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화 〉 몽마의 세계 #03
* * *
몽마는 악몽을 꾸지 않는다.
애초에 잠을 잘 필요가 없는 종족이기도 하지만, 몽마들의 대표적인 권능이 바로 꿈의 조종이란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덜떨어진 몽마라고 해도 자신의 꿈만큼은 자유자제로 조종할 수 있는 법이다.
“악몽이야..이건 악몽이라고...!!”
그런 몽마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존재인 릴리트의 분신은, 태어나 처음으로 본체도 느끼지 못한 악몽을 실제로 겪고 있었다.
타르타로스의 안에서라면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 전능한 존재여야 할 분신릴리트가, 고작해야 인간 하나에 겁을 먹고 도망치고 있다.
“왜 안 사라지는데! 도대체 어디 까지 쫓아오는 거냐고!”
이 세계에서 자신이 통제하지 못할 변수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저 피에 젖은 미친 남자는 자신의 어떠한 힘도 먹히지 않는다.
멈출 수도 막을 수도 없다. 그녀의 상식을 초월한 미지의 존재에 분신릴리트는 상상 이상의 공포를 느끼며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아르틴을 바라봤다.
그와 동시에 잠시 망치질을 멈추고 문을 두드리던 아르틴이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생각보다 문이 튼튼하네? 잠깐만 기다려...곧 열고 들어갈게!”
“꺄아아아아악!!!”
싱긋, 자신을 향해 서늘한 눈웃음을 짓는 아르틴을 보자 분신릴리트는 경기를 일으키며 비명을 질러댔다.
도망쳐야한다. 도망쳐야 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서있는 것조차 버겁다.
“그, 근위대! 저 남자가 문을 열지 못하게 막아!”
결국 이성이 마비된 그녀는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상급 마족으로만 구성된 최정예 근위대를 소환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물론 상식적으로 연대 단위로 있을 때도 아르틴을 막내지 못한 근위대가 아르틴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만, 이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에 가깝다.
“하...아직도 포기를 못했어? 귀찮게.”
근위대가 몸으로 문을 틀어막자, 지겹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 아르틴이 잠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퍼석!
“히이이이이익!!?!”
일순간, 온 몸으로 문을 틀어막던 근위대 중 한명이 몸에서 피분수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그 검은 피가 분신릴리트의 얼굴을 향해 뿜어져 그녀의 상반신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퍼석! 파삭! 콰직!
그 직후 연이어 근위대들의 몸이 넝마가 되거나 구멍투성이가 되었다. 아르틴이 문틈 사이로 쏘아낸 결정 마법에 근위대의 금속보다 단단한 신체가 꿰뚫려 즉사하는 것이다.
“흐에엑...흐에엑....도..도망쳐야해...”
이 끔찍한 광경을 본 분신릴리트는 완전히 적의가 꺾이고 말았다.
저런 건 용사가 아니다. 아니, 용사의 동료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도살자나 학살자 같은 잔학무도한 것이 더 어울린다.
“마왕니임...하몬....엘드리치이....누가아...누가아 나 좀 구해줘어...”
분신릴리트는 벌벌 떨며 두 팔로 바닥을 기어서라도 도망치고자 애썼다.
사실 당장에라도 타르타로스를 해제하고 마왕성으로 도망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마왕성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저 남자에게 살해당할 것이 두려웠다.
──푹!
“어딜 도망가? 나랑 놀자고 이 세계에 가둬놓고 또 도망치려고?”
“히끅?!”
자신의 머리 위로 창 하나가 쏘아져 눈앞에 꽂히자, 분신릴리트는 벌벌 떨던 온 몸이 굳은 채로 뒤를 돌아봐야했다.
그곳에는 마침내 문을 박살낸 아르틴이 서있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근위대의 머리를 거리낌 없이 박살내며 상쾌한 미소를 짓는 아르틴이.
“자, 마무리만 하고 이야기를 시작할까. 릴리트?”
부르르. 그 상냥한 목소리에 분신릴리트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어쩐지 하의가 뜨겁고 축축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마 근위대의 피를 잔뜩 뒤집어 쓴 탓이리라.
