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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회귀자-264화 (264/266)

〈 264화 〉 용사가 아닌 자#06

* * *

“뿌드득. 빠드득.“

엘드리치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진작 이가 박살났을 정도로 턱에 힘을 주고 이를 갈아대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

“───!”

‘저 망할 계집들이...! 지금 이곳에 소풍이라도 온 줄 아나?’

자신에게 묵언의 결계까지 치게 만든 다음 뭔가 즐겁다는 듯이 떠들어대는 메피스토.

그리고 메피스토의 이야기를 들으며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카르엔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엘드리치는 영혼이 비틀리는 것 같은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내가 느낀 이 굴욕들을 되갚아줄 절호의 기회를 이렇게 놓쳐야 한다니...!’

직전이었다. 전선이 붕괴하기 직전, 용사가 타락하거나 꺾이기 직전.

어쩌면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이뤄져 극한의 환희를 선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절호의 기회를 갑자기 나타난 저 지옥의 대군주 때문에 놓친 것이다.

지금도 보라, 천마는 공세를 멈춘 사이 채비를 다시 갖추고 있으며 기사와 전사들이 사제들에게 치료를 받은 후 다시 진형을 수습하고 있다.

예감이 좋지 않다.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다른 두 군단장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여, 0에 한없이 가까운 가능성을 믿고 저 ‘위대한 대군주’를 기습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엘드리치는 의심하고 고민했다.

‘...침착하자, 성급할 필요는 없다. 가장 위험 요소인 아르틴 루드비히는 색욕의 권속에게 붙잡혀 있으니 저 대악마만 시간을 끌면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엘드리치가 전장에서 후퇴하지도, 혹은 도박수를 걸지도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릴리트가 아르틴 루드비히를 묶어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그녀에 의해 타락하고 몰락했던가, 그 수는 마왕군의 간부들 중에서도 복보적인 수준.

...물론 엘드리치도 아르틴 루드비히가 평범한 영웅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기에 긴장은 유지해야 했다.

홀로 군단장을 쓰러트릴 무력을 가진 것도 모자라, 천사와 악마를 동시에 전장에 강림시킨 존재는 역사를 따져도 저 자가 최초일 것이니까.

‘생각해보니 좀 짜증나는군. 왜 우리만...?’

자신들이 공격당하는 것에 불만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지옥의 대군주가 천사들의 편에 서서 싸운다니. 이건 좀 반칙 아닌가?

먼 고대에 벌어졌던 천국과 지옥의 대전쟁 이후로, 분명 천국의 주적 악마들이었을 텐데!

“───야 이 미친년아!!!”

그때, 하늘에서 들려오던 천사들의 성가 사이로 우렁찬 고함소리가 울려 퍼지자 엘드리치는 고개를 돌렸다.

전투 내내 가장 격렬하게 노래를 부르던 4장의 날개를 지닌 중위 품계의 천사가, 한손으로 제 몸 만한 하프를 움켜쥔 채 결계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드는 게 아닌가?

‘역시! 중위 품계의 천사라고 한다면 대악마의 이런 작태를 용납할 수 있을리 없지!’

이 정도로 강렬하게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지옥의 대군주다. 이는 여신에 대한 모독이고 전장에 이미 강림해 있던 천사들에 대한 모독일 터.

‘싸워라, 서로 싸우다 죽어라! 어느 한 쪽의 힘이 빠지기만 해도 바로 움직일 테니!’

엘드리치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지만 웃음소리는 꾹 참아야 했다. 입 다물고 있으라는 메피스토의 말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이 정신나간 악마가! 그렇게 힘을 낭비하면 어쩌자는 건데?!”

“왜 또 와서 난리지? 가서 부르던 동요나 마저 부를 것이지.”

“너 때문에 후배들이 겁먹어서 움직이지도 못하잖아! 힘이 아주 남아 돌아서 낭비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기라도 해?”

“뭘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냐? 고작해야 쥐꼬리만 한 힘을 보여줬을 뿐인데.”

