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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262화 (262/266)

〈 262화 〉 용사가 아닌 자#04

* * *

갑자기 싸우던 적에게 자살을 권유받은 카르엔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반응이야 말로 엘드리치가 가장 원하던 반응이었기에 즐거움을 감추지 않고 카르엔을 지켜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너 하나의 목숨으로 여기 있는 전부를 살릴 기회. 이런 관대한 제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가 아닌가?]

“...지금,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진심으로 제안했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애초에 상대방은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카르엔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 순간 용사의 영혼을 수확한 후 모독하려는 속셈이 뻔히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바보 같은 제안, 절대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거든.”

이 짧은 틈, 육체에 잠깐이나마 휴식을 줘 여유가 생긴 카르엔이 성검을 들어올렸다. 검 끝에서 피어오르는 신성력은 여전히 그녀가 용사라는 것을 고고히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가? 그거 참 이상하군.]

허나 엘드리치는 그런 카르엔을 비웃었다.

[자신에게 기생하고자 하는 저 버러지들을 최대한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 용사라는 존재는 늘 그런 존재가 아니었나?]

엘드리치의 손가락이 학생들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하자, 카르엔은 감각을 끌어올리며 당장이라도 날아올 마법을 베어내고 쳐내기 위해 준비했다.

하지만 뒤이어 오는 마법의 연사 따위는 없었다. 일반인은 감당하지 못할 막대한 마나로 방어 마법을 펼치는 카르엔을 향한 것은 엘드리치의 시선뿐.

[봐라, 지금도 저 기생충들을 지키기 위해 네 마나와 힘을 낭비하고 있지 않느냐?]

“...”

[불쌍한 것, 만약 저 기생충들이 없었다면 네게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엘드리치가 말한 불쌍하다는 말도, 승산이 있을 거란 말도 진심이었다.

아르틴 루드비히가 사라진 후 전투양상은 놀라울 정도로 대등하게 흘러가고는 했었다.

[실제로 너는 몇 번이나 내게 치명상을 입힐 기회가 있었지, 인정하겠다. 너 또한 아르틴 루드비히 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괴물 같은 전사라고.]

신체적인 힘이나 마나양만을 따진다면 그 아르틴 루드비히를 뛰어넘는다고 해도 좋았다.

일개 용사 따위가 아니라 드래곤 로드가 폴리모프를 한 것이라고 해도 설득력이 있는 피지컬과, 고도로 단련된 전투 기술들, 월등한 신성마법과 정령술까지.

눈앞의 용사가 1:1이었다면, 그리고 자신이 마왕의 권능을 전부 해방하지 않았다면 엘드리치는 이 자리에서 패배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가식적인 연극은 언제까지 할 셈이냐? 그 하찮은 기만이 네 목숨보다 중요한가?]

“..뭐?”

[이제 그만 슬슬 그 추악한 얼굴을 드러내봐라. 가짜여.]

─키이잉!

순간, 엘드리치의 손끝에서 한 줄기의 푸른 섬광으로 이루어진 마법이 쏘아져 카르엔을 향해 쇄도했다.

“칫, 얕은 수를!”

갑작스러운 기습, 하지만 그 마법에 담긴 마기의 양은 많지 않았기에 치명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카르엔이 드래곤의 마법 저항력으로 간단히 막아내려고 했다.

욱씬, 그 순간 카르엔의 뇌리에 불길한 직감이 스쳐지나갔다. 자신의 빈틈을 노린 공격이, 고작해야 마법저항력으로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라고?

“...!!”

카르엔이 마법으로 공간을 도약해 푸른 섬광을 피하자, 섬광은 이내 힘을 잃고 흐느적거리며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녀의 뒤에 있던 함선까지도 닿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은 확실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저 마법을 몸으로 막아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

“뭐, 뭐야. 방금 그 마법은?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 한 거야?”

[별거 아니다. 그냥 아주 간단한...변신 해제 마법이었지.]

──카르엔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자, 엘드리치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 언제부터..?”

[언제부터라, 신체와 합일이 되지도 않은 검술로 내 검을 맞받아 칠 때? 아니면 싸우는 도중 가끔씩 보인 신체 불균형에 의한 빈틈을 파악 했을 때?]

“너, 너...!!”

