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화 〉 용사가 아닌 자
* * *
[크아아악! 또 다시 내 눈동자를!!]
자신의 3번째 눈동자가 터져나가자, 엘드리치가 고통에 울부짖으며 내뿜은 정신파에 바다가 태풍이라도 부는 것처럼 요동쳤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감히, 감히 내 마안을 3개나 박살내다니! 고작해야 인간 둘 주제에!’
고대, 영웅들이 즐비하던 시대에서도 엘드리치의 마안을 3개 이상 터트린 존재는 없었다. 아니, 감히 그럴 상상을 한 필멸자가 존재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마안은 단순히 터트리는 것으로 무력화 되는 것이 아니다. 봉인의 마안은 리치 하몬이 자신이 마왕에게 하사받은 마왕의 권능으로 만들어낸, 무려 마왕의 보물에 가까운 물건.
때문에 물리적인 힘으로 파괴한다고 해서 그 힘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마왕의 권능에서 파생된 마기가 엘드리치의 마기와 힘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3개의 눈동자에 담겨있던 마왕의 권능이 엘드리치의 육신에 스며들어, 예전의 엘드리치와는 비교도 안 될 강력함 힘과 권능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진다.
그 힘과 권능은 당연히 존재감에서도 드러날 터, 이 정도로 압도적인 격차라면 저 인간 둘이 알아차리고 슬슬 겁을 먹어야 정상일 터다.
그런데, 그런데.
“좋아, 3개째 격파, 이제 4페이즈가 시작 될 거야. 지금부터 성검도 같이 사용해야 유효타를 줄 수 있을 테니 명심해.”
“후후후, 알고 있어, 정말 아르틴 말대로만 하니까 상상 이상으로 전투가 쉽네?”
“그럼, 그야 내가 세운 공략법인데. 당연히 쉽지.”
[아직도 그렇게 건방진 태도라니...! 이 오만방자한 놈들!!!]
저 여유가 넘치는 모습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 압도적인 힘을 목도하고도 용사와 그 동료는 겁을 먹는 모습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대화의 내용을 따르면 저 아르틴이란 녀석이 이 전투를 총 지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설마 정말로 예언의 눈이라도 있는 건가? 죽은 오딘의 눈이라도 손에 넣었나 보군.’
자신의 주군인 하몬의 말이 맞았다. 저 남자는 위험하다.
고작해야 시르카에게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들은 것이 2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둘이서 군단장을 상대할 힘을 지닌 것부터가 이상하다.
싸우는 방식은 전투에 이골이 난 노기사처럼 노련하고, 판단력은 애송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다. 여기서 더욱 성장한다면? 그 때는 정말 권속의 목을 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우. 인정하마, 너희는 상상 이상으로 강하군, 버러지 같은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르다.]
“뭐냐, 왜 갑자기 침착해졌어?”
방금 전까지 분노로 이글거리던 정신을 가다듬은 엘드리치가 침착한 정신파를 내뱉자, 당장 다음 페이즈를 준비하던 아르틴과 카르엔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진지하게 상대해주마, 나와 대등한 존재로 너희를 인정하고, 휘광을 먹는 자 엘드리치의 전부를 다해 너희를 죽여주도록 하마.]
“어? 잠깐, 이 새ㄲ...”
아르틴이 이질적인 상황을 알아차리는 순간, 엘드리치의 모습이 두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르엔이 그 모습에 당황해 눈을 깜빡이는 찰나, 검은 그림자가 카르엔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와드득──!!
동시에 블링크로 공간을 뛰어넘은 아르틴이 카르엔을 감싸며 방패를 들어 올리자, 양팔의 근육과 혈관, 뼈가 동시에 터지고 부셔지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든 충격을 10분의 1로 줄여주는 지고의 방패를 들고도 초인의 육체가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괴된 것이다.
“아르틴!!”
메피스토와 카르엔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는 순간에도 엘드리치는 보이지 않는 속도로 아르틴의 방패를 내려찍었다. 한방 한방 살의를 담아 내려치는 그 일격은 산을 잡아 던지는 헤카톤케일의 힘과 비견될 정도로 강력하다.
미친 새끼, 눈동자가 3개밖에 안 터졌는데 마지막 페이즈를 시작해? 아르틴 루드비히는 속으로 욕을 부르짖으면서도 방패를 놓지 않았다.
사르디엘과 메피스토와 계약한 덕일까, 그 육체는 실시간으로 박살나면서도 재구성을 멈추지 않았다. 그걸로 벌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3초 남짓이 전부였지만, 그 3초가 지금은 아르틴과 카르엔의 목숨을 구했다.