*
“자..이제 도망은 포기한 거지?”
끄덕끄덕끄덕끄덕! 근위대를 마저 처리한 아르틴이 자신을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묻자 분신릴리트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너 쫓아오느라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알아?”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릴리트에게 아르틴은 자신의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현실의 연인들과 친구들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지금 릴리트와의 숨바꼭질은 유쾌한 놀이가 되지 못한다.
“아으으...그, 그게에...”
“좋은 말로 할 때 타르타로스 풀어. 시키는 대로 하면 최대한 안 아프게 죽여줄 테니까.”
“주, 죽여...? 나, 날?”
“당연하지. 내가 그럼 살려 보낼 줄 알았어?”
릴리트의 말에 아르틴은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혀를 찼다.
지금 눈앞의 릴리트의 힘은 분명 자신이 알던 진짜 릴리트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막강함 힘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릴리트의 필살기에 가까운 타르타로스의 권능도 지니고 있는 만큼 이 녀석은 릴리트가 직접 만들어낸 특별한 분신일 터.
‘시르카가 이 분신을 흡수할 수 있으면 전력에 큰 도움이 될 거야. 만약 흡수를 못 해도 이 자리에서 죽이면 4대 권속 중 하나를 전력 외로 만드는 거고.’
그러니 절대 살려 보낼 수 없다. 이런 좋은 기회는 자주 오지 않고, 아르틴은 눈앞의 몽마가 섹시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왜?”
“?”
“왜...왜 날 죽이려는 거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 했는데에...?”
릴리트가 눈물을 울먹이며 묻자 아르틴은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동료들을 먼저 공격해놓고 왜 죽이려고 하냐니?
“나는, 나아는 널 죽이려고 안했단 말야! 히끅! 나는 그냥 상냥하게 잘 키워서, 히끅, 내 최측근으로 만들어줄 생각까지 했는, 히끅. 했는데에...”
“...그래서 내가 그걸 감사하다고 고마워해야 하냐?”
아르틴은 어이가 없는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아니, 저 제안은 그녀를 증오하면 증오했지 고마워 할 일은 전혀 아니다.
지금 당장 현실에서는 연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와중에, 자신이 릴리트랑 손을 잡기 위해 농밀하게 섹스를 즐기고 있으면 그게 사람새끼란 말인가?
‘그랬으면 내가 사람새끼가 아니라 짐승새끼지. 아무리 얘들 몰래 4P 난교까지 즐겨봤다지만...’
게다가 아르틴은 전생에 수도 없이 봐왔다. 릴리트에 의해 타락한 인간들이 그녀의 ‘부탁’ 때문에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애초에, 나는 마왕군 중에서도 4대 권속만큼은 절대 살려둘 생각이 없어. 녀석들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많이 하고 다녔는지 똑똑히 봤거든. 그리고 너는 ‘릴리트’잖아? 당연히 죽여야지.”
“그...그런...”
“네가 선택한 ‘릴리트‘다. 악으로 깡으로 받아들여라. 알겠지?”
아르틴의 담담한 말에 ‘릴리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별 거 아닌 듯 말하는 저 목소리에 담긴 살의는 너무도 명확하고 뚜렷해 부정하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자신은 오늘 이 남자에게 죽는다. 자신이 ‘릴리트’이기 때문에.
“...어”
“..응? 뭐라고?”
“싫어...! 싫다고!! 내가 왜 죽어야 하는데!!!”
억울하다. 원통하다. 릴리트의 분신은 자신이 왜 ‘릴리트’로서 죽어야 하는 존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본체의 대체품이 아니야!! 본체랑은 다른 존재라고! 그런데 내가 왜 본체랑 같은 존재라고 죽어야 하는데! 나는 태어난 이후에 한명도 죽여본 적 없단 말야! 그런데 내가 왜 악으로 깡으로 받아들어야 하냐고!!”
