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화 〉 와일드 헌트가 나타났다.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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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한 안개가 밤바다에 내려앉았다.
동시에 바닷물이 위로 솟구쳤다. 동시에 심해에서 기어 올라온 수십 척의 유령선의 모습들이 일제히 드러났다.
으아아아! 그 모습을 본 선원들 중 일부가 비명이 뒤섞인 고함을 토해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선원들의 영혼을 노예처럼 부린다는 귀신 들린 함대, 폭풍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바다 사나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저 ‘와일드 헌트’다.
만약 아카데미의 함대를 이끄는 선원들이 베테랑 해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들의 주변에서 전투태세를 갖추는 용맹한 전사들과 기사들이 없었더라면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선원들이 무력화 됐을 것이다.
허나 그 선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할 전사와 기사들조차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부는 당장이라도 저 넘실거리는 밤바다에 몸을 던져 여신의 곁으로 순교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품고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저 바다 아래에서 나타난 배들이 태우고 있는 것은 단순히 죽지 않는 언데드 해적이나 뱃사람의 원혼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직후 가장 최심부에서 나타난 배들의 갑판 위에는 배에는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석판들이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저 구조체의 정체는 오직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게이트, 마왕군의 군단장을 전장에 강림시키는 장거리 이동 마법 장치. 지독한 마기를 내뿜는 저 비석들이 작동하는 순간 이 바다에 군단장들이 강림하는 것이다.
[최후미의 유령선들에 게이트가 탑재! 탑재된 게이트는 총 3개!]
[아직 게이트가 작동하지 않은 지금이 기회입니다! 전 함대의 함포를 게이트를 향해 발사해 작동을 정지시켜야 합니다!]
[불허한다!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모든 함대는 함포를 포격 준비 상태로 대기하라!]
일부 선장들이 군단장의 강림 자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번 함대의 지휘를 맡은 함대장은 그 요청을 단호하게 묵살했다.
이는 아르틴이 로얄 레이디들을 통해 섣부른 함포 사격을 막은 덕이었다.
애초에 마법과 연금술이 가미된 함포의 화력은 분명 저 게이트들을 박살낼 수 있을지도 모르나, 만약 실패한다면 군단장들이 강림한 직후 그들을 저지할 화력에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항을 할 거라면 마음껏 해보라는 듯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함대와 대치한 유령선을 보고 있는 선원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웅성임이 커져만 갔다.
“허, 감히 되도 않는 뻥카로 도발을 해?”
그에 대응해 아르틴이 움직였다. 배의 선수에 올라 가장 앞에 있던 유령선을 향해 아르틴이 주먹을 움켜쥐자, 빛으로 이루어진 창 한 자루가 쥐어졌다.
──콰릉!!
이내 선수에서 뿜어져 나간 한 줄기의 섬광이 유령선을 강타했다. 그러나 본래라면 유령선의 돛대 하나 정도는 박살냈어야 할 빛줄기가 조금도 유령선에 피해를 주지 못한 것을 보며 아르틴이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아카데미의 함대에 보호마법과 결계가 걸린 것처럼, 저 유령선에도 아주 정교하고 단단한 보호 술식이 걸려있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상태를 보아하니 아마 포격을 날렸어도 몇 번은 가볍게 무시했을 터.
“좆같은 뼈박이 새끼, 단단히도 준비 했네. 마왕의 본성에나 걸려있던 보호 술식을 이런 일에다 사용해?”
저런 것을 뚫으려면 메피스토가 강림한 바이올렛의 마법 폭격, 혹은 전력을 다한 천마의 일격이 유효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처음부터 소모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패.
아르틴이 생각하기에는 그 교활한 하몬이라면 저것을 부술 초화력조차 방비에 염두 했을 것이 분명했다. 골통은 텅텅 빈 해골 주제에 늘 저런 조잡한 수에는 능통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하몬의 간보기는 실패로 끝났으니. 그럼 이제 본 요리가 나올 차례군.”
