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화 〉 용사가 아닌 자#02
* * *
‘젠장 젠장 젠장!! 여기서, 여기서 죽는 건가? 그 빌어먹을 노친네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마왕군이 나타난 직후, 뮤리스 루드비히는 패닉에 빠져 제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안전을 명목으로 동경하던 골드 클래스 배에 탈 수 있게 됐다는 사실조차 그녀의 심신을 안정시켜주진 못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당장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데.
아니, 목숨만 잃는다면 온건한 결말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 간악하고도 무시무시한 마족들은 여신에게 인도되어야 할 인간의 영혼을 훔쳐 식사와 유희를 위해 소모한다고 아카데미에서 수도 없이 배우지 않았는가.
‘난 그저 아르틴을 감시하라는 노친네의 말을 핑계 삼아 1학년들 노는 거 보면서 인맥도 쌓고 봉사 점수나 챙기려고 했을 뿐인데..!’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뮤리스 혼자만의 일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학생들과 선원들, 심지어 소수의 군인들조차 그녀와 같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단 하나만 나타나도 전투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알려진 마왕군의 간부가 무려 셋이다. 그에 반면 이쪽의 병사와 무기는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틀렸어. 그 천마조차 군단장을 해치울 때는 국가 단위의 지원이 있어야 했다고! 우린 다 죽을 거야!”
“뮤, 뮤리스 양. 당신의 동생이 용사의 동료가 아닌 가요? 용사님은, 다른 영웅들은 우리를 위해 시간을 벌어주실까요?”
“몰라요, 몰라요, 모른다고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좀 닥치고 있어요!”
평소에는 온갖 있는 척 고귀한 척 생색을 내던 제 무리의 귀족 여식들이 평정심이 무너져 제게 따지자, 평소라면 적당히 대답했을 뮤리스도 버럭 소리를 지르며 험한 말조차 서슴치 않았다.
“지, 지금 저한테 닥치라고 하신 건가요? 뮤리스 양...?”
“어차피 다 죽을 텐데 무슨 상관이야! 눈앞에 군단장이 나타나서 우릴 전부 죽이려고 하는데!”
아르틴? 카이엔? 소문의 용사도 고작해야 1학년의 풋내기인데 우리를 구해낸다고? 뮤리스가 생각하기에는 전부 정신 나간 헛소리나 다름없다.
거인 살해자인 마리안느나 무신의 딸 샤오메이가 천마를 얼마나 잘 도와주냐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달라질 뿐, 자신들은 전부 죽고 말 것이다.
“전부...전부우 죽고 말거라고오...나, 나는 이렇게 죽기 싫었는데에...”
뮤리스는 여태까지 참던 울음을 터트리며 죽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뮤리스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객실 안에 퍼지자 간신히 감정을 통제하던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녀를 따라 흐느끼며 절망에 빠졌다.
학생들을 통제해야 할 선원과 병사들조차 그런 학생들을 말릴 수 없었다. 오히려 어른이라는 체면 덕에 울음을 터트리지 않는 것만 해도 잘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순간 이 배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무덤이자 관이고, 이 배에 탄 이들은 살아있음에도 죽은 망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삶의 의지를 잃고 죽음을 체념하는 단계까지 온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잠깐만요, 저길 보십시오 기사님,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말인가. 우리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 천마님과 다른 기사들이 분전하고 있는 덕이겠지. 헛된 희망은 버리고 여신님께 기도하는 게 좋을 거네 선원. 죽어서라도 영혼이 여신님에게 닿고 싶다면...”
“아니, 잘 보세요! 지금 저희가 군단장을 오히려 몰아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이기고 있다고요!”
“이런, 정신이 완전히 나갔군, 잘 생각해보게 선원, 셋이나 되는 마왕군의 간부를 지금 이 상황에 우리가 이기고 있을 리가...”
있었다.
한 선원의 말에 무기력하게 앞을 살피던 귀족 가문의 호위 기사는 저 멀리 벌어지는 신화적인 전투를 두 눈으로 보고난 후 제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이기고 있다...? 군단장이? 그 마왕군의 간부들이 이 소수의 병력에 밀리고 있단 말인가?!”
“저, 정말이다! 이기고 있어! 우리가 이기고 있다고!”
마리안느와 그녀를 따르는 전사과 기사들에 의해 손에 팔이 몇 개나 베여나간 괴수거인.
천마와 소수의 특공대에 의해 발이 묶여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야만전사.
그리고 단 두 사람에 의해 저지당하는, 아니, 명백히 밀리고 있는 사악한 리치까지.
분명 압도적으로 패배하고 있어야할 인류가 마왕군을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믿을 수 없는 기적 같은 사실에 학생들과 선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천마님은 역시 전설 속의 영웅이었구나! 저런 소수의 동료를 데리고 군단장을 몰아붙이다니!”
