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260화 (260/266)

〈 260화 〉 몽마의 세계

* * *

눈을 뜨자,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 홀로 남아있었다.

서있다고 말하기도 누워있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마치 별이 없는 우주를 떠다니는 감각.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황했을 테지만 나는 이 상황을 지독히도 잘 알고 있다.

특히 기억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릴리트의 면상을 생각한다면, 내가 지금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뻔하다.

정신 감옥 타르타로스.

릴리트의 필살기 중 하나이며 가장 짜증나는 권능이기도 하다.

몽마의 힘을 사용해 상대방을 릴리트 자신의 정신세계에 가둬놓는 권능인데, 이 권능의 악랄한 점은 평범한 몽마의 권능과는 다르게 외부에서 개입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대상의 육체 자체를 릴리트의 정신세계로 끌고 오기 때문에 육체를 통한 무의식 난입은 불가능.

릴리트 자신도 정신세계로 빨려 들어오기 때문에 현실에서 죽이는 것도 불가능.

정신세계 내부에서 릴리트를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도 않아 사실상 무적이라고 봐도 좋다.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제약이 몇 개 있는데, 타르타로스 내부의 시간은 느리게 할 수 없다거나, 릴리트가 상대방에게 직접적인 공격은 할 수 없다는 점.

게다가 릴리트 자신도 이 권능에 갇히게 되는 만큼, 외부의 상황이 아무리 불리해져도 릴리트 본인이 간섭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게다가 권능의 해제는 릴리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르타로스를 해제하는 방법은 단 하나, 릴리트와 상대방이 양 쪽 다 이 권능을 해제하길 바라는 것이 전부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냐고? 원작에서 나와서 잘 아는 거 아니냐고?

“이런 씨발, 이걸 3번이나 당하게 될 줄은 몰랐네.”

적당히 강했던 3회차랑 꽤 강했던 4회차 당시의 나를 타락시키기 위해 릴리트는 이 권능을 사용했었고, 나는 2번이나 이 권능을 탈출한 유일한 사람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덕분에 원작에서도 단 1번, 제대로 나오지도 않고 히로인 타락용으로 쓰였던 이 힘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고 말이지.

‘난이도 진짜 개좆같네. 4번째 줄에 있던 물음표가 설마 릴리트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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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마왕군의 침략

퀘스트 완료 조건

1. 휘광을 삼키는 자, 엘드리치를 처치하십시오. (0/1)

2. 천괴수 헤카톤케일을 처치하십시오. (0/1)

3. 몰락한 옛 신 마그니를 처치하십시오. (0/1)

4. ??의 ??, ???? ???를 처치하십시오.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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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욕의 권속, 몽마여왕 릴리트.

상태창을 열어 다시 확인해보니 글자 수도 맞아 떨어진다. 오히려 맞아 떨어져서 더 좆같지만.

‘게임으로 치면 1번째 메인 스트림인데, 보스가 군단장 셋에 권속 하나라고? 이걸 어떻게 깨라고 만든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은 나를 억까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엘드리치의 막타를 놓친 것도 슬금슬금 떠올라서 좆같음이 배가 된다.

“빨리 돌아가서 군단장들 처리해야 하는데, 카르엔 녀석이 엘드리치를 끝낼 수 있으려나?”

아마 무리일 것이다. 모든 힘을 해방한 엘드리치는 압도적인 힘으로 패버리거나 전의를 완전히 꺾어야지만 죽는 끈질긴 거머리 같은 새끼다.

지금쯤 내가 릴리트에게 갇힌 것을 깨닫고는 전의를 회복했을 거고 지금 카르엔의 수준으로는 목숨을 끊는 건 힘들 터.

“...길게 시간이 끌리면 위험해. 당장 릴리트를 찾아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릴리트 그 녀석이 함부로 내 앞에 나타날 리는 없고...”

“안녕 자기~♡ 나 불렀어?”

“?!”

흠칫, 뒤쪽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 곳에는 익숙한 여인이 서있었다.

분홍색 머리에 볼륨감이 넘치는 뇌쇄적인 몸매, 그리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남자는 가볍게 홀릴 것 같은 교태 가득한 눈매.

등에 달린 날개와 꼬리만 아니라면, 그녀에게 고백하고자 하는 남자들이 제국과 왕국에 가득 했을 것 같은 경국지색의 외모.

그리고 감출 수 없는 이 압도적인 존재감까지.

트윈테일이라는 머리 스타일이 내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확실히 릴리트였다.

“...릴리트.”

“지난번에 만나고 처음이네♡ 그렇지 아르틴 루드비히?”

내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릴리트는 내게 마치 아이돌처럼 상큼한 눈웃음을 지으며 교태를 부려왔다.

녀석이 내 눈앞에 바로 나타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나로서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표정이 이상하네? 내가 무슨 꿍꿍이라도 품고 있는 것 같아?”

“...당연한 거 아니야?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이곳에 가둬놓고. 이렇게 뻔뻔하게 얼굴을 내민다니.”

