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29. 예비소집일
* * *
수능이 정말 하루 앞으로 다가왔지만, 생각보다 몸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밥도 뭐, 계란말이까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진화했고.
집안일이야 원래 대부분 하던 일이다 보니 그다지 어려울 건 없었다.
대신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어째 내가 수능 볼 때보다 심경이 더 복잡한 느낌이다.
그땐 그냥 내 생각 내 공부만 하면 됐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겉으론 멀쩡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이상할 정도로 밝아 보이는 동생이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차라리 긴장한 시늉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맨날 배고프다고 징징대면서도,
막상 밥 시키거나 해놓으면 절반만 먹고 방으로 씽 돌아가니 괜히 걱정된다.
좀 더 날 의지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동생이 내게 기댔을 때 제대로 버텨줄 수 있을지 의문이라 가슴이 답답했다.
오빠로 있어 줘야 하니까.
내뱉은 말도 있고,
믿어주는 사람도 있다.
지난 6일간, 항상 그게 고민거리였다.
“오빠.”
“어, 뭐야. 벌써 왔네.”
“응. 수험표 받아 왔어.”
예비소집을 다녀온 동생이 수험표를 팔락거리며 차에 다시 올라탔다.
이렇게 둘이서 같이 차에 타는 건 오랜만인 것 같다.
막상 따져보면 일주일도 안 지나긴 했는데.
모교 말고 다른 학교로 온 건 처음이다 보니까 더 그런 것 같다.
학교까지 태워주는 것도 내일이 마지막이겠지.
뭐, 나중에 종종 차 타고 놀러 갈 수야 있어도.
어찌 되었든 간 부잣집 영애와 사용인으로서의 관계는 끝이란 소리다.
핏줄이 똑같은데 왜 내가 피고용인인지는 영원히 의문으로 남았지만.
생각해보면 밥도 거의 내 돈으로 사주잖아.
따지고 보면 엄마 돈이긴 한데, 아무튼.
“기분이 어때.”
“그냥 그런데? 아직 잘 실감이 안 나.”
히터를 틀어놔서 더운지, 머플러를 풀어서 뒷좌석에 집어 던졌다.
두르고 있을 땐 목을 숨긴 거북이 같아 보였는데.
벗고 나니 좀 시원해 보여서 덜 답답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실감 날걸.”
“모르겠어. 아직까진.”
“뭐, 너무 긴장하는 것보단 적당히 싱숭생숭한 게 나을 수도 있어.”
“오빠는 어땠어?”
“나는, 손 벌벌벌 떨었지.”
“오빠가 그러는 거 잘 상상이 안 가.”
“나름 멀쩡한 척한다고 당당하게 차에서 내렸는데, 밖이 엄청 춥더라고.”
“아.”
그때 개 추웠거든.
괜히 겉멋 부리다가 손해 좀 많이 봤다.
“답답해서 그냥 겉옷만 입었는데, 손이니 목이니 엄청 시려서 고생 좀 했어. 넌 껴입고 가라. 12월이라서 더 추울 테니까.”
“응.”
“차에선 히터 때문에 더우니까 일단 가지고 갔다가, 내리기 전에 입고 내려.”
“알았어.”
영하까진 안 떨어진다곤 하던데, 그래도 추운 건 맞으니까.
바람도 쌩쌩 불고.
딱 작년 이맘때에는 군대에서 그 쌩고생을 했는데.
막상 나와보니 그때 기억이 그리 나쁜 추억으로만 남은 것 같진 않아서 신기하다.
이 시간도 나중가면 그런 식으로 추억하게 될까?
지금 하는 고민도,
언젠간 바보 같아 보이지 않을까.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도시락은 뭐 챙겨줄까.”
“오빠는 뭐 먹었는데.”
“엄마가 죽 쒀줬어.”
“죽?”
죽 진짜 좋은데.
이름이 죽이라 그렇지 적당히 든든하고, 배도 안 아프고, 뜨끈하고.
심지어 식곤증도 잘 안 오는 만능 음식이다.
만들기 쉬운지는 안 만들어 봐서 모르겠지만.
“너도 죽 먹을래?”
“그, 아침에 죽까지 하려면 너무 일찍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만든다는 소린 아니고. 죽집에 예약하고 가기 전에 테이크아웃 해가면 되지.”
“응.”
“반찬도 뭐, 거기서 주는 거에 계란말이 해줄 테니까 싸가고, 간식은 커피에 초콜릿 정도면 돼?”
“그거면 될 거 같아.”
“커피는 달달한 거 챙겨줄까, 아님 아메리카노?”
“단 거는 초콜렛 먹으면 되잖아. 입 텁텁하니까 아메리카노.”
“그래. 생수는 하나 따로 챙겨줄게. 냉장고에 많이 있더라, 생수병.”
“응.”
무급인 것 치곤 신경 쓸 게 너무 많은 것 같다.
숙식 제공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뭐, 그동안 받은 게 많으니까.
앞으로 더 줘야 할 것도 많고,
더 받아내야 할 것도 많다.
그러니 내일까지만 좀 참자.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빠니까.
***
이제 진짜 DDAY까지 딱 한 시간 남았다.
어떻게 나름 잘했나.
솔직히 엄마 사라지셨을 땐 눈앞이 캄캄했다.
내가 제대로 오빠 노릇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거든.
방황하는 마음가짐으로 뒷바라지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지만, 적어도 믿음에 배신한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잠들기 전 물이라도 한잔 마시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휴대폰으로 불을 비쳐가며 한 발자국씩 내딛던 중, 옆방 문 틈새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안 자냐.
