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화 〉 몽마의 세계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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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릴리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타르타로스, 몽마라는 종의 최강인 몽마의 여왕만이 행사할 수 있는 이 권능은 제한이 있지만 그만큼 강력하다.
이 심상의 공간에서 그녀는 한정적이지만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이곳에 갇힌 존재는 그녀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한 줌의 마나도 끌어내기 힘들지만 그녀 자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무한한 힘을 발휘한다.
단 하나, 대상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제한이 존재해 귀찮긴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릴리트의 본체도 늘 간접적으로 상대방을 괴롭히고 타락시키는 것을 선호했으니까.
아니, 영웅이나 강자들은 오히려 외부의 끝없는 고통이나 자극에는 무덤덤한 편이었지만, 내부에 숨겨진 트라우마나 현실과 분간하기 힘든 환영에 더욱 약한 모습을 보였기에 제약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런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기에 그녀가 아르틴 루드비히에게 내민 손길은 그야말로 자비로운 은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왕의 마력을 강제로 주입받아 타락하지 않아도 된다!
노예가 된 기념으로 아군을 제 손으로 전부 몰살시킬 필요도 없다!
그저 자신에게 다가와 다소곳이 한쪽 무릎을 꿇고, 굴욕이 가득한 표정으로 복종의 맹세만 하면 무려 마왕군 간부의 최측근이 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게다가 아르틴은 시르카처럼 가지고 놀 생각도 없었다. 아니, 분신릴리트 자신의 본체를 배제해야하는 분신의 입장으로서는 군단장을 압도하는 무력에 본체를 한 번 엿 먹인 경력도 있는 아르틴은 절대 놓칠 수 없는 매물이다.
그러니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서로 윈윈을 할 수 있는 최고의 거래조건을 내세웠고, 진득하게 아껴줄 생각이 가득했다.
만약 자신이 기대하는 이상의 활약을 보여준다면 본체가 줄곧 비워놨던 여왕의 부군 자리를 차지할 영광스러운 기회까지 줄 참이었는데!
“나는 그 제안을 거절하겠어. 릴리트.”
“...뭐? 지금 뭐라고 했어?”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몇 번을 물어도 마찬가지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르틴은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 자신의 너그럽고도 상냥한 제안을 거부하고 검을 뽑아 겨누었다.
아니, 사실 이유 같은 사소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묻지도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에게 내민 자신의 호의가 거부당하자 분신릴리트는 태어나 처음으로 이성이 마비되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모든 수컷에게 경애 받아야 할 자신이, 저깟 인간에게 거부당하다니.
“그래? 거절한다고? 그럼 그냥 죽어!!”
분신릴리트가 손짓하자 몽마의 정원에서 사육하는 흉악한 상급 마수와 식인 식물들, 하몬의 악취미가 곁들여진 최상급 언데드 키메라들과 망령군주의 기분 나쁜 망령군대가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직접 내민 당근을 거부해? 두고 봐, 천 번 정도 죽을 정도의 고통을 겪고 나면 스스로 기어서 내 발등에 키스할 테니까!’
어차피 타르타로스의 내부에 있는 이상, 시간은 그녀의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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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부터 말하자면, 분신릴리트의 판단은 대실패였다.
“키야아아악!! 불이!불이!!”
“크르륵...크륵...쿨럭...”
그녀가 직접 창조한 지옥이라도 정복할 수 있을 것 같던 군세가 아르틴에 의해 전부 전멸했다. 권속이나 군단장의 간부들을 강화해서 내보냈음에도 전부 죽었다.
어째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상식적으로 이 정도의 군단은 일개 인간에게는 정말 과분한 전력이었다.
오히려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마수들을 창조했다고 보는 게 옳을 텐데...
“저게 뭐야...?”
아르틴 루드비히에게는 그런 상식이 통용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저런 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신성력으로 가득 찬 빛의 기둥과 마력이 넘실거리는 지옥의 불길을 자유자제로 사용해 홀로 마왕군 최정예 군단을 격파하는 존재가?
마왕군에서 군단장 다음으로 손꼽히는 정예 간부 셋을 고블린 마냥 도륙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어, 어째서? 아무리 시르카의 권능이 있다 해도 타르타로스의 힘을 저항하긴 힘들 텐데?’