[그게 아니라면...그래, 남자였던 용사가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암컷의 눈으로 아르틴 루드비히를 힐끔힐끔 쳐다볼 때겠지?]

“그 입 다물어!!”

카르엔의 검이 수십 갈래로 흩어져 엘드리치를 향해 쏟아졌다. 카르엔이 품은 감정의 동요만큼 검의 정밀함도 무너졌으나, 그에 반해 살의와 날카로움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그래, 바로 이런 점이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주제에 본 모습을 감추고 전력을 내지 않는 교만함! 제 치부를 들키자 드러나는 송곳니!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이기적인 판단을 내리고 말지!]

“닥쳐...!”

[카이엔 실버소드! 너는 좋은 전사고 뛰어난 검사다! 하지만, 너는 용사에는 부적합하다! 네 행동원리는 희생이 아니라 개인적인 욕망에 기원하기 때문이다!]

“그 입 닥치라고 했잖아!!”

비명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휘둘러진 성검과 명검. 양 끝에 맺혀진 눈부신 신성력과 끝을 모르는 마나는 일합으로 백의 마족을 베어낼 정도로 흉흉한 기세였다.

[그러니까, 빈틈이 많다고 했을 텐데!]

“커흑!?”

공격을 전부 파훼한 엘드리치가 거대한 손아귀로 카르엔을 후려쳤다.

카르엔은 간신히 두 검을 교차해 막아낸 덕에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으나 공격당한 흉부 쪽에서 우득 하고 무언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제 검이 금이 간 것일까, 아니면 몸 안의 뼈가 금이 간 것일까. 뭐가 되었든 지금 이 상황에 있어서는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상하지 않나? 너에게는 모두를 구하겠다는 패기도, 망집에 가까운 자기희생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봐온 용사들은 모두 그런 존재인데 말이지.]

[목숨을 걸고 싸워야할 순간에 제 모습을 감추는 것을 우선시 하고, 제 목을 걸고 모두를 구해내려는 고민조차 없다.]

[오히려──아르틴 루드비히가 더 용사에 어울리는 것 같던데 말이야. 정말로 네가 용사가 맞는 거냐? 카이엔 실버소드?]

──삐이이, 너무 격한 움직임 탓인지, 아니면 방금 막아낸 충격 탓인지 이명이 카르엔의 귓가를 가득 채웠지만 저 리치의 정신파는 이명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궤변, 모순 덩어리, 들을 가치가 없는 말들. 그렇게 외면하고 싶어도 카르엔은 저 말들을 무시할 수가 없다.

무어라 반박하려고 해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니, 입을 연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저 말들은 사실이었으니까.

*

불의를 거부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무시하지 않으며, 정의와 선행을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그런 자, 본래 카르엔은 그런 사람이었다.

물론 힘이 없는 정의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나, 우연한 기연으로 드래곤의 힘을 손에 넣은 카르엔이 행하는 정의는 확실한 신념이었다.

당연히 주변에서는 자신의 명성과 선행을 찬미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용사 카르엔의 영혼은 말라비틀어지고 있었다.

“마수들을 무찔러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희 가족의 삶의 터전을 지킬 수가 있었어요!”

“하찮은 농민들의 반란을 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흑마법사와 손을 잡다니, 밥 좀 굶는다고 그런 사악한 힘을 손 댄 자들은 멸족을 시켜야지 않겠습니까!”

“고맙네! 자네 덕분에 저 더러운 수인 놈들을 쫓아낼 수 있었군. 마왕군의 내통자? 저 털 달린 놈들이라면 당연히 마족들 편을 들겠지! 증거가 필요하겠나?”

마왕군의 공세가 거세질수록, 의로운 자들은 점점 죽어나갔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카르엔의 곁에 남는 것은 보신주의자와 탐욕에 찌든 자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를 지탱해주는 선인들이 없던 것은 아니다. 허나 자신을 이용해 제 잇속을 채우며 정의를 모독하는 탐욕스러운 영혼들을 볼 때 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자신을 자각할 때 마다 카르엔은 스스로 죽어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타살이자 자살이었다. 타인에 의해 받은 고통을, 스스로의 감정과 마음을 죽임으로써 견디고자 했던 방어기제와도 같았으니까.

