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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263화 (263/266)

〈 263화 〉 용사가 아닌 자#05

* * *

오랫동안 전장을 구르며 경험을 쌓아온 전사라면 누구나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전장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것이라고.

그 말은 허언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생명을 불태우고 또 꺼지는 전장이야 말로, 가장 강렬하게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생명체나 다름없다.

그러한 전장의 생명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흐름을 바꾸거나 주도하는 개인은 있을지언정, 전장의 흐름을 끊어내는 개인은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

“...”

“....”

허나 지금 이 순간, 가장 맹렬하게 타오르던 전장이 그 숨을 멈췄다.

제국의 기사들과 왕국의 전사들을 박살내며 후방을 향해 전진하던 이성이 없는 괴수도.

개인으로 쌓을 수 있는 무의 정점에 도달하여, 단신으로 군단장과 혼을 깎는 싸움을 이어가던 천마도.

후방에서 얼마 남지 않은 포탄을 장전하기 위해 남은 마나를 쥐어 짜내던 마법사들도.

모두가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는 전장의 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루하다.”

갑자기 나타난 그것은 전장의 누구보다도 나약하게 보였다.

형체는 인간의 것이며, 목소리는 계집의 것이고, 모습은 어린 아이와 같다.

그것을 얄팍한 껍질과도 같았다. 그녀를 감추고 보호하는 껍질이 아니다.

“이런 하찮은 싸움에 짐을 귀찮게 하다니.”

그 껍질 안의 것을 전부 드러낸 것이 아니란 것은 이곳에 존재하는 모두가 인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영혼이 소유한 존재감. 그중의 극히 일부만을 스스로가 드러냈을 뿐이다.

허나 그것은 일개 필멸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하늘에 나타난 끝도 없는 심연, 그 안으로 혼과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감각.

눈앞에 강림한 절대성을 이해하지 못한 필멸자들의 뇌는 생각을 멈추고 단 한 가지 감정만을 떠올린다.

공포. 생명체가 가지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

“전능하신 여신이시여 저희를 은총으로 보호하시옵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여 영원한 천국의 땅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이 죄인을 버리지 마──”

평생을 여신의 종을 자처하며 가장 밝고 찬란한 신앙심을 가졌다는 이들조차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절망에 빠져있었다.

“아아...아아아...우리의 죽음이 인세에 강림했다...”

“위대한 대악마의 단면 하몬이시여! 그 위에 군림하는 마왕님이시여! 저희를 저 존재로부터 지켜주시옵소서!”

마왕군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여신과 죽음을 부정하는 존재인 불사의 해적들은 물론이고, 군단장들조차 제 존재가 눈앞의 그것에 의해 소멸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제는 모두가 안다. 그녀가 왔다. 그녀의 일부가 이곳에 강림했다. 그녀가 자신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여신에 가장 가까운 격을 지닌 자, 계약을 모독하는 자, 가장 낮은 곳의 가장 높은 곳에 군림하는 자.

“시시해서 죽고 싶어질 정도구나.”

지옥의 여주인, 메피스토펠레스가 강림했다.

*

엘드리치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불운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였다.

[───]

바로 눈앞에 그 최악의 대악마가 강림했다. 그것도 스스로의 격을 온전히 뽐내는 대악마가.

‘도대체 어떻게...? 제국의 수도를 전부 제물로 바친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본인들만 해도 ‘격’을 잃고 쓰러진 마왕의 부활을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정성과 노력을 다했던가, 하물며 대악마를 온전히 현세에 강림시키는 것을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아니다. 녀석들에겐 방법이 있다.’

마녀, 최초로 악마와 계약해 힘을 손에 넣은 부정한 것들. 그 중에서도 대마녀의 손녀가 저들 중에 있다는 것은 마왕군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마녀가 있다고 하더라도 가능성은 0에 가까운 일이지만...불가능은 아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온전한 상태인 거지? 왜 바로 날 죽이지 않는 거지? 유희인가? 아니면 권태? 내가 만약 덤빈다면...얼마나 승산이 있는 거지?’

저 대마녀의 손녀라 불리는 부정한 여인이 얼마나 재능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가 메피스토펠레스의 10%, 아니 5%, 하다못해 1% 밖에 불러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스스로 금언의 계를 걸어 조용히 하거라.”