콰득. 사르디엘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하프에서 기묘한 소리가 났다.

“그 토끼 악마가 지금 존재감 유지하느라 반 쯤 죽어가는 건 알고 있고?”

“그건 짐의 토끼가 아르틴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더냐? 기특한 일이지. 나중에 칭찬해줘야겠구나.”

“...후우, 좋아. 아무튼 숨돌릴 틈은 만들어 줬으니 뭐라 더 말하진 않을게. 그런데 지금 우리 카르엔 데리고 뭐하는 거야?”

휙, 사르디엘의 시선이 날카롭게 카르엔을 향하자 메피스토의 거듭된 기만으로 매우 들떠있던 카르엔이 시무룩해졌다.

“설마 용사를 타락시키거나 가지고 놀려고 나선 건 아니겠지? 우리 카르엔이 얼마나 민감하고 가녀린 데...!”

“사르디엘님, 메피스토펠레스는 저를 놀리거나 타락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지고 논게 맞았다. 하지만 메피스토는 사악한 악마답게 내색하지 않고 보란 듯이 사르디엘을 바라봤다.

“악마라고 해서 선의가 없는 줄 아느냐? 짐은 그저 아르틴의 친구를 도와줬을 뿐이다.”

“...그래? 그럼 뭐라고 했는데 그 무뚝뚝한 카르엔이 입꼬리가 승천하기 직전이야?”

“그, 그건...!”

카르엔의 얼굴이 이전에 아르틴을 함락시키기 위한 사르디엘의 작전을 들었을 때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 아르틴이 예전부터 저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그냥 성적 정체성과 사회적인 인식 때문에 용기있게 나서지 못한 거라고...”

“...뭐?”

사르디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천사님이 지상에 내려오신 직후 가장 먼저 한 게 저랑 아르틴의 남성 성애를 묘사한 거였죠? 혹시, 천사님은 이미 알고 계셨나요...?!”

“...뭐?”

그건 단순한 사르디엘의 취미이자 취향일 뿐이었다. 30년이 넘도록 두 사람을 관찰하며 상상한 망상의 나래이자 금지된 죄악을 그저 실제 작품으로 만나고 싶었을 뿐.

사르디엘의 아르틴공X카이엔수에 대한 열망과는 별개로 아르틴의 취향은 누구보다도 확호한 이성애자이자 거유 취향이었다. 여성의 가슴에 대한 부드러움을 추구하는 사람이 강철처럼 단단한 카이엔의 가슴에 성적인 호감을 느낄 리가 없지 않은가.

“어...그게...”

사르디엘이 메피스토를 보자, 대악마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카르엔을 바라본 사르디엘은 그 눈에서 순수한 갈망과 음습한 욕망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눈치 챘니? 들켜버렸으니 어쩔 수 없네. 아르틴은 예전부터 쭉 네게 호감이 있었단다!”

“정, 정말인가요!?”

“물론이지. 너희들의 수호천사인 나보다 아르틴을 잘 아는 사람이 또 있겠니?”

카르엔의 표정이 환희로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사르디엘의 입 안에 또 가득한 쓴 맛이 돌았다.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스스로 수십 년간 망상해왔던 아르틴X카이엔을 제 입으로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말하지 않았느냐? 짐은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짐’과, 이 ‘천사’가 확실히 보증할 테니 너무 우울해하지 말거라.”

“그, 그래...우리가 보증할 테니까...”

메피스토의 악마적인 속삭임에, 전투 내내 천상의 노래를 부르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사르디엘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들키면 엄청 혼 날거야. 어떻게, 어떻게 혼나는 거지...?’

사르디엘이 만들었던 동인지 중에는 BDSM과 관련된 동인지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낮에는 누구보다 신실하고 고결한 용사를 괴롭히는 아르틴.

황녀와 정치적인 밀회를 나누고 온 카이엔에게 벌을 주는 아르틴.