──우우우웅! 아르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각 게이트가 맹렬히 진동하며 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뒤이어 마치 방사능과 같은 음침한 녹색 빛이 게이트의 주변을 감쌌다. 뒤이어 등장할 존재들에 대해 일대의 모든 생명들에게 경고하듯 공기가 떨리고 파도가 일렁이며 유리가 찢어지는 기분 나쁜 소음을 퍼트렸다.
아르틴의 곁을 지키기 위해 옆에 올라온 카르엔 조차 이 기분 나쁜 소음과 괴성에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오로지 아르틴만이 이 모든 개지랄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뿐.
아르틴은 알고 있다. 저 모든 이펙트가 전부 하몬의 연출에 불과하다는 것을, 정말 긴급한 순간에 작동하는 게이트는 저런 조잡한 연출조차 없이 곧 바로 군단장을 토해내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하몬은 이런 허접한 연출을 좋아했지. 녀석의 성격상 가장 먼저 등장할 건...’
첫 번째 게이트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근대와 현대의 미적 감각이 섞인 아카데미의 복장과는 시대가 다르다고 표현해도 무방한 고전적인 북유럽 복장을 한 거구의 전사였다.
수염이 거칠고, 금발 머리가 길고 난잡하게 풀어 해쳐져있다. 늑대 가죽으로 만든 듯한 옷은 무척이나 낡고 해졌으며 근육질의 몸과는 다르게 핼쑥한 볼은 건강한 전사로 쳐주기도 힘들다.
언뜻 보기에는 등장 연출 치고는 평범해 보이는 야만인 전사처럼 보이는 인물이었지만, 그 남자의 손에 쥐어진 천둥이 넘실거리는 거대한 망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미친 괴짜 새끼, 덩치가 가장 작다고 가장 강한 군단장을 가장 먼저 내보내다니.’
몰락한 옛 신 마그니. 제 목숨을 비루하게 구걸한 명예를 버린 군신??.
그런 주제에 명예로운 죽음을 찾아다니며 학살을 일삼는 정신 나간 광전사.
‘또 혼자 중얼거리고 있네, 여기가 내 무덤이 되길 바란다는 개소리나 지껄이고 있겠지.’
아르틴은 마그니를 혐오했다. 복수를 할 거면 복수를 하고 은거를 할 거면 은거를 하지, 제 원수와 배신자와 손잡고 인간을 학살하면서 겉멋이나 부리는 병신이 아니던가.
하지만 뒤이어 등장한 괴인에 비하면 저 남자는 선녀라고 치부할 수 있다고 아르틴은 확신했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군, 인간들의 역겨운 냄새가 진동을 해.]
두 번째 게이트에서는 마그니보다 머리가 몇 개는 커다란 괴인이 나타났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데스마스크를 쓴 괴인은 그 등 뒤에 떠있는 5개의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리치와 같은 정신파롤 일대에 뿌리는, 인간의 형태와 유사하게 생겼을 뿐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6m가 넘는 거구에 손바닥에 입이 달린 발톱이 달린 거대한 손아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산자에게 혐오감을 일으키는 역겨운 생김새와 본질만큼이나 추한 역겨운 영혼을 지닌 리치 하몬의 간부.
휘광을 삼키는 자, 엘드리치.
[전부 죽여서 내 오브제로 만들면 좋겠어. 하몬님께서도 모조리 죽여도 좋다고 허락하셨으니 말이야.]
저 역겨운 리치는 기분 나쁜 존재들이 차고 넘치는 마왕군에서도 독보적으로 역겨운 존재인데, 취미는 사람의 시체를 이용해 예술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전투법도 그 취미만큼이나 고약하다. 양손에 달린 아가리로 상대방의 힘을 흡수하고, 등 뒤에 달린 다섯 가지의 마안으로 다양한 저주를 걸어 농락하며 상대가 좌절하는 모습을 즐기다가 괴롭게 죽이는 것을 즐기는 쾌락 살인귀.
“...파트너, 지금이라도 후퇴해서 아카데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맞지 않을까?”
엘드리치의 모습을 확인한 카르엔이 긴장한 듯 표정이 굳었다. 이미 한 번 마왕의 본성까지 돌파한 경험이 있는 아르틴과는 다르게 카르엔은 저런 것과 싸워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카이엔의 모습으로 싸워온 것은 장벽 밖에서 활동하는 마왕의 간부들 뿐, 장벽 안에서 나오지 않는 저런 존재들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다.