“이, 개 같은 새끼가──!!!”
성검 엘렌타르와 아르틴의 검을 양손에 쥔 카르엔이 엘드리치를 향해 참격을 휘둘렀다. 그 모습을 전부 볼 수 잇을 정도로 동체시력이 좋은 이가 있다면 마치 검무를 추는 것과 같이 우아하다고 감탄했을 지도 모르는 움직임.
허나 그 검이 그리는 궤적은 날카롭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붓질과도 같은 참격은 한 획만으로 상대방의 목숨을 절명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치명적이고 예리하다. 불사의 리치이자 마왕의 권능을 해방한 엘드리치조차 그 연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야 할 정도로 말이다.
“괜찮아 아르틴? 상태가...!”
“방심 하지 마! 최종 페이즈다. 저 새끼, 봉인의 마안을 포기하고 모든 권능을 힘에 집중 시켰어!”
[거기까지 알아차리다니, 역시 만만히 봐선 안 될 녀석이구나.]
실제로 엘드리치의 등에 떠오르던 다섯 눈동자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그 압도적인 방해능력을 자랑하는 봉인의 마안을 포기한 댓가로 엘드리치는 한 순간이나마 최상위 군단장, 혹은 그 이상의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다시 목표를 바꾸겠다, 용사와 나머지 인간은 어찌 되어도 좋다. 아르틴 루드비히, 네 목숨만큼은 내가 거두도록 하마!]
“씨이발, 그거 눈물 나게 고맙네! 메피스토!”
“응! 이미 준비 끝났어!”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메피스토가 허수 공간에서 미리 준비해놓은 주사기를 꺼내 아르틴의 몸에 주입하자, 안에 담긴 엘릭서가 혈관을 타고 아르틴의 육체에 흐르기 시작했다.
그 틈을 놓칠리 없는 엘드리치가 다시 달려들자, 이번에는 카르엔이 전면에서 막아서며 그 묵직한 손톱과 마법의 폭격을 막아서며 용의 권능을 깨워냈다.
‘젠장, 아직 최종 페이즈에 들어서면 안 되는데, 지금 피지컬로 단번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까?’
4회차 시절의 아르틴이라면, 오히려 마안을 봉인한 것에 감사하며 전면에서 싸워 힘으로 찍어 눌렀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아무리 도핑을 해도 전성기 시절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메피스토의 본체를 소환해? 하지만 그래봤자 지금 메피스토의 낼 수 있는 힘은 본체에 비하면 태산 앞에 티끌 같은 수준. 그보다는 차라리 지금처럼 순간순간 모습을 드러내며 보조하는 것이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다.
“좋아. 결국 진흙탕 싸움으로 가자는 거지?”
허나 아르틴은 좌절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처절하게 물고 늘어지는 싸움은 2회차 시절부터 장기로 삼아온 전투법이 아니던가.
“해보자고, 누가 이기는 지. 마지막까지 가면 내가 다 이겨.”
이 정도 상황도 대비하지 못해서야 고인물이라고 불릴 자격은 없다. 아르틴은 인벤토리의 10종류가 넘는 무구를 꺼내 들었다.
검은 태양을 쏘아 떨군 영웅의 활.
사룡의 목을 벤 용살자의 대검.
천마 이전에 홀로 군단장의 목을 베었다는 도왕의 도.
그 외에도, 아카데미의 박물관에서 옛 영광의 상징으로 쓰이던 수많은 영웅의 무기들.
자격이 없는 자는 쥘 수도 없다는 그 강력한 아티팩트들을 들어 올리며 아르틴은 걱정 떠올랐다.
‘이것들, 반납은 못할 것 같네. 전투 끝에는 몇 자루나 남으려나.’
──그 강함에 자신 있는 아르틴만이 할 수 있는 오만하고도 정당한 고민을 끝으로, 아르틴은 망설이지 않고 엘드리치를 향해 뛰어들었다.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격렬한 전투 탓에, 아르틴은 한 순간 눈앞을 스쳐지나간 상태창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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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어억...!]
단말마와 함께 엘드리치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이미 그 육신을 유지할 마왕의 권능은커녕 한 줌의 마기조차 남지 않은 상태.
그것은 모순적인 말이었다. 마기로 가득 찬 마왕의 영토에서, 마왕의 권능으로 보호받는 이 마왕성 내부에서 마기도 마왕의 권능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이전에 군단장과 권속들의 죽음을 소식으로 들었을 때는 속으로 비웃었던 엘드리치였지만, 지금은 이미 죽은 그들의 처지가 너무나도 깊이 이해가 되었다.