[...!]

메피스토펠레스와 눈을 마주치는 찰나, 엘드리치는 자신도 모르게 침묵의 마법을 다중으로 시전하여 스스로에게 걸고 말았다.

아니, 혹시 몰라 눈앞의 대악마의 주변에 잡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결계까지 펼쳤다. 이 묵언의 공간을 통과할 수 있는 소리는 존재치 않은 것이며, 그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오지도 못할 것이다.

이 모든 노력은 단 하나. 그 시시하다는 눈빛만으로도 자신의 혼을 태워버릴 것 같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존재감을 엘드리치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왕군 전원에게 전한다. 절대로 먼저 움직이지 마라.]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엘드리치가 마왕군 전언에게 텔레파시로 지시했다.

[이건 재앙이다. 재앙에 저항하려는 무가치한 행동은 하지 마라. 다행히도 저 메...]

그녀가 엘드리치에게 이름을 말할 권리를 허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엘드리치는 살가죽이 없음에도 닭살이 돋는 감각을 느꼈다.

[...위대한 대군주가 아직은 적의를 보이지 않는 듯하니, 고개를 숙여라. 시간은 우리의 편이니 시간을 최대한 벌어야 한다.]

대악마의 힘이 무한하지 않는 이상, 이 공간에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일 것이다.

그 사실에 동감한 모든 마왕군이 공세를 멈췄다. 폭풍이 지나가길 바라며 낑낑대는 들짐승 같은 모습이었지만, 누구도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비웃을 수는 없으리라.

*

“...방금 그건 어떻게 한 거야?”

카르엔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대악마가 보여준 ‘격’의 편린은, 3회차 당시 분노에 미쳐 힘을 개방한 바이올렛이 이단심문소를 불태울 때나 볼 수 있던 수준.

“아르틴의 안배였어? 아니면 바이올렛의 힘을 끌어다 쓴 거야?”

아니, 아무래도 좋다. 이 정도의 힘이 있다면 머뭇거릴 것이 없었다.

자신의 성검이 없다 해도, 방금 보여준 힘을 사용한다면 저 마왕군을 전부 쓸어버리고도 남을 터.

“지금 당장 저 놈들을 해치우고 아르틴을 구하러 가자! 릴리트에게 잡혀가긴 했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진 않았으니까, 아르틴의 정신력이라면 분명...!”

“아, 그건 무리다 반푼이용사여, 방금 그걸로 가진 힘을 전부 소모했으니 말이다.”

“뭐?”

엘드리치가 침묵의 결계를 유지한 채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을 확인하자, 메피스토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나른하게 하품을 내뱉었다.

“방금 짐의 ‘격’을 보여주느라 반푼이 마녀와 아르틴에게 받은 힘을 전부 써버렸단 말이다. 짐의 격을 보여주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알았느냐?”

“...뭐? 뭐라고?”

조금 전 메피스토가 한 것은 몸을 쭈그리고 있던 거인이 기지개를 편 것과 같은 일이었다.

웅크린 몸을 쭉 펴고 팔을 뻗는 것처럼, 웅크리고 있던 영혼을 펼치는 것. 그 과정에서 흘러나온 존재감만으로도 이 전장의 모든 존재가 그녀의 기백에 압도당한 것이다.

문제는 그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시스템이 보장한 그녀의 한계와 지옥의 계약서가 보증한 알‘미라즈의 보증인의 강림을 전부 사용한 것이 되어버린 셈.

“왜 그런 멍청한 짓에 힘을 전부 소모한 거야!? 그런 힘이 있다면 유효타라도 먹였어야지!”

“그래? 짐이 보기에는 짐의 존재로 인해 전투가 잠시나마 멈춘 것처럼 보인다만.”

“...그, 그건.”

맞는 말이다. 아카데미 측의 전력은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사실 전선은 진작 무너진 상태와 같았다. 초반의 선전 덕에 저 흉측한 시체골렘이나 타락한 옛 신의 발을 묶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선을 버티는 것조차 기적에 가까웠다.

아니, 군단장을 상대하는 와중에도 전사와 기사들을 엄호해준 천마와 죽은 이조차 살린다는 성녀의 기적, 끝을 모르고 쏟아지는 바이올렛의 마법과 전투 내내 하늘을 날아다니며 축복을 노래하던 천사들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벌써 모두가 죽고도 남았을 상황이다.