그 탓에 카르엔은 불안했다. 아직 완전히 전성기의 힘을 되찾지 못한 자신이, 마찬가지로 전성기의 힘을 되찾지 못한 아르틴을 방해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직접 보니까 갑자기 싸울 자신이 없어졌어?”
“하지만 군단장이 셋이잖아. 이건 우리가 상정한 최악의 상황에 가까운 일이라고! 그러니까 차라리 가장 승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물러나는 게...!”
카르엔이 걱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며 설득하려는 모습을 본 아르틴은 문뜩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카르엔 너, 확실히 여자가 되기는 했구나? 카이엔 일 때는 그런 약한 소리를 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뭐?”
아르틴의 기억 속의 카이엔은 언제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묵묵히 제 말을 따라 싸우던 남자였다.
그런데 여인의 모습을 한 지금은 노골적으로 긴장감을 드러내며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저것이 어쩌면 여태껏 숨겨온 카이엔=카르엔의 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습과 속내를 감추던 사람은 올가 같은 부류도 있지 않던가.
“카르엔, 내가 왜 엘드리치 토벌에 너랑 단 둘이 나서겠다고 한 줄 알아?”
“...왜?”
“그래도 싸울 때는 네가 가장 나랑 합이 잘 맞고 듬직하거든.”
아르틴이 팡! 하고 카르엔의 어깨를 두드렸다.
빈 말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주인공 보정과 용사 보정을 받아 성장이 빠른 카르엔은 언제나 자신을 웃도는 강함을 보여주곤 했었다.
게다가 드래곤의 힘과 신체능력을 전수받은 덕에 아무리 험한 전장에서 진흙탕처럼 싸워도 카르엔은 늘 아르틴과 합을 맞추며 싸워오지 않았던가.
“게다가 아까 그렇게 자랑했잖아? 과정이야 어쨌든 나랑 대련해서 2승이나 더 따내서 내 검까지 가져가 놓고선.”
“그건...”
그 말에 카르엔의 시선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용사 임명식 때 받은 용사의 증표, 성검 엘렌타르와 나란히 놓여있는 아르틴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감을 가지고 믿고 따라와. 카르엔 너는 충분히 강해. 네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이제 와서 망설이는 카르엔에게 아르틴은 실망하지도 타박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늘 그랬던 것처럼, 카르엔의 가능성을 믿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카르엔은 문뜩, 자신이 왜 아르틴에게 반했었는지 다시 떠올랐다.
가장 힘들고 지칠 때마다, 언제나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던 그 모습.
용사 카르엔이 아니라, 인간 카르엔을 바라보며 할 수 있다고 말해주던 그 모습.
그 모습들을 보고 있던 자신이 어느샌가 아르틴에게 반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자신감을 가져, 너랑 나 둘이면 마왕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누누이 말했잖아. 우리 둘은 뭐라고?”
“...파트너.”
파트너. 너는 늘 나를 그렇게 불렀었지. 그렇게 나를 믿어줬지.
“그렇지, 이제 싸울 준비는 됐어, 파트너?”
──세 번째 게이트가 열리며 거대한 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개의 팔과 오백 개의 머리를 지닌 시체 거인, 천괴수 헤카톤케일이 절반의 머리로는 기괴한 울음소리를 흐느끼며 절반의 머리로는 울부짖으며 포효했다.
이상한 것은 아까 엘드리치를 봤을 때처럼 두렵거나 걱정이 들진 않았다. 대신 카르엔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아르틴이 포기하기 전 까지는, 자신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싸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응, 언제든지 준비 됐어, 파트너.”
“좋아. 가자.”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함포 소리와 함께, 카르엔과 아르틴이 배에서 뛰어올라 엘드리치를 향해 쇄도했다.
뛰쳐나가며 카르엔은 한 자루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손에 쥐어진 건 용사의 성검 엘렌타르가 아니었다.
자신의 파트너가 자신에게 믿고 건넨, 이름 없는 한 자루의 검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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