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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사이가 좋은 남매-12화 (12/279)

〈 12화 〉 11. 땡땡이

* * *

으음.

더워.

몸이 끈적끈적해서 눈꺼풀을 떴다.

어렴풋이 비치는 옅은 햇빛 덕분에 그다지 어두컴컴하진 않았다.

그 빛을 조명 삼아 코앞에 초점을 맞추니 잠들어 있는 동생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으응.”

.

가슴 한 켠에서 괴롭히고 싶다는 음습한 욕구가 스멀스멀 차올랐다.

볼을 꼬집으려던 걸 간신히 참고, 좀 더 꽉 끌어안자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내며 내 어깨팍에 머리를 비볐다.

.

미치겠네.

얘 고3 맞냐?

키만 보면 맞는 것 같긴 한데.

잠에 취해있을 때만 따져보면 좀.

많이 귀엽다.

오른팔을 풀어 정수리 부근에 손가락 다섯 개를 전부 올렸다.

그대로 스윽, 하고 등까지 내려오니 머리카락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뒷머리를 살짝 쥐고 엄지로 살며시 쓰다듬었다.

안 일어나나.

구부렸던 손을 펴고 어깻죽지를 지나 팔뚝을 잡았다.

깨울 생각으로 가볍게 흔들었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고개가 내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겨울아.”

“으응.”

“일어나.”

“시러.”

.

가슴팍에서 웅얼거리며 머리를 휘젓는 동생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어쩌지.

아침인 거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으니까.

머리에 눌려있는 팔만 빼내려 했지만, 너무 찰싹 달라붙어 있어서 영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몸을 감싸서 살짝 들었다.

베개 위에 똑바로 눕혀놓고 어깨를 잡아 위치를 조정하다 보니,

동생이 눈을 떴다.

“아. 오빠.”

“좋은 아침.”

“응.”

빛을 가리는 자세로 마주 보고 아침 인사 하자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어색해지기 싫어서 이리로 온 건데.

동생도 당황했는지 눈을 껌뻑거리며 요리조리 굴리고 있었다.

“해 뜨는 중이니까. 방으로 돌아가 볼게.”

“응.”

“졸리면 더 자고.”

“오빠도.”

침대에서 내려와 살며시 방문을 연 뒤 내 방으로 돌아갔다.

깜빡하고 베개는 가지고 오지 못했다.

***

부끄럼 많은 밤을 보냈습니다.

방에 돌아와 잠깐 생각을 정리해보니 부끄러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동생이 잠깐 쌀쌀맞게 대했다고 멘탈 깨져서 뭐한 걸까, 진짜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근데 솔직히, 어쩔 수 없잖아.

끌어안고 누워 있다 보니까, 좀 뜨끈뜨끈 폭신폭신하더라고.

그러니 내 잘못이 아니다.

애당초 안아달라 한 것도 동생이잖아?

난 오라버니로서 동생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을 뿐이다.

뭐, 이유야 어찌 됐건,

정말 오래간만에 푹 잔 거 같다.

열이 난다는 핑계로 학교를 빼먹게 했다.

아침 먹고 난 뒤, 오늘만큼은 공부하지 말고 쉬라 신신당부를 해두곤 방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어디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간만에 정신도 말짱하겠다 영어 공부를 했다.

영어 영화를 봤다는 소리다.

침대 구석 쪽에 태블릿을 세워놓고 옆으로 누워 영상미를 음미하던 도중,

왼쪽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이 하나 빠졌다.

“뭐야.”

“심심해서.”

“쉬라니까.”

“잠 너무 많이 자서 안 졸려.”

“쉬는 게 자는 것만 있는 건 아니잖아.”

“내 방은 종이 냄새나서 싫다니까.”

태블릿을 덮고 고개를 돌려보니 도둑의 정체는 동생이었다.

늘 입던 로카티에 돌핀팬츠 차림.

훔쳐 간 이어폰을 자기 귀에 꽂더니 내 팔뚝에 얼굴을 올렸다.

몸을 살짝 흔들어 떨쳐냈지만, 이번엔 아예 짓뭉개듯이 상체를 내 몸에 얹었다.

“왜.”

“뭐 보고 있었어?”

“영화.”

“어떤 영화?”

“시간 여행물.”

“공상 과학, 뭐 그런 거야?”

“아니, 그냥 평범한 로맨스 영화.”

“아침부터?”

“아침에 로맨스 영화를 보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 않냐?”

“결혼 안 한다느니 뭐라느니 해놓고선?”

“안 할 거니 대리만족이라도 좀 해야지.”

계속 눌려있다 보면 또 저려올 것 같아서 엎드려 떨쳐낸 다음 일어나려 했었다.

하지만 엎드리자마자 내 위에 올라타 버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무거워.”

“무거우라고 하는 거야.”

팔다리를 겹쳐서 대자로 깔아뭉개길래 몸을 살짝 기울이니 침대 구석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떨어진 게 맘에 안 드는지 자꾸 발로 날 괴롭혀서 다리를 옭아매어 못 움직이게 고정해버렸다.