그 외에도 말로 표현 못 할 불경하고 모독적인 것들.

회차 별로 외형은 달랐지만, 내용은 전부 아르틴이 카이엔을 괴롭히고 조교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아르틴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카이엔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망상 속의 그 은밀한 사랑의 장소에 있는 것은 아르틴과 사르디엘 자신이었다. 벌벌 떨면서도 기대하는 눈으로 아르틴을 바라보는 자신과, 자신을 음욕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아르틴.

‘정신 차려야 해! 아직 전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불경한 생각을...!’

사르디엘이 생각해도 너무 음습하고 문란한 상상이었기에, 그녀는 아주 드물게 스스로를 다그치며 정신을 차리도록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흐흥.”

“뭐야,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짐의 결백이 입증되었겠지?”

“..결백이고 뭐고 좋으니까, 그 힘은 그만 낭비하고 전투에 좀 도움이 되도록 쓰는 게 좋지 않겠어? 저 리치의 존재를 흔들기만 해도 이 전투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에이, 그러면 재미없지 않느냐. 최소한 아르틴이 돌아올 때 까지는 기다려야지.”

“...아르틴이 돌아온다고요?”

황홀경에 빠져 말없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카르엔이 문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그녀가 전투에 집중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며 멘탈이 흔들렸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릴리트에게 아르틴이 붙잡혀 갔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아, 혹시 시르카의 권능을 가지고 간 건가요? 아니면 아르틴이 마법으로 릴리트의 심상세계를 파훼할 방법을 개발했나요?”

“무슨 헛소리를 길게 하느냐? 다른 허접한 창부도 아니고 창부대장의 권능이 그렇게 쉽게 파훼할 수 있을 것 같느냐? 저 반푼이 창부의 권능으로 가능할 리가 없지.”

메피스토가 딱 잘라서 말하자 기대에 찼던 카르엔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런 모습이 사르디엘에게는 워낙 보기 좋았다. 카이엔으로 살 때는 너무 무뚝뚝해서 탈이지 않았는가.

지금은 감정표현도 꽤 풍부해지고 귀엽기도 한 만큼 아르틴의 메인 히로인 자리를 차지하는데 있어서는 큰 도움이 되리라.

“그러면...혹시 두 분이 구하러 가시는 건가요?”

어느새 메피스토를 존칭으로 부르기 시작한 카르엔의 반응에, 메피스토는 마음에 든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반푼이 용사. 너는 착각이 너무 많다. 그래서 네가 여태 아르틴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도태된 것이다.”

“네?”

“첫째로, 네가 용사인건 이제 와서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르틴이 네가 용사라서 너를 품은 줄 아느냐?”

“아닌....가요...?”

“멍청한 년, 그랬다면 진작 아르틴이 네 음습한 욕망을 채워줬겠지. 그러니까 눈치없다고 맨날 욕이나 먹고 있는 것이다.”

“잠깐, 그보다 카르엔이 아르틴과 관계를 가진 건 어떻게 알았어?”

메피스토는 사르디엘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귀에 달려있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대악마인 자신이 직접 만든 보물, 같은 것이 아닌 메피스토펠레스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만든 사랑의 증표.

“아르틴은 네가 용사의 권한을 뺏겨도 아무런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내 꾀임에 넘어가 타락해 악마나 마족이 된다고 해도 개의치 않겠지.”

“너, 지금 카르엔을 타락시킨다고 말 했지?”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반푼이 용사. 아르틴이 사랑하는 것은 눈앞의 여인이지 그 직위나 계급이 아니란 말이다.”

메피스토의 확신에 찬 말에 카르엔은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녀를 내내 괴롭혔던 번뇌, 그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용사 카이엔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것이었기에 저 말은 너무나도 가슴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짐 또한 아르틴을 아르틴이라는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하듯이, 아르틴 또한 그러하다. 그러니 그런 쓸 때 없는 의구심으로 자꾸 짐과 아르틴을 귀찮게 하지 말란 말이다. 알겠느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카르엔을 보며 메피스토가 만족한 웃음을 짓자, 사르디엘이 날카로운 눈으로 메피스토를 노려봤다.