결국 카르엔의 내면은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해져만 갔다. 그나마 남아있던 선의와 의무적인 책임감으로 기계적인 선행만을 행할 뿐. 그 끝의 결말은 마왕군의 도래였다.

허나 여신은 카르엔에게 안식을 주지 않았다. 문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희미한 기억으로 자신이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아...아아...”

처음에는 기뻤다. 구하지 못했던 사람들, 무지에 의해 죽어가야 했던 사람들을 다시 구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과거를 곱씹으며 미래의 계획을 세울수록, 카르엔의 머릿속은 더없이 복잡해져갔다.

‘누구를 믿고, 누구를 쳐내야 하지?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전보다 많은 피가 흐를지도 몰라. 제국의 귀족들은 부패했고, 왕국의 귀족들은 무능해. 공화연방의 화족들은 탐욕스러워, 도대체 누구를...’

희미한 선의와 뚜렷한 악의, 그 사이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카르엔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사람을 믿고 싸우는 용사였지, 누군가를 의심하는 천성은 배우지도 못했고 재능도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한줄기 빛이 내려졌다.

“기억해, 너는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알았지 파트너?”

아르틴 루드비히, 그 남자를 만나고 나서 카르엔의 삶은 바뀔 수 있었다.

“이 바보야! 그 녀석들은 널 이용하려는 거라니까? 도와주지 말고 손절해!”

“거기서 사람을 보호하면 어떡해! 그러다가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너부터 좀 챙겨!”

자신이 의심하고 거부했음에도 끝없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던 남자.

자신이 곁에 남기 위해 피를 토하고 뼈를 깎아가며 노력하던 남자.

자신이 올곧이 용사로 남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한 사람.

아르틴이 곁에 있었기에, 카르엔은 순수한 용서로써 선행을 행하고 맞서 싸울 수 있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압박감에서 벗어나게 되자, 카르엔은 처음으로 제 앞을 지켜주는 듬직한 등을 인식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까지, 나를 위해서 해주는 거야?’

그 포근하고 듬직한 등에 기대면서, 카르엔은 새로운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어째서 나를 위해 이렇게 까지 하는 걸까.

어느 날 의구심을 이겨내지 못한 카르엔이 직접 물어보자, 아르틴은 조금 고민을 하다 대답했다.

“그야, 내가 용사의 파트너니까 그렇지. 별 다른 이유가 필요하겠어?”

어쩌면 아르틴은 별 다른 고민 없이 했던 말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빙의자이자 회귀자라는 사실을 밝히기 싫어서 적당히 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르엔에게 저 대답은 다르게 다가왔다.

‘용사. 그래, 아르틴이 내게 이런 호의를 보여주는 건...’

카르엔은 특별했다. 비록 그것이 그녀가 바란 쪽이 아닐지라도.

그리고 아르틴의 호의가 용사와 파트너라는 관계로 성립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특별함은 카르엔에게 족쇄가 되었다.

선행을 베풀고 악인을 벌하자, 정의를 행하고 마왕과 맞서 싸운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무리해서라도 구해내고 도리를 위해서라면 불가능한 일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

싸워야 한다. 행해야 한다. 이루어야 한다. 용사니까. 용사가 아니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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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용사의 비밀

당신은 여신에게 선택받은 이 세계를 구할 용사입니다.

해당 상태창은 그런 당신을 위해 주어진 권능, 허나 이를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정체를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용사의 권능은 회수되고 말 것입니다.

퀘스트 조건 : 누구에게도 자신의 과거와 상태창을 들키지 말고 마왕을 처치할 것.

퀘스트 실패시 패널티 : 용사의 자격 소멸, 상태창의 회수.

퀘스트 완료시 보상 : 여신의 권능으로 들어줄 수 있는 원하는 소원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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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의 소멸. 처음에는 스스로 택할까도 고민했던 저 선택지가, 지금은 죽음보다 두려운 처벌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선행을 해도 크게 즐겁지 않았다. 목적이 수단이 되어버렸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용사가 되기 위해 훈련한 것도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가며 엘드리치와 맞서 싸운 게 아니었다.

남자의 몸으로 돌아간다면 엘드리치와 더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허나 카르엔은 여성의 모습을 고집해가며 싸웠다.