잠깐 바둥거리다 결국 힘의 차이를 인지한 건지 포기하고 축 늘어져 턱뼈로 내 팔을 지그시 눌렀다.

“겨울아.”

“왜.”

“턱뼈로 그러고 있으면 아픈데.”

“그럼 발 풀어줘.”

“풀면 또 때릴 거잖아.”

“가만히 있을 테니까.”

“진짜?”

“응.”

슬며시 다리에 힘을 풀어주니 반쯤 일어나서 다시 내 등에 업혔다.

그리곤 내가 베고 있던 베개에 얼굴을 문댔다.

“어쩌자고.”

“같이 보자. 영화.”

“이 자세로?”

“안 돼?”

“무거운데.”

“그러면 그냥 이대로 잘래.”

“안 졸린다면서.”

“누워 있다 보면 졸리겠지.”

실랑이 해봤자 이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포기하고 태블릿을 머리맡으로 옮겼다.

잠금을 풀고 액정을 살짝 툭 건드니 오른쪽 귀에서 대사가 흘러나왔다.

외국어라 그런지 뭔 소린진 잘 이해 가지 않았다.

***

크레딧이 올라감과 동시에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확실히 유명한 영화여서 그런지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잘 만들었네.

“우냐?”

“안 울었어.”

“목소리가 떨리는데.”

“살짝 감동한 거뿐이야.”

아니, 감동할 정도로 슬픈 이야긴 아니었는데.

본질은 로맨스고 곁다리로 가족 이야기가 껴있는 거잖아.

아닌가?

결혼하고 나면 가족이니 어떤 의미론 가족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뭐가 그리 슬퍼서 그러냐.”

“그, 중간에. 아빠 보내드리는 장면이 좀.”

“왜 이렇게 감수성이 풍부하십니까.”

“오빠가 모자란 거야.”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니 이상하게 괴롭히고 싶었다.

시선을 바꿔 살짝 촉촉해진 눈을 바라보니 놀릴만한 시나리오가 무궁무진하게 떠올랐다.

어떤 걸 고를까 고민하던 도중 어느새 고개를 돌려버렸다.

“오빠.”

“응.”

“오빠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으면 언제로 가고 싶어?”

“나?”

“응.”

“돌아가기 싫은데.”

“왜?”

“군대를 두 번 가야 하잖아.”

사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 시점으로 가서 마지막 인사는 남기고 싶은데,

그걸 여기서 말했다간 안 그래도 울먹이는데 진짜 울 것 같단 말이지.

“난 2주 전.”

“왜?”

“그때로 돌아가서 친구들한테 들킨 걸 없던 일로 하고 싶어.”

“그게 그렇게 트라우마냐?”

“오빠도 내 입장이 돼보면 알 거야. 친구들이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뭐, 대충 감이 안 오는 건 아닌데.

내 친구들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날 걱정하기 시작하면 오장육부가 뒤틀릴 것 같긴 하다.

“뭐, 지내다 보면 사라지지 않겠냐.”

“그랬으면 좋을 텐데.”

“걱정해 준다는 거에 감사해. 어찌 됐건 네 생각 해준다는 거잖아.”

“그건 날 배려해주는 게 아니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야.”

“그게 그리 고민이면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하던가. 나랑 너무너무 친해서 그런 거라고.”

“미쳤어?”

“지금 등에 딱 들러 붙어놓고 할 말이냐?”

상식적으로 그걸 본 애들이 지금 이걸 또 보면 뭐라 하겠냐. 의심이 확신이 될 텐데.

어제도 난 이야기를 하러 간 거지 꼭 끌어안고 잠자러 간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싫다는 건 아니고.

우리 사이에만 통하는 가족애나 남매애, 뭐 그런 거긴 한데.

솔직히 남들이 보면 수상해 보이긴 하잖아.

“오빠가 거절하면 되잖아.”

“난 너랑 어색해지기가 싫다니까?”

“그럼 어색해질 만한 말을 하지 마. 좀.”

한 대 맞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얻어맞지 않았다.

솔직히 살짝 아쉬웠다.

***

점심을 먹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 보니 전화가 걸려왔다.

정말 놀랍게도 가족이 아닌 친구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통신보안, 민간인 김가을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예, 훈련병 예정 박만석입니다.”

“아이고, 피이이일스으으응!”

“뒤질래?”

입대가 며칠 남지 않은 친구 놈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얘랑 밥 먹긴 해야 하는데.

"너 대체 왜 공군 지원했냐."

"카투사 떨어져서."

“입대 정확히 언젠데?”

“다음 주 화요일.”

"전역은?"

"내후년 6월."

“좆됐네.”

“좆됐지.”

웃음을 참을 순 없었지만, 웃음소리는 참을 수 있었기에 욕을 얻어먹진 않았다.

아, 너무 즐겁네.

이게 군필의 마음가짐인가.