형식적으로 노크를 세 번 두들긴 뒤 손잡이를 돌렸다.
“불 켜놓고 뭐해.”
“.”
동생이 침대에 대자로 누워선 팔로 눈가를 가리고 있었다.
그럴 거면 불이라도 끄던가.
곧 수능인데 뭐 하는 거야.
“잠 안 와?”
“오빠는?”
“물 좀 마시려다가. 너는 왜.”
“모르겠어. 그냥 슬슬 실감이 나서.”
“벌써 그러면 내일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게.”
터벅터벅 방 안으로 걸어가 의자를 끌어 침대 앞에 앉았다.
끝까지 오빠를 부려 먹는 솜씨가 참 대단한 것 같다.
나중에 갚으라고 해야지.
“뭐 재미없는 이야기라도 해줄까?”
“아냐, 됐어. 그냥 잠깐만 여기 있어 줘.”
“불 꺼줘?”
“응.”
몸을 일으켜 스위치를 끄니 아예 새까매져서 앞이 전혀 안 보일 지경이었다.
잠시 멀뚱히 서서 암흑에 적응한 뒤, 조심스레 의자로 돌아왔다.
“오빠.”
“떠들 시간에 그냥 자. 내일 나도 운전해야 하고.”
“머리 빗겨줘.”
“뭐?”
“책상에 빗 있으니까, 그거로 그, 잠들 때까지만.”
진짜 손 많이 가는 동생이다.
핸드폰 손전등을 켜서 책상을 뒤져보니 일자 빗이 있었다.
우리 집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대로 머리를 빗어드렸다.
음, 머리를 빗어본 적이 잘 없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은근 뻑뻑했다.
까딱하다간 머리카락 빠지겠는데, 이거.
“오빠 엄청 못하네.”
“해본 적이 별로 없는데 어떡하냐.”
“아프니까, 그냥 손으로 해줘.”
“뭐?”
“그냥 손가락으로 만져줘.”
오늘만큼은 관대한 오빠로 남아주고 싶었기 때문에, 굳이 토 달지 않고 손가락으로 두피를 살살 쓰다듬었다.
차라리 이게 편하네.
최대한 다정하게 머리를 만져주다 보니, 숨소리도 점차 조용해졌다.
조심스레 머리칼에서 손을 떼니, 다시 동생이 입을 열었다.
“딱 잠들려고 했는데.”
“미안한데, 겨울아. 나도 자야 되잖아. 너 태우고 운전해야 하거든?”
“그럼 동생으로서,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뭔데.”
“그.”
“뜸 들이지 말고 말 해봐.”
“옆에 누워줘.”
“왜.”
“아무튼. 묻지 말고.”
내가 웬만하면,
웬만하면 다 들어주고 싶었다.
얼마나 어려운 부탁이든.
그런데, 이건.
상상 이상으로 까다로운 주문인데.
“그, 기억을 잊으신 거 같은데요, 김겨울 씨.”
“그건 남매로서 한 게 아니잖아.”
“난 너랑 남매로 있고 싶거든. 그리고 수능 날까지 한 시간도 안 남았어.”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야. 여동생이니까.”
하아.
돌겠다.
미쳐 돌아가시겠다.
나보고 어쩌라고.
거부권이 없잖아.
이건 갑의 불합리한 횡포다.
조심스레 침대로 올라가 책상 쪽을 바라보고 누웠다.
남매끼리 그럴 수도 있지.
특수한 상황이고,
어찌 됐건 엄마가 동생보고 오빠 부려 먹으라 했으니까.
약속을 어기거나, 믿음을 배신한 건 아니다.
그렇게 자기 최면을 걸고 있던 도중,
등에서 체온이 느껴졌다.
“겨울아.”
“오늘만. 부탁할게.”
“딱 오늘이 마지막이야.”
“응.”
다행스레 암시는 아직 깨지지 않았다.
난 그냥 침대에 누워있을 뿐.
불안에 떨던 겨울이가 쿠션 대신 날 껴안은 것뿐이다.
자고 싶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잠이 안 온다.
어쩌지.
졸음운전 할 순 없는데.
“오빠.”
“자라니까.”
“베개 필요 없어?”
“하나만 줘.”
“응.”
고개를 살짝 들자 귀밑으로 푹신한 베개가 하나 들어왔다.
그걸 베고 다시 눈을 붙이니, 이번엔 목덜미에서 숨결이 느껴졌다.
간지러워.
그래도 참았다.
더 이상 뭐라 하긴 너무 늦은 시간이니까.
이불도 둘 다 목만 보이게 폭 덮었다.
그리고, 내 배 위에서 얌전히 깍지껴져 있는 겨울이의 양손에 내 손을 포갰다.
따뜻하네.
내 손이 찬 건가?
뭐, 어느 쪽이든 간에.
잠시 쥐고 있다 보니, 어느샌가 온도가 비슷해졌다.
내 등도 아까부터 따뜻해진 지 오래고.
다리는 잘 모르겠다.
체온 때문에 뜨끈해진 건지,
압박당해서 피가 안 통하는 건지.
내가 어떻든, 겨울이가 잠든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 역시 양을 수십 마리씩 세어가며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70마리쯤 셌을 때, 양들이 일제히 울부짖는 바람에 펑, 하고 졸음이 날아갔다.
하아.
모르겠다.
겨울이가 무슨 생각 하는지.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뭐가 답일지 조차도 전혀.
확실한 건 딱 하나뿐이었다.
등과 가슴을 맞대고,
손을 겹친 채,
서로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는 지금이,
좋았다.
남매로서든,
포기하고 싶은
다른 무언가로서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