“애초에, 지금 이 상황은 용사 네 녀석이 무력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더냐?”

“...”

“아르틴은 용사의 동반자지 용사가 아니다. 그런 아르틴이 네가 할 일을 대신해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으면 용사인 네 녀석은 제 몫이라도 다 해야 할 텐데.”

메피스토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산산조각이 나 신성력이 점점 옅어지는 성검의 파편들이 처량하게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이제는 성검도 잃고, 군단장에게 언쟁으로도 패배한 비참한 모습이라니, 차마 눈 뜨고 봐주기도 힘들구나.”

메피스토의 시선이 카르엔을 향하는 순간, 카르엔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격이 높아서가 아니다. 메피스토가 지옥의 대악마라서도 아니다.

──이 비참한 모습을 보는 상대가 아르틴의 순수한 사랑을 받는 여인이라는 사실이, 카르엔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뭐, 잘 됐구나, 이제 그 같잖은 용사 놀음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니...”

“닥쳐.”

“...?”

메피스토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저런 말을 직접적으로 들어본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터라 그 뜻을 이해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려야 했다.

“지금, 뭐라고──”

“내가 용사가 아니면 뭔데!? 아르틴의 곁에 계속 서 있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네가 뭐라고 감히 내 노력을 폄하해?”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차가운 표정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슬퍼 지금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물론 갑자기 자신에게 징징대는 카르엔을 본 메피스토가 아주 오랜만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카르엔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용사가 아니면 내가 뭘로 아르틴의 곁에 있을 수 있는데! 내 존재는 가치는 오로지 용사일 뿐인데! 아르틴에게 도움이 되려면, 아르틴에게 가치 있으려면 그게 전부인데! 이제 제대로 된 용사도 되지 못한다면, 내가 도대체 뭔데...?”

부르르르 카르엔의 눈썹이 떨렸다. 지난 15년간 한 번도 아르틴을 지켜내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으로 인해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무서웠어...전력을 내기 위해 남자의 모습으로 변한 것을 아르틴에게 들킨다면, 어떤 혐오 섞인 눈빛을 봐야 할지 무서웠다고! 나는, 나는...!”

‘왜 이 계집은 나에게 어리광을 피우는 거지?’

메피스토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스로가 무능한 것을 왜 자신에게 울분을 토해낸단 말인가?

그렇게 힘들면 그냥 자살하고 다음 생이나 노리라고 독설하고 싶었지만, 메피스토는 이전에 아르틴이 자신에게 했던 부탁이 떠올랐다.

­“메피스토, 만약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내 사람들을 지켜줘. 알았지?”­

­“응? 내가 왜? 어차피 천년도 못 살고 죽을 녀석들은 그냥 죽게 두면 되지! 너랑 나랑 단 둘이 알콩달콩하게 살면 되잖아!”­

­“...그러지 않으면 나 몰래 너랑 내 DNA로 호문쿨루스를 만든 메피스토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서?”­

­“...”­

그때 아르틴은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지만, 눈은 너무나도 무섭게 뜨고 있던 것을 떠올린 메피스토는 두려운 나머지 오금이 저려왔다.

요즘에서야 대전쟁 당시에도 느끼지 못했던 행복이란 감정을 맘껏 느끼고 있는데, 괜히 이 반푼이 용사가 이상한 짓이라도 한다면 아르틴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미워할지도 모른다.

“크흠, 조용히 하고 들어라 용사여! 네게 해줄 말이 있다!”

“...?”

그러니 뭐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메피스토가 카르엔의 말을 끊자 카르엔이 어느새 울먹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뭐라고 해야 하지?’

문제는 메피스토에게 공감능력은 아주 한정적이었고, 그 한정적인 공감능력은 오로지 아르틴을 향해서만 적용되고 있었다.

평생을 살면서 누군가를 말로 달래본 적도 없었기에, 메피스토는 난생 처음으로 하는 ‘달래기’라는 행위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아르틴은 사실, 그대의 남자 모습도 좋아하고 있었다!”

“...?!?”

그래서 그냥 남은 미약한 힘으로 카르엔의 욕망을 엿본 후, 그 욕망을 그대로 말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뒷감당은 아르틴이 하면 되는 일이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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