마님이 네가 쓰기엔 이쪽이 좋을 거라며 싹 다 털어온 걸 내가 쓸 만한 것만 간추린 게 이 정도다.
말하고 가져온 건 아닌 것 같지만, 원작에서도 카이엔이 성검을 얻기 전 아카데미의 무기고에서 무기 하나를 용사를 위한 하사품으로 가져왔으니 별 상관없겠지.
나는 용사의 대리인 이니까. 용사의 것은 내 것이다.
“후우, 그렇게 따지면 역시 룬 마법은 새기는 게 좋긴 하겠네.”
룬 마법은 투박하고 원시적인 만큼 강한 힘을 발휘한다.
고대에 베르세르크라고 불리던 전사들도 룬 마법의 힘으로 거인들과 싸워 이길 정도로 파워 하나에 있어서는 무식한 성능을 낸다.
파워가 강한 탓에 룬 마법을 사용하면 세밀한 기술을 사용하는 건 무리고 연비도 썩 안 좋긴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별 단점도 되지 않는다.
연비? 연비는 엘릭서로 채우면 돼. 넘쳐나는 상점 포인트는 이럴 때 팍팍 써야지.
“아, 쓰읍...발화Fire.”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더 지체할 것도 없어진 나는 손끝에 마법으로 화려한 불을 피워 올렸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단검의 날을 불로 지지며, 동시에 날 끝에서 새하얀 검기를 천천히 피워 올렸다.
“후우, 그래, 고문당하던 것을 떠올리자. 그때에 비하면 별로 아픈 것도 아니지!”
아니다. 정말 뒤지게 아프다. 그냥 문신은 애들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존나 아프다.
엘릭서로도 회복되지 못할 정도로 영구적인 손상을 자해로 입히는 건데 어떻게 안 아플까.
한 때는 이 룬 문자 새기는 기술을 검술에 도입하면 적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을 정도로 아프다.
하지만 자기최면은 중요한 법, 어차피 아픈 거 덜 아프다고 생각하고 하면 비명이라도 안 지를 수 있지 않겠는가.
──치이이익!!!
아니었다. 마음의 준비를 끝낸 후 칼날을 복부에 가져다 대고 룬을 새기자,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와 함께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
동시에 내 입에서 나도 알 수 없는 방언 비슷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단검으로 피부 위에 인조 각인을 새기는 건 진짜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차라리 피부를 인두로 지지는 게 더 아프다고 둘 다 겪어본 사람으로서 확신할 수 있다.
‘시작은 거인의 룬으로...그 다음 격동의 룬...힘의 룬 옆에 지혜의 룬...!’
손이 사시나무 떨 듯 미친 듯이 떨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룬 문자를 하나씩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새겨나갔다.
동시에 내가 새긴 룬 문자에서 선명한 마나의 빛이 일렁이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내가 집중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다.
‘좋아, 이대로만 하면 돼. 침착하게 한 획을 그을 때 마다 전력으로 집중해서....’
이번에 새기기로 한 룬 문자는 총 8글자, 룬 문자를 엮어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 게 가장 강력한 힘을 낸다.
물론, 집중이 풀리거나 고통에 단검을 놓쳐 멈추기라도 한다면 노력이 전부 허사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최선을 다했다.
‘세 글자...두 글자...드디어, 마지막 한 글자...!!!’
그렇게 참다보니 마침내 3번만 선을 그으면 완성이 될 차례가 왔다.
장하다 아르틴! 장하다 양희민! 잘 참았다 잘 참았어!
‘이제 가로로 한 획...!’
──콰앙!!
“큰일 났어요 오라버니!!! 지금 공화 연방의 함대가 마왕군과 교전 중이라는 소식이!!!!”
“크에에에엑!!”
그 순간, 갑자기 방문을 박살낼 듯이 열고 들어온 샤오메이의 사자후와도 같은 쩌렁쩌렁한 외침에 내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 떨림에 룬마법이 망가지지 않도록 힘을 강하게 준 덕에 직선이 곡선이 되는 일은 없었다. 대신 단검의 날이 할복이라도 한 것처럼 복부 안에 절반정도 박히기는 했지만.
덕분에 복부의 장기들을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그리운 경험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게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니다.
“배가아아...배가아아아...”
“네! 마왕군에게 공화연방의 배가 공격 당하고 있데요! 당장 서둘러야 해요!”
“아니...내 배가아아..”
“네? 배가 왜요? 게다가 웬 피냄새가...?”
방문과 등을 돌리고 있던 탓에 내 상태를 알지 못하던 샤오메이가, 내 처참한 몰골을 확인하곤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악?! 오라버니 지금 배에다가 뭘 하고 계신 거예요?! 유니코르!! 사르디엘!!”
“허으어어억...”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어쩐지 옛날에 본 만화 속 주인공이 떠올랐다.
양다리를 걸치다가 배 위에서 배에 칼을 맞고 죽은 그 주인공.
나도 그 주인공처럼 벌을 받은 것은 아니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