‘내가 왜? 지금의 모습이야 말로 내 진짜 모습이고 사랑받는 모습인걸.’

혹시라도 아르틴에게 남자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을 들킨다면?

그 모습에 백일몽에서 깨어난 아르틴이, 자신과의 교제를 거부한다면? 혹시나 자신의 눈앞에서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느낄 절망감이 카르엔은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그렇다고 제 모습을 밝혔다가 용사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도 무서웠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두려웠다. 아니, 어쩌면 아르틴이 중요한 일을 결정해주는 삶에 익숙해져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 등을 쫓다보니 스스로 걸을 힘을 잃은 것만 같았다.

──사실 자신이 원해온 것은 줄곧 하나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선 무엇 하나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꼴 사나운 표정이군, 스스로 역겨운 사람임을 드디어 인지한 건가?]

스스로를 자책하며 절망감을 느끼는 카르엔을 보며, 엘드리치는 조소를 금치 못했다!

그래, 저런 하등한 존재들에게 어울리는 표정은 저런 것이다. 절망과 좌절, 공포와 슬픔 따위들.

건방진 인간들이 제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던 것 자체가, 사실 순리를 벗어난 일이 분명하다.

[추하다. 제 목숨을 걸고 싸우지도 못해, 제 목숨을 희생해 살리지도 못할 거라면...이 손으로 죽여주는 게 빠르겠지.]

“...큿?!”

엘드리치의 손톱이 카르엔의 머리를 노려 휘둘러졌다. 이에 카르엔이 다급하게 검을 휘둘러 막아내자, 파직! 하고 다시 한 번 금이 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긍지도! 신념도! 하다못해 집념도 없는 버러지 따위가 내 앞을 가로 막지 말란 말이다!]

쾅! 쾅! 쾅! 칼날과 손톱이 부딪힐 때마다 굉음이 퍼져 바다에 울려 퍼졌다. 카르엔의 검이 간신히 공격들을 막아내었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쩌엉!

그리고 마침내, 검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 성검이...?”

부러진 쪽은 성검 엘렌다르. 언제나 신성한 빛을 고고히 내뿜던 교단의 성물이, 리치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두 동강이 나고 만 것이다.

엘렌다르는 지난 4번의 생에도 단 한 번도 깨지지 않던 신념과도 같은 검이었으나, 지금은 그 검에서 찬란하게 피어오르던 신성력마저 흐트러지고 있었다.

[크하하하! 이제는 성검마저 잃었나? 성검이 없는 용사라니, 대단한 용사가 아닌가!]

카르엔이 절반이 부러진 성검을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과거부터 용사로서의 증명이며 긍지로 쓰였던 성검이, 박살난 것이다.

──더욱 비참한 것은, 자신이 평점심이 흐트러졌기에 성검이 부러졌다는 사실이었다. 평정심만 잃지 않았더라면 저 군단장의 공격을 검이 홀로 버텨내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왜 그러지? 왜 가만히 부러진 검을 바라보고 있는 거지? 덤벼라! 그 추악한 위선의 가면을 쓰고 용사로써 죽어라! 그러면 적어도 다른 인간들은 계속해서 널 용사로 기억해주지 않겠느냐!]

충격에 빠진 카르엔의 내면에서 좌절감이 기어올라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부러진 성검이라도 휘둘러야 하나? 아르틴이 준 검 하나 만으로 싸워 이길 수 있을까?

"멍청한 필멸자 녀석,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느냐? 그래서 누구와 같이 싸우겠다고 나서는 건지."

[...?! 누, 누구냐!?]

그 때, 허공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엘드리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단순한 여인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격과 존재감은 남부교단의 초월자들과도 비교가 안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건방지구나, 감히 짐에게 그런 태도라니, 백만번 정도 죽여야 그 죄를 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찌이익, 현실의 공간이 찢어지며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수공간에서 몸을 숨긴 채 아르틴을 기다리던 여인이.

[메, 메피스토펠ㄹ....!]

"그 입을 다물어라, 네 하찮은 입으로 불러서 될 이름이 아니니. 지금은 그저 위대한 대군주라고 칭하거라."

지옥의 대군주, 왕위 찬탈자, 지옥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

메피스토펠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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