자신은 분명 그녀에게서 태어난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신은 자신이 ‘릴리트’와 동일한 존재라고는 단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르틴을 죽이거나 봉인하는 대신 자신의 부하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던가. 순순히 본체에 의도에 따라 쓰이고 흡수당하는 일 따위, 분신은 절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야! ‘릴리트’가 아닌 ‘나’라고!! 죽일 거라면 차라리 내가 싫어서 죽이란 말야! 본체의 대체품으로 죽어야 하는 건 죽는 것보다 싫어!!! 싫단 말야!!!!”
아르틴을 방해하기 위해 ‘릴리트’로부터 너무 많은 권능과 힘을 나눠받은 ‘그녀’는 당연히 ‘릴리트’의 기억 또한 공유 받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본체를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은 싫다.
나도 나만의 삶을 살고 싶다. 나만의 것을 가지고, ‘릴리트’가 아닌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다.
그렇지만 역시 어린애의 투정이나 모순 가득한 외침. 계속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는 악의 가득한 응어리에 불과하다.
“...”
그런 투정을 아르틴은, 아니 ‘아르틴’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물론 저 말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다.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다가온 마족을 그냥 살려둘 이유도 전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신’을 조용히 시키기 위해 아르틴은 망치를 휘둘러 머리를 내려찍지 않았다.
‘...쓰읍, 괜히 또 귀 기울이면 안 되는데.’
죽여야 한다. 하지만 저 외침을 듣는 순간 아르틴은 망설임을 느꼈다. 과거 자신이 했던 고민을 겪고 있는 눈앞의 여인에게 일종의 동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재랑 나는 다르지. 어차피 먼저 잔뜩 공격했으니까 이 세계에선 정당방위지. 애초에 적이고.’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마음이 다르다.
눈물을 펑펑 흘리는 ‘분신’의 모습에서, 아르틴은 어째서인지 1회차 시절의 자신이 계속 아른거렸다.
“아르틴, 너는...정말로 내가 알던 아르틴인가?”
‘아, 씨발.’
망치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아르틴은 미간을 찡그렸다.
본질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다. 지금 눈앞의 여인은 자신이 ‘릴리트’가 아니라고 울부짖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그 말을 믿어줘야 한다...
...1회차 시절, 샤오메이와 조르바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너, 정말로 스스로가 릴리트랑 다르다고 확신해?”
“...히끅?”
울분을 터트린 후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무기력하게 주저앉아있던 ‘분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 본질이 ‘릴리트’가 아니라 막 창조된 독립적인 개체라고 확신 하냐고.”
“...마, 맞아. 나는 릴리트가 아니야. 나는 나라고...!”
“후우...좋아, 네게 딱 하나, 살 수 있는 기회를 줄게.”
“살 수 있는 기회...?”
자신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분신’의 눈빛에 생기가 돌자, 아르틴은 한숨을 내쉬며 손끝에서 검은 기운이 일으켜 허공에 술식을 적어나갔다.
‘고대 신의 파편은 없지만...메피스토의 권능이 있으니까.’
술식의 준비가 끝나자, 그곳에는 계약의 군주, 메피스토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계약서’가 허공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읽어. 읽고 아래에 서명해. 그럼 살려줄 테니까.”
“이건...”
팔로 눈을 비벼 뿌연 시야를 닦아낸 ‘분신’이 ‘계약서’를 천천히 읽어 나갔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전부 확인한 그 얼굴이 아까보다 더욱 새파랗게 질렸다.
“사, 사역마...?”
“그래, 너를 방생할 수는 없고 그냥 살려 보낼 수도 없으니까. 내 곁에서 천천히 제대로 된 삶을...”
“그, 그 말은 나를 개같이 따먹겠다는 거야?!”
“..뭐?”
“사역마가 되었으니 저항 못하는 나한테 마구 야한 짓을 할 셈이잖아! 시르카한테 했던 것처럼!”
‘분신’이 다급히 노출이 가득한 가슴골을 양팔로 가리자, 기껏 순수한 선의를 베풀고자 했던 아르틴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몽마란 종족은 하나같이 뇌가 히토미에 물들었구나.’
"아무 말 못하잖아! 역시, 펨돔보단 멜돔이 취향이었던 거야! 그래서 나를...!"
아르틴은 그냥 이 자리에서 '분신'을 죽이는게 더 편할 것 같다는 충동에 빠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