“세상에, 왕국의 전사단과 제국의 친위대가 저렇게 강했던가? 게다가 거인의 목을 베어넘기고 있는 건 그 거인살해자 마리안느 왕녀잖아!”
“그리고 저 사악한 리치를 막고 있는 건, 용사 카이엔이잖아! 그리고 옆에 있는 건...”
“...저거, 아르틴 루드비히 아니야?”
누군가 내뱉은 그 말에, 카이엔의 옆에서 싸우는 붉은 머리의 청년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모두가 알고 있는 아르틴에 대한 소문과 평판이 달랐기에 각기 다른 반응이 터져 나왔다. 그 난동꾼! 미치광이! 학년 1위! 황녀의 약혼자! 용사의 동반자!
“뭐? 아르틴? 그럴 리가 없는 데? 비켜 봐!”
허나 뮤리스는 그 말에 귀를 의심하며 창문에 몰린 사람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요즘 제 못난 히키코모리 동생이 잘나가고 있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고작해야 1학년 1위가 어떻게 군단장과의 싸움에서 활약한단 말인가?
“진...짜네? 저 리치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이었다. 귀족, 부르주아, 평민 가릴 것 없이 모든 이들이 보고 있는 이곳에서, 아르틴 루드비히는 용사 카이엔과 합을 맞춰 저 리치를 상대로 대등하게 싸워 나가고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5%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동체시력이나 경험으로 이 싸움을 이해하기에는 싸움의 수준이 너무 높았다.
극소수의 엘리트 학생과 몇몇 기사들만이 저 싸움을 이해하며, 감탄을 넘어 경외의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도끼를 들고 저렇게 빠르게 움직여? 사람이 저렇게 많은 무기를 동시에 다룰 수 있을 리가..”
“잠깐, 오히려 밀어 붙이기 시작한 것 아닙니까? 붉은 머리 학생의 움직임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중 한 손에 꼽힐 만한 이들만이 이변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전투가 벌어진지 1시간이 넘었을 무렵, 전투의 피로와 피해로 인해 사람들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시간에 한 남자의 움직임이 독보적으로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1분 전만해도 힘에서 밀렸던 이가 힘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쳐내기 시작한다.
피하고 막아내는 것도 벅차 보였던 공격을 어느새 정면에서 맞받아치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합이 길어질수록, 그 우위는 점점 가시화되어 눈에 뚜렷하게 보인다. 슬슬 시력에는 자신이 없던 마법학과의 뮤리스조차 그 이변을 알아차릴 정도로.
“...이제는 혼자서 군단장을 압도하고 있어.”
“말도 안 돼...저, 저게 정말 우리랑 같은 사람이라고?”
곁에서 함께 리치와 싸우던 용사 카이엔이 어느 순간 그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이 어설프게 끼어드는 것이 아르틴의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라도 한 것처럼.
“저게...정말 내가 알던 아르틴이라고?”
지금 이 순간, 뮤리스가 알던 아르틴 루드비히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대신 그녀를 포함한 모든 학생과 선원들이 새로운 영웅의 등장을 목도하고 있었다.
이제껏 누구도 쓰지 못한 새로운 서사시를 써내려갈 지고의 영웅을.
*
정신을 차린 엘드리치는 자신의 몸이 난도질에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말을 떠올리기는커녕 비명이나 기합을 지를 여유조차 남지 않았다.
엘드리치는 지금 자신에게 향하는 일격 하나하나가 쳐내지 않는다면 불사의 생명력조차 끊어낼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전투능력이 아니었다. 이미 마왕의 권능은 물론이고 수백년간 모아온 영혼의 힘까지 개방한 전력을 어찌 일개 인간이 압도한단 말인가.
게다가 치명적인 공세를 이어나가는 당사자인 아르틴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기에 엘드리치는 넋이 나갈 것 같은 혼란을 느껴야만 했다.
힘을 숨기고 있던 건가? 아니, 그럴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아까부터 저 인간은 자신의 목숨을 끊어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던 것이 느껴졌었다.
그렇다면 아티팩트나 권능에 의한 힘인가? 아니, 그런 유형의 힘이라면 트리거가 될 법한 무언가 전조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유형의 힘을 흡수할 수 있는 손아귀의 아가리가 아무런 힘을 흡수하지 못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남는 답은 하나, 지금 자신과 싸우고 있는 아르틴 루드비히는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강해지고 있었다. 1초 전의 자신보다 1초 후의 자신이 명백히 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확실히.
[말도 안 돼! 인간이 아니라 마족, 아니 악마라도 그런 것은 무리다! 정체가 뭐냐! 괴물! 이 괴물녀석!]
