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 용사가 아닌 자#03
* * *
“주, 주인님?!”
“아르틴!!”
아르틴이 사라진 순간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유니코르와 시르카였다.
두 여인과 아르틴은 계약관계로 종속되어 있기도 하며, 바이콘 상태인 유니코르와 몽마의 2인자인 시르카보다 마기에 민감한 이는 이 자리에 없기 때문.
허나 지금같이 급박한 상황에서 유니코르와 시르카의 행동이 득이 되기는커녕 독이 되고 말았다.
“뭣들 하는 거냐! 앞을 보고 집중해라!!”
“경고가 늦었구나, 천마.”
끊임없이 마기를 쏟아 부어 마그니의 광기를 깨워야할 두 사람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 마그니의 망치 묠니르가 두 여인을 향해 날아갔다.
쿠르릉! 천둥을 닮은 굉음과 함께 묠니르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시르카 향해 쇄도하자 시르카는 손을 뻗으며 몽마의 권능으로 물리적인 힘을 무마시키고자 했다.
“커흑!?”
“몽마여!? 괜찮은가!?”
시르카가 뻗은 팔을 포함한 그녀의 우반신이 묠니르에 의해 통째로 터져나가자 유니코르가 다급하게 외쳤다.
다행히 시르카는 몽마의 권능으로 박살난 우반신을 복구할 수 있었으나, 그 후유증은 심각했다.
“마, 말도 안 돼. 여태 그렇게 유효타를 먹였는데도 어디서 이만큼의 힘이?”
“정말로 고작 너희 셋이서 나를 완전히 막고 있었다고 생각했나? 지금까지는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한 것일 뿐이다.”
무척이나 오만한 발언을 내뱉으며 묠니르를 회수하는 마그니였지만, 천마는 그 말을 쉬이 넘길 수가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눈앞의 군단장은 정말로 힘을 억누르고 싸웠다는 것을 증명하듯 억누르고 있던 힘을 아끼지 않고 드러내며 그 격과 힘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녀석, 설마 여태까지 우리를 상대로 일부러 힘을 아낀 것인가?”
“힘을 아껴? 그런 오만한 생각은 없었다. 그 성가신 용사의 동료가 사라졌으니 이제야 너희에게 집중할 수 있을 뿐이니까.”
“...뭐?”
“도대체 저런 괴물을 어디서 데려온 거지? 엘드리치와 싸우면서도 나와 하몬의 장난감을 견제하다니. 덕분에 그 녀석을 상대할 여력을 남기느라 곤란했다.”
“지금, 뭐라고...”
천마의 물음이 무색하게도, 마그니는 자신의 망치와 도끼를 폭풍처럼 휘두르는 것으로 대화를 중단했다. 그 무례함에 천마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으나, 도저히 입을 열어 비꼴만한 여유가 없었다.
“미안하구나 천마여! 본좌가 몽마를 뒤로 후퇴시킬 테니 잠시만 기다리거라!”
“잔말 말고 빨리 다녀 오거라! 오래 시간을 끌긴 힘드니까!”
유니코르가 신체를 수복하는 시르카를 데리고 후방으로 후퇴하는 사이, 천마는 혼자 전력으로 몰아치는 마그니를 상대로 시간을 벌어야 했다.
쾅──! 콰앙──!
한 번의 도끼질에 바다가 갈라지고, 한 번의 망치질에 밤하늘이 요동치는 저 일격들은 막아내기 위해서는 천마신공의 절초들을 전부 쏟아내도 모자란 수준.
만약 압도적인 물리력을 권능으로 취급할 수 있다면, 저 무기를 휘두르는 저 힘과 속도는 군단장 중에서도 손에 꼽힐 강력한 권능으로 취급되리라라.
“왜 그러지, 휘청거리고 있지 않나?”
“큿...! 입으로 떠들기는!”
”조금 전까지 보여줬던 것보다 조급해 보이는군! 고작 그 정도가 한계였나!”
체내에 쌓인 마기를 도끼에 담아 방출하며 평정심을 되찾는 마그니.