분신릴리트가 알고 있는 타르타로스의 제약을 파훼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대상이 타르타로스보다 더 강력한 권능을 지녔거나, 아니면 대상의 격이 타르타로스로 가둘 수 없는 수준이거나.
하지만 권능에 의한 권능의 파훼는 조건이나 상성에 많은 영향을 받을뿐더러 저렇게 막대한 힘을 자유자제로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지금 저 남자의 ’격’이 ’나‘보다 크고 강대하다고? 본체의 힘을 절반이나 가지고 있는 나보다?’
많은 존재들이 착각하곤 하지만, ‘격’은 강함이나 권능과는 다른 개념이다.
인간들이 줄곧 말하는 ‘잠재능력’이나 초월자들의 ‘신앙’, 마족이나 악마들의 ‘작위’같은 것들에서 나오는 존재 그 자체가 가지는 힘. 그것이 ‘격’이다.
그 위대한 마왕조차 이름과 권능을 뺏기고도 ‘격’만은 사라지지 않아 마왕군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명백한 증거기도 하다.
──그리고 여태껏 존재한 그 어떤 일개 인간도 그 ‘격’ 초월자나 권속과 대등했던 적은 없었다.
리치 하몬과 마법을 견줄 수 있다는 대마법사도, 먼 옛날 마왕을 봉인시킬 정도로 강했다던 초대 용사도, 지금 밖에서 군단장과 1:1로 겨루는 천마조차.
강력한 무력, 뛰어난 기술, 끝을 모르는 지혜를 가졌을지언정 격을 갖추진 못했다.
300년 전 전 제국민의 신앙을 받아 스스로 초월자가 된 제국의 천제??정도가 아니고는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을 텐데...
...그럼 저 남자는?
‘도, 도망쳐야 해.’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분신릴리트는 온 몸이 얼어붙는 공포를 느꼈다.
생명체라면 누구나 가지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 그것을 일개 인간에게 느껴버린 순간 분신릴리트는 자신의 전의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 대신 즉시 몸을 돌려 아르틴에게 신에 가까운 권능을 행사하는 대신 전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시간은 내 편이야! 거리를 벌리고 숨어서 지치기만을 기다리자! 타르타로스의 내부에서는 그 누구라도 나를 해칠 수 없는걸...!’
자신과 아르틴의 사이에 죽음의 숲과 어두운 바다, 불타는 화산지대와 숨결마저 얼어붙을 얼음의 계곡. 일개 인간은 한 곳도 주파하지 못할 극한지대들이다.
그 공간 안에 아르틴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진 괴물과 괴수들 또한 가득 채워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것들이 영원히 시간을 벌어주진 못하겠지만 충분한 시간은 벌어줄 수 있을 터. 필요하면 다시 채워 넣으면 그만...
“뭐야, 지금 나랑 술래잡기라도 하자는 거야?”
“꺄아아악!? 너 뭐야?! 어, 어떻게 쫓아왔어?!”
이 아니었다.
“계속 도망치게? 시간 오래 끌 필요 없잖아.”
“그만하고 포기하지. 이런 장난이 먹힐 리가 없잖아.”
“왜! 어떻게 자꾸 따라오는 건데!!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어느 곳으로 도망쳐도 아르틴은 따라왔다. 그것도 마치 자신의 등 뒤에 달라붙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떨쳐낼 수도 없는 속도로.
난생처음 느끼는 스토킹에 릴리트는 공포심으로 터질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으며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가장 안전한 장소를 창조했다.
“여, 여기라면 아르틴이 쫓아오지 못하겠지...?”
마왕성. 릴리트가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는 바로 본체가 평생을 모셔온 주군의 거처였다.
물론 마왕 그 자체를 구현해내는 것은 무리였다. 본체도 아닌 분신이 마왕의 ‘격’과 ‘권능’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무리였으니까.
‘그래도 괜찮아. 마왕성에 존재하는 결계와 방호 마법진은 전부 구현했잖아? 게다가 마왕성을 지키는 정예근위대를 성 내에 가득 채워놨고..!’
얼마나 먼 곳으로 도망쳐도 어디든 따라온다면 아예 접근조차 불가능한 곳에 숨으면 그만이다. 그 괴물 같은 아르틴도 마왕성에 침입하는 것은 무리일터.
‘만약 뚫는다 해도 괜찮아, 이 공간은 정말 아무도 모르는 비밀 통로잖아? 아무리 아르틴이라고 해도 모르면 절대 찾아낼 수 없을 거야..’