“너, 그거 아르틴이 사랑하는 건 지옥의 대군주가 아니라 메피스토펠레스라고 믿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멍청한 소리 하지 말거라. 그것은 믿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당연한 FACT다. 팩트를 부정하다니, 타락천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라도 한 것이냐?”

“뭐라는 거야 진짜. 고작해야 악마들 대가리 하면서 왜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지?”

“짐은 유아독존이며 동시에 아르틴의 사랑으로 완벽해졌기 때문이다.”

“유니코르 불러오고 싶네 진짜...”

신랄한 유니코르의 혓바닥에 늘 참지 못하고 부들거리던 모습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당당하게 나오는 메피스토의 모습을 보며, 사르디엘은 꿀밤이라도 한 대 먹이고 싶은 깊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착각인데, 반푼이 용사 네 녀석은 아르틴을 왜 믿지 못하느냐?”

“...네? 믿지 못하다니요. 제가 얼마나 아르틴을 굳게 믿는데!”

“부족하다. 아니면 네 아르틴에 대한 믿음이 겨우 그 정도거나.”

카르엔의 반박에 메피스토는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돌렸다.

전투 중 아르틴이 사라져,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 허나 그녀의 눈은 그 너머의 아르틴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르틴은 무척 강하다. 아무도 자신을 돌보지 않는 상황에 성질 고약한 여신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타인을 돌볼 정도로 말이다.”

“...잠깐만, 너──?”

메피스토의 말에 사르디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저 여신을 비꼬는 말에 담긴 진짜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믿으면 된다. 심상세계라고 해봐야 고작해야 정신력 싸움이 아니더냐?”

메피스토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별 거 아니지. 지금의 아르틴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사랑, 우정, 믿음. 그 모든 것을 오로지 아르틴에게만 품고 있는 메피스토였기에 내보일 수 있는 굳건한 신뢰였다.

그 모습에 카르엔은 또 다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저 빈약한 인간관계를 지닌 지옥의 대군주이기에 이룰 수 있는 경지도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저것은 신앙과도 같은 것이다. 불멸의 존재이기에 품을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신뢰의 감정. 자신도 저런 감정을 품을 수 있다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어라?’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작은 의혹이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렇지만...아르틴이 릴리트의 유혹에 넘어가 관계를 맺느라 늦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그럴 리 없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말거라! 짐이 있는데, 아르틴이 관계를 맺을리 없지 않느냐!”

메피스토의 목숨이 작게 떨리는 것을 듣고 있던 두 여인이 동시에 눈치 챘다.

신앙이 흔들리는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

──푸석!

또 다시 살을 도려내는 소리와 함께 짙은 피냄새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직후 거체의 마수가 쓰러졌다. 흉악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최상급 마수가 단 세합을 견뎌내지 못하고 도륙이 나고 만 것이다.

“미쳤어..! 미쳤다고...!”

그 모습을 보며 릴리트는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맞다. 아르틴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 무슨 말로 거절했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무척 열이 받았고, 아르틴을 괴롭히고 싶었다.

하지만 릴리트 본인은 아르틴에게 직접 해를 가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심상에서 가장 흉폭하고 사나운 마수들을 꺼내왔다.

자신의 정원에서 기르는 이 마수들은, 상급 마족들조차 질려할 정도로 강력해 아르틴에게 고통을 주기에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황은 상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이게 전부야? 슬슬 지겨워 지는데...”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시체를 짓밟고 넘어 릴리트, 아니 릴리트의 분신에게 다가왔다.

"이제 그만 슬슬 끝내자. 어때?"

상냥한 어조와는 다르게 날카로운 살기를 내뿜는 아르틴을 보며 릴리트의 분신은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닫고 말았다.

이토록 강하면서도, 어째서 이 남자가 용사가 아닌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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