“근데 넌 시발 어떻게 전역하고 한 달 동안 안 보일 수가 있냐.”

“바빴어.”

“데이트하느라 바쁘셨겠죠, 씹새야.”

“뭔 데이트야. 아니, 얼토당토않은 소문이 퍼지는 거 같은데, 나 여친 없다니까?”

“여친 없는 새끼가 왜 약속 잡을 때마다 캔슬하는데. 뒤질래?”

“동생 때문에.”

“그래, 여친도 연하면 동생은 동생이시겠지. 내가 고등학교 다니면서 니가 동생 있다는 소리를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구라도 좀 정도껏 칠래?”

“아니 진짜라니까?”

“그럼 시발 증명을 해보세요. 사진이든 뭐든. 여친을 사귄 거면 사귄 거라고 인정하든가.”

“꺼져. 니들한테 동생 사진 보여줄 바에 자살한다.”

아니, 왜 믿지를 않냐. 이 새끼들은.

동생 친구들은 없는 일도 잘만 믿던데.

“암튼 됐고, 설마 군대 가기 전까지 안 나오는 건 아니지?”

“그래도 입대 전엔 한 번 봐야지.”

“토요일에 봅시다. 네 생일도 겸사겸사해서.”

“아니, 토요일은 안 되는데.”

“아, 그렇겠죠, 시발년아. 당연히 생일날엔 여자친구랑 데이트가 있으시겠죠?”

아니, 집에서 미역국 먹어야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사실 엄마는 음력으로 챙겨주시긴 하는데,

솔직히 나도 내 음력생일이 언젠진 몰라서.

“금요일이나 일요일에 보자. 토요일은 어려워.”

“그럼 뭐, 내일 보자. 먹고 뻗을 거면 금요일이 차라리 낫지.”

“누구누구 모이는데.”

“늘 오던 새끼들 7~8명.”

“그, 늘 오던 놈들 중에서 내가 좀 안다 싶은 사람이 너 포함 셋밖에 없거든?”

“어차피 너한테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하고 있지 않으니까 닥치고 나와.”

“예예.”

“오기 전에 개 처맞을 준비 하시고.”

“응~ 빡빡이한텐 처맞아봤자 안 아파~”

“진짜 딱 대라.”

“딱 대야 할 건 니 뒤꿈치구요. 훈련소 가서 발이나 잘 맞추세요.”

신나게 조리돌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슬슬 사람도 좀 만나고 해야 할 시기인가.

늦긴 했지.

생각해보니까 전역하고 한 달 내내 동생이랑만 놀았잖아?

막상 그런 것 치곤 지루할 틈이 없긴 했는데.

방구석이 너무 좋아서 그런가.

“누구야?”

동생이 화장실에서 손을 털며 나오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친구.”

“사이 좋아 보이네.”

“진심으로?”

“진심으로.”

소파 쪽으로 걸어오며 농담을 하나 던졌다.

그러며 자연스레 내 옆자리에 앉았다.

“오빠, 친구랑 얘기할 땐 그런 목소리구나.”

“평소랑 별 차이 없지 않냐?”

“좀 더 톤이 높아.”

“그런가?”

뭐, 약간 약 올릴 때 톤이 따로 있긴 하지.

동생 놀릴 때도 약간 이런 느낌 아닌가?

내 목소리라서 잘 모르겠네.

“오빠 의외로 말 잘하네.”

“넌 날 뭐로 보는 거냐?”

“한 달 내내 누굴 만나질 않는데 그렇게 안보는 쪽이 이상한 거 아니야?”

“그건 그런데.”

“그래서, 내일 약속?”

“응.”

“몇 시?”

“정하진 않았는데, 금요일이니까 오후에 가겠지.”

“술 마실 거야?”

“아마.”

“너무 늦게 돌아오면 안 돼.”

“밤은 안 샐걸?”

어차피 갈 곳도 없어서 저녁 먹고 바로 술판 벌일 텐데 뭐.

요즘 막차도 일찍 끊겨서 늦기 전에 쫑내겠지.

“적당히 마시라는 소리야.”

“네가 걱정 안 해도 알아서 마시지.”

“신용이 안 가.”

걱정도 참 많으시네.

어제 그렇게 불안해하던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갔대.

남 신경 쓸 여유까지 넘치시고.

“어차피 금요일이잖아. 엄마도 쉬시고.”

“늦으면 문 잠글 거야.”

내가 이렇게 잡혀 삽니다.

네 친구들도 이런 모습을 보면 좀 오해가 풀리지 않을까?

“잠그면 열어 줄 때까지 전화해야지.”

“늦게 안 돌아오면 되는 거 아니야?”

“네가 신용이 안 간다면서.”

“그럼 안 늦는다는 증거를 줘.”

“토요일이 내 생일인데 늦겠냐.”

“알면 늦지 마.”

생일은 토요일인데 왜 자꾸 금요일에 늦지 말라는 거야.

자정 지나기 전엔 들어가겠지. 어련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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