그에 반면 천마는 주변의 마기 때문에 자연에 깃든 외부의 진기조차 내부에 받아들일 수 없다.
명백히 천마가 불리하며, 다른 곳에서 지원이 오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까지 벌어질 수 있었지만, 천마의 경우는 오히려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젠장! 거인의 공격을 버텨냈네! 남은 병력은?”
“전사단 13명, 제국의 기사들이 15명 남은 것 같습니다 왕자님! 나머지는 왕녀님을 위해 길을 열다가 부상으로 인해 교단의 배로 열외한 상태입니다!”
“젠장, 상황 한 번 기가 막히네, 이렇게 갑자기 전열이 무너지는 게 말이 돼?”
천괴수 헤카톤케일을 상대하는 이들은 양으로만 치면 이번 전투 최대의 지원을 받는 중이었다. 저 거대한 시체거인이 휘두르는 천개의 팔 중 단 하나만 막지 못하더라도 수십, 수백의 학생들이 죽을 수 있기에 가장 많은 전력을 할애한 셈이었다.
사기도 흐름도 꽤 나쁘지 않았다. 저 시체골렘은 대마녀의 손녀와 함대의 함포들이 뿜어내는 화력집중을 무시할 능력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이 쪽에는 무신의 딸 샤오메이와 공주기사 아그네스, 그리고 거인 살해자인 마리안느 누님이 있지 않았는가.
어쩌면 오지에 자신의 손으로 거인의 목을 베어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유리하게 흘러갔던 상황은, 저 사악한 리치가 마법으로 헤카톤케일을 보조하기 시작한 순간 뒤집히기 시작했다.
“함대에 좀 더 포격으로 두들겨 보라고 요청해! 우리의 힘만으로는 저 세 사람이 유효타를 먹일 수 있도록 길을 여는 건 무리야!”
“안 됩니다! 저 시체거인에게 방호 마법이 걸린 이후로 함대의 사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몇몇 배가 저 방호 마법을 뚫으려다가 함포들이 과부하로 작동 불능 상태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결국 퍼플크로우의 마녀 말고는 지원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사실 오지에도 화력부족이 단순히 함대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 이런 부족한 전력으로 여전히 지원이 이어질 수 있께 만드는 대마녀의 후예야 말로 자신의 누님처럼 괴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 전장에서 그것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 자신들의 분투에 수백 명의 목숨과 인류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용사와 성녀, 그의 동료의 목숨까지 걸려있다.
아니, 그걸 제외하더라도 이 전투에서 몰살당하는 순간 왕국은 젊은 후계자 둘을 잃게 된다. 그 뒤에 올 혼란은 무관 성향이 강한 아버지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리라.
‘생각 해! 어떻게 해야 상황을 역전 시킬 수 있지? 최소한, 최소한 누님과 아그네스만이라도 탈출을 시켜야 할 텐데.’
자신들이 목숨을 건다면, 후방의 배들 중 일부라도 탈출할 시간을 벌 수 있을까?
아니, 북부 교단의 배가 성역과 성가법술을 거두고 이 해역에서 물러나는 순간 와일드 헌트의 마기가 자신들을 좀 먹기 시작할 것은 분명하다. 애초에 사제들의 축복과 법술 없이는 1분 이상도 시간을 벌지 못할 것이다.
‘누님만 탈출 시킬 수도 없어. 일부 VIP만 탈출 시키려고 하면 반발이 심하고 사기도 꺾이겠지, 탈출은, 탈출은 무리야...’
문득 전장을 보며 고뇌하던 오지에 왕자의 시선이 리치와 용사를 향했다.
지금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전장에서 가장 분투를 하고 있는 것은 저 용사임이 틀림없다.
군단장을 넘어 거의 마왕군의 권속급 간부나 남부교단의 초월자들과 같은 힘과 마법을 행사하는 리치를 상대로 발을 묶고 있는 덕에 이 전장이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으니까.
“젠장! 용사 쪽으로 보낼 수 있는 인원이 단 1명도 없는 거야?!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 테니까, 샤오메이, 아니 아그네스라도 보낸다면...”