“어머, 타르타로스에 대해 꽤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어떻게 아는 걸까? 역시 시르카 그 멍청한 년이 다 알려 줬나봐?”

그렇지만 표정과는 다르게 목소리에는 분노를 꾹꾹 억누르는 게 확연히 드러나는 릴리트.

“나는 시르카를 죽였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내 장난감을 망가트린 녀석에게 복수를 하러 왔는데...어떻게 한 거야? 그래 보여도 어지간한 고문은 안 통했을 텐데?”

시르카랑 우리와 같이, 정확히는 내 사역마가 되고 있던 것이 문제였던 건지, 릴리트는 제 감정을 감추지 않고 가늘게 뚠 눈매로 나를 노려보며 히죽거리며 떠보고 있었다.

“아, 혹시 자지로 푹푹 마구 박아대서 함락이라도 시켰나? 그 아이, 일부러 남자랑 어울리지 못하도록 목줄을 잡고 있는 맛이 있었는데.”

“...시르카가 노처녀였던 게, 네 탓이라고?”

“응~재밌잖아? 서큐버스가 사실은 처녀라는 거! 그런 주제에 감히 차기 몽마여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 까지! 정말 바보 같은 짓 아니야? 꺄하하♡”

설마 시르카를 130년 노처녀로 만든 게 릴리트였다니,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게 분명하다.

누가 나를 강제로 130년간 동정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그 새끼를 찢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텐데.

“그래서, 정말로 어떻게 한 거야? 협박했어? 아니면 세뇌? 혹시 진짜 자박꼼? 세상에, 서큐버스를 맛가게 할 자지라니, 너 정말...”

“그래서 왜 나타난 건데? 날 풀어주려고 나온 건 아닐 테고?”

“...흐응, 나가는 법까지? 시르카 그 년이 제 새 주인에게 보지고 마음이고 다 줘버렸구나?”

내가 가시 돋힌 어투로 릴리트를 추궁하자, 릴리트는 눈웃음이 사라지며 감정이 싹 빠진 무표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게 말야, 원래는 감히 인간 주제에 내게 상처 입히고 계획을 망친 널 아주 오~래 여기에 가둬둘 생각이었거든? 늙어 죽진 않겠지만 뭐 100년이면 인간이 멸망하기엔 충분하지 않을까 했고.”

“...그럼 너도 이곳에 100년이나 갇혀있어야 할 텐데? 나 하나 잡겠다고 권속 중 하나가 100년이나 봉인되겠다고?”

“그야, 나는 릴리트 본체가 아니거든. 아, 본체라고 봐도 괜찮을지도? 원래 힘의 50% 가까이나 가진 분신이라면 본인이나 다를 바가 없잖아?”

“미친, 50%? 제정신이야? 그 정도면 지금의 너는 군단장보다 못한 존재일 텐데?”

몽마는 마족 중에서도 유일하게 제 힘을 자유롭게 분배해 분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

하지만 분신에는 자신의 마기와 권능을 나눠야지만 그만한 힘을 사용할 수 있으니 무한 치트키는 아니다.

타르타로스를 쓸 수 있다는 것은 50%의 힘 중에서도 주요 권능의 일부를 이 분신에게 할당했다는 것. 즉 릴리트는 진심으로 나를 100년간 가둘 생각이었다는 셈이다.

“그런데? 내 앞에 나타난 건 100년은 포기하겠다는 건가?”

“그야, 나도 사실상 본체인데 마왕님의 부활할 때 자리에 없으면 섭섭하잖아? 게다가 100년이나 너를 감시하면서 몸을 숨긴 채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세상에. 그런 끔찍한 고문이 또 어디 있겠어! 재미없을 거라고!”

“과연, 네 시간을 다른 릴리트를 위해 낭비하기는 싫었다?”

“바로 그거야♡! 역시 나를 한번 엿 먹인 존재라서 그런지 눈치는 좀 있네?”

저 말은 분신 주제에 독립된 자아를 가지게 돼서 본체의 말을 거부하고 제 스스로 판단해서 움직이겠다는 뜻이다.

즉, 단단히 미친년이라는 소리기도 하고.

정말로 시간을 끌려고 했으면 나라고 해도 꽤 힘들었을 텐데, 지루하다는 이유로 본체를 질투해서 작전을 망쳐?

‘하긴 본체인 릴리트도 정상은 아니라서 분신에게 힘의 절반을 넘겼는데, 쌍으로 미쳤네.’

“그러니까 내 말은...질질 시간 끌 것 없이 단기 결전으로 승부를 보자는 거야♡! 그 편이 지루하지도 않고 서로에게 좋지 않겠어?”

릴리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의 심연이 점차 내게 익숙한 풍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여기는...”

“몽마의 방♡ 존재하는 모든 쾌락을 즐길 수 있도록 준비된, 내 시크릿 아지트~라고나 할까?”

“..알고 있어, 그래서 여기는 왜?”