게다가 릴리트가 숨은 곳은 마왕성의 비밀통로.
일찍이 지옥의 대전쟁에서 패배한 마왕군이 인간계에 도착한 이후, 혹시 모를 악마들의 추격에 대비해 만들어 놓은 절대인식불가의 결계가 걸린 공간이었다.
얼마나 복잡한지 신과 같은 전능함을 지닌 릴리트조차 그 자리에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고작인 고대의 결계였지만 그 효과는 확실하다.
아르틴이 아니라 마왕 본인이 오더라도 이 장소를 모르는 이상 찾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
그 괴물 같은 남자라도 모르면 찾을 수 없는 공간을 찾아낼 수는 없다.
‘여기서 시간을 보내자...며칠만 지나도...아니, 하루만 지나도 아르틴의 동료들은 다 죽었을 거야. 그러면 이 공간을 해제하고 도망치면 돼. 아니면 마왕님이 부활할 때 까지만 버티기만 해ㄷ...’
──쿠웅!
“히익?!”
마왕성의 벽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관측할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다. 저 괴물 같은 인간이 기어코 마왕성의 결계를 박살내고 침입한 게 틀림없다.
이어서 무언가 베이는 소리, 꿰뚫리는 소리, 터지는 소리, 박살나는 소리. 온갖 소리가 진동을 타고 그녀를 향해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근위대가 학살당하고 있어...마왕성에 홀로 침입한 인간한테 전부 죽고 있어...! 수, 숨길 잘했다!’
감히 군단장이라고 해도 섣부르게 대적하지 못할 마왕의 근위대를 아르틴이 학살당할수록 아이러니하게 분신릴리트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 괴물 같은 남자에게서 숨은 것은 다행이다! 만약 안심하고 마왕님의 옥좌에 앉아있었다면 자신은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른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된다. 이대로 가만히....
“...조용해졌어.”
아르틴이 마왕성에 침입한 지 2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 마왕성은 곧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추적자를 쫓는 결계의 찢어질 것 같은 굉음이나 근위대가 교전을 벌이느라 울려 퍼지는 묵직한 금속음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숨을 죽이고 10분 정도를 더 기다려 봐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해, 해치웠나? 아니면 내가 도망친 줄 알고 다른 지역으로 향했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겪어봤자 아르틴이 죽지 않을 걸 알고 있고 다른 지역으로 갔다는 것은 그저 시간벌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분신릴리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으로 겪은,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냥감의 입장을 잠시나마 벗어났다는 사실이 그냥 너무나도 행복했기 때문이다.
‘...문을 열지 말자. 혹시 다시 올 수도 있으니까. 하루만, 하루만 여기서 숨어있는 거야...’
그 튼튼함과 어울리지 않는 낡은 나무문을 바라보며 분신릴리트는 이 안락한 시간을 만끽하기로 다짐했다.
어차피 현실로 나가면 본체릴리트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잠깐의 휴식은 나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꼭 필요한 일.
“제발 죽었으면 좋겠다. 죽진 않겠지만 그래도 죽었으면 좋겠다...저런 남자랑 다시 대치하는 건 죽어도 싫어. 차라리 본체랑 싸우는 게──”
그 때였다.
───콰앙!!!
“히이익?!?”
나무문에 묵직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만약 문에 걸린 방호마법이 아니었다면 당장 부셔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이 실린 충격.
동시에 분신릴리트의 얼굴에서 조금씩 핏기가 빠지기 시작했다.
“나...나를 찾고 있는 건가...? 어디에 숨어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 자체는 이상한 행동이 아니다. 아니, 그 집요한 추적을 생각한다면 릴리트가 이 마왕성을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려도 이상하지 않다.
“...어떻게?”
하지만 어떻게? 아르틴은 어떻게 자신이 도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그보다 방금, 어떻게 정확하게 나무문을 두드린 거지?
“설마.”
──쾅!! 쾅!!! 콰앙!!!
분신릴리트가 입을 여는 찰나, 나무문을 향해 연달아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그녀가 어디에 숨을지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우지끈.
마침내 망치질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나무문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자. 그 균열의 사이로 붉은색 눈동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역시, 여기 숨어 있었구나?”
“꺄아아아아악!!!”
그 순간 릴리트는 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히죽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르틴의 살벌한 눈빛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