“무리입니다 왕자님! 지금도 마리안느 왕녀님과 저 두 분이 계시니까 버틸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저희들의 상태로는 그 공백을 메꾸지 못할 테고요!”
“씨발! 그럼 어쩌자고, 몽마에게 끌려간 아르틴 루드비히가 나오기만 기다리라고?!”
거인의 일격을 다시 간신히 막아낸 오지에가 악에 받쳐 외치자 전사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기가 절호조에 달했던 기세가 꺾이게 된 것이 다름 아닌 저 아르틴 루드비히가 릴리트에게 끌려가게 된 이후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단순히 호색한, 혹은 문제아, 유망주 정도로만 여겨지던 용사의 동반자가 군단장 셋을 상대로 전략을 입안하고 사람들을 지휘하며 무력으로 압도했다는 사실을 이제 같이 싸운 모든 이가 알 게 되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일찍이 장미관에서 했던 것처럼, 아르틴 루드비히가 저 몽마여왕의 권능을 이겨내고 전장에 합류하는 것만이 이 전투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을.
참담한 심정이었다. 누님을 나쁜 길로 물들이는 호색한이라고만 여겨 멸시했던 이에게, 이제는 제 목숨과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들의 목숨을 맡겨야 한다니, 왕국의 전사로서 긍지를 가지고 있던 오지에로서는 납득하지 못할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아까 아르틴이 엘드리치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며, 오지에는 일종의 경외의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그 탓에 전투에 순간 집중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수치심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타인의 전투에 심취하여 제 싸움에 집중하지 못하다니, 이보다 못난 전사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는가.
“명심해라! 우리는 왕국의 건국자인 사자왕의 후예들이다! 이 심장이 터지도록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누군가에게 의지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긍지는 타인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쟁취하는 법이다!”
납득할 수 없다면 쟁취해내야만 했다. 또 다시 자신들을 향해 쇄도하는 일곱 쌍의 거대한 팔을 오러 블레이드, 검강을 뽑아 쳐내며 오지에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누구보다 앞장서서 헤카톤케일과 맞서 싸우는 누님과 여인들의 뒷모습을 보며, 오지에는 마음을 굳혔다.
보조로는 서서히 말라 죽어갈 뿐. 길을 열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왕국의 전사들이여! 오늘 우리는 긍지 있게 죽는 법을 택한다! 아르틴 루드비히의 빈자리를 목숨으로 채운다고 생각해라! 사자의 후예는 피로써 긍지를 지킨다!”
오지에 스스로도 자신이 아르틴의 빈 자리를 메꿀 수 있을 거라는 생각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검을 움켜쥐고는 얼어붙은 바닷물을 박차고 누이의 곁으로 뛰어올랐다.
백 개 이후로 세지도 않으며 헤카톤케일의 팔과 머리를 베어내던 마리안느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당황한 표정으로 오지에를 바라봤다.
“...오지에?”
“돌아가란 말은 하지 말아요 누님, 누군가는 길을 열어야 하니까. 나 말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되겠어?”
“길을 열겠다니, 너 그게 무슨...”
“제1 후계자인 누님이 앞장서는데 내가 뒤에 있어서 되겠어? 누님이 요즘 그 호색한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지만, 누님의 친동생은 그 놈이 아니라 나라고.”
자신 또한 사자다. 먼 옛날 사자왕이라 불린 레크투르 왕가의 시조의 피를 이은 존재.
그러니 아르틴 루드비히나 누님처럼 강한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용맹함에 뒤쳐져서는 안 된다.
“따라와요 누님, 나랑 전사들이 전력으로 길을 열어볼 테니까!”
“야, 잠깐 오지에! 그만두고 물러ㄴ...”
마리안느가 만류하려는 찰나, 오지에가 누구보다 용맹하게 앞장서 시체거인의 수많은 머리를 향해 뛰어올랐다.
“보아라!! 내가 바로 왕국의 왕자, 오지에 드 레크투르다!!!”
──서걱!
거친 칼소리와 함께 헤카톤케일의 목 하나가 잘려나갔다.