러브호텔..아니, 쾌락을 위한 스위트룸이라고 봐도 좋을 커다란 침소에는, 내게도 익숙한 성인용품부터 난생 처음보는 거대한 기구들까지 가득했다.

심지어는 구속구나 고문 도구, 단두대와 비슷하게 생긴 것도 있었는데, 저런 건 도대체 왜 쓰이는 지 알기도 싫고 추측하기도 싫어서 혐오스럽게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야 했다.

“내가 싸우는 걸 보니까. 우리 자기가 생각보다 잘 싸우더라고? 세상에, 군단장인 엘드리치를 그렇게 몰아붙이다니? 대단해♡ 그 천마보다 강한 건 아닐까? 혹시 그 검은 머리 암컷이 아니라 자기가 용사 아니야?”

“사설이 길어. 용건은?”

“그러니까아...서로 기싸움 하지 말고, 윈윈하는 승부로 결판을 내자는 거지♡”

릴리트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고, 왼손 검지가 그 원을 향해 푹푹 박음질을 하는 시늉을 선보였다.

그 말에 나는 어이가 너무 나간 나머지 그 의사를 다시 물어봐야만 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너랑 나랑 지금 이 자리에서 섹스하자고?”

“어차피 이 공간에서 자기가 나를 힘으로 어떻게 하는 건 무리거든? 그러니까~♡ 먼저 패배선언 하는 쪽이 패배. 자기가 이기면 내가 내보내주고, 자기가 지면..내 노예 하는 거, 어때?”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이마를 탁 치고 말았다.

설마 몽마여왕이 섹스배틀을 하자고 권유를 해올 줄이야.

“제정신이냐? 그걸 내가 왜 받아들여? 네가 사람을 어떻게 타락 시키는 지 뻔히 아는데.”

이 갈보년의 보지에 타락한 영웅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내가 요즘 알파메일이 됐다고 해도 고대부터 남자의 정액을 뽑으면서 살던 여왕에게 상대가 될 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시르카 같은 특별 케이스가 아닌 이상 몽마랑 섹스를 하는 것 자체가 정상적인 판단은 아니다. 적이 가장 잘하는 걸로 싸워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야, 지금 이 순간에도 바깥에서는 네 동료랑 친구들, 그리고 학생들이 죽어나가고 있을 테니까. 가서 돕고 싶잖아? 그렇지?”

“...”

허나 시르카는 내 턱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다시 눈웃음을 지었다.

“싸움을 지켜보면서 생각했지, 왜 자기랑 그 암컷용사에게 지원이 가장 적을까? 가장 강한 전력에 지원을 집중하는 게 맞는데.”

“그건...”

“후후후♡ 사실 알고 있어. 멋드러진 영웅심, 강자의 희생정신과 책임감. 그런 거잖아? 어려서 그런지 참 귀엽다니까♡”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릴리트는 내 입에 손가락을 얹으며, 제 길다란 꼬리로 내 허리를 감싸 가슴에 터질 것 같이 커다란 가슴을 밀착시켜왔다.

“그런 점, 귀여워서 싫어하지 않아. 그러니까 빠르게 승부를 보자는 거지. 어때? 자기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텐데♡”

자신만만한 얼굴, 내가 이 제안을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는 확신에 찬 웃음.

“아, 혹시 자발적으로 지금 당장 내 노예가 되겠다고 한다면 바로 풀어줄 수도 있는데♡”

“뭐?”

“물론 군단장들도 철수 시킬게. 이번 작전은 자기가 목적이었거든♡ 자기를 타락시키면 목적 달성이니까 하몬도 이해해줄걸?”

내가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고 있자, 릴리트는 오히려 더욱 과감한 제안을 해왔다.

아마 평범한 영웅이라면 단번에 굴복할지도 모르는 그런 제안을.

“게다가 자기가 있으면 다른 릴리트를 내가 흡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나는 분신이 아니라 진짜가 되는 거야! 노예가 되면 자기를 내가 아~주 많이 아껴주기도 할게♡ 어때? 사람도 살리고 최고의 대우까지, 정말 좋은 조건 아니야?”

릴리트는 나를 올려다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어떤 쪽이든 내가 이 내기 자체를 거절하지는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확실히, 지금 바깥은 무척 위험한 상황일 것이다.

아마 내가 합류하지 않는다면, 혹은 굴복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죽을지도 모른다.

내 연인들, 내 친구들, 스승님과 동료들까지...

“그래서 대답은? 어떻게 할 거야 자기?”

“...”

더욱 찰싹 달라붙는 릴리트, 가슴을 부드럽게 짓누르는 가슴, 매력적인 눈매.

그 릴리트가 나를 유혹하고 있다. 이 몽마여왕의 자궁에 자지를 박아 눈앞의 암컷을 정복해 수컷임을 증명하라고.

"...나는."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내가 이 오만한 제안에 할수 있는 선택은 결국 단 하나였다.

아니, 애초에 이 선택지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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