힘도 권능도, 결국 그것을 담는 것은 사용자의 정신과 육체라는 그릇이다. 허나 지금 이 순간 엘드리치는 힘을 담을 육체도, 권능을 행사할 정신력도 남지 않았다.
대신 패배감, 공포, 굴복 따위만이 그 정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제 주군이 안다면 그 영혼을 불태울 나약한 사고방식 이었지만, 지금은 주군인 하몬의 분노조차 눈앞의 인간에 비하면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후우...끝이냐? 더 보여줄 건 없고?”
반명 인간은 자신의 피로 이루어진 웅덩이를 몇 개나 만들어 놓고도 숨을 고르며 일어났다. 저항을 포기하고 굴복한 자신과는 다르게 그 눈에는 아직 투지가 살아있었다.
[너는...누구냐, 너는, 너는 인간이 맞는 것이냐? 어떻게, 일개 인간이 이만한 힘을...?]
죽은 권속의 권능을 흡수한 엘드리치의 힘은 말 그대로 4대 권속에 필적하는 수준.
게다가 다른 권속이나 군단장과는 달리 엘드리치는 마왕의 신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왕성의 한가운데에서 싸웠다. 지금 자신의 힘은 지옥의 상급악마나 천계의 대천사와고도 비견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자신이 모든 힘과 권능을 다해도, 눈앞의 인간을 죽이지 못했다. 서로가 자신의 모든 힘을 꺼낸 치열한 접전 끝에 패배하고 굴복한 것은 자신이란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쿨럭, 이제 곧 있으면 하몬 놈들이 들이닥치겠네, 디코이가 충분히 시간을 벌어줘서 다행이지...”
[대, 대답해라! 어떻게 그만한 힘을 손에 넣은 것이냐! 왜 그런 힘을 지니고 우리에게 대적하는 것이냐? 세계를 주겠다, 인간들의 땅 전부를 주겠다! 우리와 손을 잡아 세계ㄹ...]
파삭! 공포에 질린 정신파를 내뿜던 리치의 골통이 날아온 도끼에 의해 가루가 되어 박살났다.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울려서 머리가 아프잖아. 콜록! 콜록.”
도끼자루를 집어든 남자는 피가 섞인 기침을 뱉으며 허리춤에 찬 포션 벨트를 어루만졌다.
“아, 젠장. 엘릭서를 다 썼네. 아까 그게 마지막이었나.”
빈 포션 벨트를 만지며 남자는 이를 갈았다. 1년이 넘는 긴 싸움동안 몇 번이나 목숨을 구한 엘릭서 5병이 마침내 바닥을 보인 탓이다.
“엘릭서를 펑펑 마시면서 싸울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그랬으면 이 짓거리도 반년 전에 끝냈을 텐데.”
좀 더 소분해서 나눠 마실걸, 하고 후회를 삼키며, 남자는 리치가 지키던 계단을 차근히 올라갔다.
“그래도 곧 마지막이야, 이제 마왕의 침실이 눈앞이라고...”
피로 흐려지는 시야에서도,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리치 뒤에도 끊임없이 제 앞을 가로막는 마수와 근위대를 베어 넘기며 앞으로 걸어갔다.
붉은 양탄자가 수놓인 레드 카펫과 같은 붉은 길을 마왕의 침실까지 길게 늘어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목표가 눈앞이야,”
서걱! 어느 마족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래, 다시 돌아간다고 아그네스랑 약속 했었지...어떤 표정을 지을까?”
으득! 마수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전부 쳐죽이면, 너희에게 돌아갈 수 있겠지. 나를 기억하는 너희의 곁으로...”
푸욱! 어느 거인의 심장이 창끝에 걸려 허공을 날았다.
마침내 남자가 마왕이 봉인된 곳에 다다랐을 때, 그 뒤로는 마수와 마족들의 시체가 피의 강에 둥둥 떠다니는 서처럼 보였다.
지난 1년간 마왕군의 병력을 절반 이상 홀로 도륙한,
마왕군의 군단장과 권속을 단신으로 쳐죽이고 다닌,
일개 개인으로서 이룰 수 있는 업적 이상을 이루어낸 악몽이자 전설과도 같은 이 남자는.
──용사가 아니었다.
단지 그것 하나로, 남자는 그 모든 업적을 이루고도 제 바램을 이루지 못했다.
원통한 일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