으레 목을 잘랐을 때 따라오는 피분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고대부터 말라비틀어진 시체에 남은 체액 따윈 존재치 않았기 때문이다.
“해냈다! 하나 잘랐ㅇ...”
그 말은 아직 수 백 개가 넘는 스페어가 있는 머리가 약점이 될 수 없다는 소리였기에, 허공에서 마나를 분출하여 공중기동을 시도하던 오지에는 헤카톤케일이 대충 휘두른 30여개의 손바닥에 급격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파앙! 경쾌한 파공음과 함께 오지에의 몸이 바다에 쳐박혔다. 오지에가 만들어낸 5m 짜리 물보라를 보며 마리안느가 당혹감이 서린 눈으로 그 자리를 내려다봤다.
“방금 뭐였어 왕녀?! 사람 하나가 앞에 나갔다가 떨어진 것 같은데?!”
“...시, 신경 쓰지 마. 명줄은 나보다 질긴 못난 녀석이니까 괜찮을 거야. 서둘러! 천마나 카이엔 쪽은 더 버티기 힘들 거야!”
샤오메이의 다급한 외침에 마리안느는 다시 헤카톤케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 편으로는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 동생이 호승심에 날뛰는 모습을 아르틴에게 보였다면, 진지하게 오지에를 가계도에서 파내야 할지 고민해야 했을지도 몰랐으니까.
*
[이제 끝인가? 용사라는 이름에 비해 별로 대단한 실력도 아니군 그래.]
아르틴이 전장에서 사라진 지 15분.
피투성이가 된 카르엔을 내려다보며 엘드리치가 조소했다.
“...아직이야. 아직...”
[설마 아직도 아르틴 루드비히를 기다리는 건가? 이거 참 눈물겹군. 허나 포기해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의 공포에 압도당해있던 리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여유.
허나 그 여유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네놈은 절대로 날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아르틴 루드비히는 제 시간에 돌아오지 못한다.]
[너희의 시체와 피로 이 바다를 가득 채우고 나서야, 그 모습을 드러내겠지.]
확신, 그 확신이 엘드리치가 죽음의 공포를 망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니, 오히려 돌아오는 편이 우리에겐 좋을 지도 모르지, 릴리트가 그 괴물 녀석을 완전히 타락시켰다는 뜻이 될 테니까 말이야.]
“뚫린 입이라고, 혓바닥도 없는 해골 주제에 잘도...!”
[그러니 좋은 제안을 하나 하지. 용사 카이엔 실버소드.]
“..제안?”
[그래, 제안. 아주 훌륭하고도 매력적인 제안 말이다.]
허나 망각 정도로는 부족하다. 감히 자신에게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게 만든 인간들에게, 엘드리치는 완전한 굴욕과 패배를 선사해야만 했다.
수 백 년 만에 느끼는 이 불쾌한 분노와 굴욕감을 씻기 위해선, 단순한 승리로는 부족할 테니 말이다.
“마왕군에 들어오라는 같잖은 말이라면 집어 치워, 나는 너희에게 굴복하지 않으니까!”
[투항? 내가 왜 네녀석을 투항시키리라 생각하는 거지? 고작해야 군단장하나 이기지 못하는 버러지 용사를?]
“...?”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르엔을 보며, 엘드리치는 해골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오만하고도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이 자리에서 자결해라 용사. 그 하찮은 긍지와 절개를 직접 보고 싶단 말이다.]
“...뭐?”
[만약 용사로써 이 자리에서 죽음을 선택한다면, 저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은 전부 살려주도록 하지]
엘드리치의 시선이 다른 군단장과 맞서 싸우는 이들을 향해 옮겨졌다. 그 뒤에 있는 후방의 배에도.
부상자와 사제들을 태운 함선들, 학생들과 교직원이 타고 있는 가련하고 먹음직스러운 장난감들.
[거부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철저하게 전부 죽이겠다. 선택해라 용사여.]
엘드리치가 생각하기에, 이 유희는 꽤나 즐겁고 유쾌한 복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