엘드리치가 흐느끼는 정신파로 단말마를 울부짖었지만, 아르틴의 공격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더 강하게, 더 빠르게, 더. 더. 더 할 수 있어.’
아르틴은 지금 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가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감각을 되찾기 위한 재활치료를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그 기억과 감각은 느낌처럼 오래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반년도 지나지 않은 기억 속의 자신을 떠올리고, 그에 맞춰 따라 움직이면 될 뿐.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는 아르틴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이 과거의 움직임을 점점 재현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여태까지 몸에 두르고 있던 무거운 갑옷과 짐을 모두 벗어던지고 전력으로 뛰는 듯한 해방감에, 아르틴은 더욱 그 감각에 몰두하며 과거의 자신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보면 완전히 감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는 무협에서 나오는 깨달음과 일맥상통한 것이었다. 외부의 어떠한 개입도 없이 스스로의 무아지경을 통해 본래보다 일취월장한 수준의 경지에 이르는 것. 아르틴은 그 무아지경에 스스로를 내던지기로 결심했다.
옆에서 같이 싸우던 카르엔도 그 의도를 알아차려 싸움에서 물러나 아르틴과 엘드리치의 싸움을 눈으로 보고 배워나가고 있었다.
아니, 배우고 있는 지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 천외천의 재능이라고 아르틴에게 경외와 질투를 받던 그녀조차 지금은 아르틴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외우는 것이 전부였다.
‘나랑은 전혀 달라...투박하고, 거칠고, 규칙조차 없어 보이는 데...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방식을 창조하고 있어...’
극에 달한 움직임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천마도 카르엔 본인도 그러한 진리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천마의 손짓은 태풍을 잠재울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며 카르엔의 검은 수준이 높아질수록 마치 춤을 추는 것과 같이 아름답고 정확하다.
하지만 지금 아르틴의 것은 그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자신이 기억하던 2회차, 3회차의 아르틴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도살, 사냥,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어. 저런 걸 무술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콰드득! 살점이 터져나가는 소리. 엘드리치의 양팔이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간신히 몸통에 붙어 있다고 봐도 좋을 상태.
동시에 아래로 추락한 엘드리치의 육체가 아르틴의 마법으로 얼어붙은 바다에 부딪혀 굴렀다. 엘드리치는 제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지만 이미 정신이 공포에 잡아먹혔다.
[흐어억...흐어어억...! 오지 마! 오지 말란 말이다!!]
존재의 근본이 정신체인 리치가 감정에 잡아먹혔다는 것은 명백한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는 것. 바닥을 벌레처럼 빌빌 기어 다니며 엘드리치는 아르틴에게서 최대한 멀어지고자 했다.
아르틴은 그런 엘드리치의 뒤를 무심히 걸어 뒤쫓았다. 제 손에 들린 메이스를 만지작거리며 엘드리치를 쫓는 그 모습은 사형집행인처럼 무심하면서도 명확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살의.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순수하고도 명백한 살의.
[누가, 누가 좀 도와줘! 마그니!!! 헤카톤케일!!!!]
“뭐야, 그게 유언이냐? 별거 없이 시시하네.”
[히..히익..]
제 등 뒤에서 들린 아르틴의 목소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을 알아차린 엘드리치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아르틴이 천천히 메이스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됐어, 이제 그냥 죽어라.”
죽는다.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서 살해당한다. 그 명백한 사실에 엘드리치가 성대도 살점도 남지 않은 목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도움이 필요한가 보네~♡ 하몬의 장난감?”
“?!”
갑자기 위에서 들려온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 아르틴의 메이스가 반사적으로 궤적을 틀어 위를 향해 솟구쳤다.
허나 육중한 메이스는 허공을 가르고, 몽마 여왕 릴리트의 모습이 바다 안쪽에서 나타났다.
상대방의 오감을 무너트리는 것은 몽마의 가장 큰 주특기라는 사실은 아르틴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나 무아지경에 너무 심취한 부작용이었다.
“자, 착한 아이는 잠 잘 시간 이란다♡”
“릴리트, 너──”
아르틴이 새로운 무기를 양 손에 쥐어 휘두르는 그 찰나, 릴리트의 분홍빛 안개가 아르틴의 몸을 감싸며 강렬히 빛난다.
그 빛은 이미 겪은 것이기에 아르틴도 카르엔도 잘 알고 있는 권능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권능의 위력이 지난번 장미관 사건이나 시르카의 것과는 궤를 달리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점일까.
“──파트너!!”
“쉿♡ 취침 시간에는 조용히 해야지. 여기는 너무 시끄러우니 우리는 단 둘이 놀아볼까, 아르틴 루드비히?”
카르엔이 다급하게 손을 뻗는 그 찰나, 아르틴과 몽마의 모습이 안개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