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사이가 좋은 남매-31화 (31/279)

〈 31화 〉 30. 수능

* * *

그다지 오래 자진 못했지만, 눈은 자연스레 떠졌다.

생각해보면 항상 이랬다.

내가 수능을 볼 때나,

입대하는 날이나,

뭐, 그 외에도 이런저런 중요한 날마다.

알람이 울리기 전, 날 붙잡고 있는 팔을 치워내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나가기 전에 잠시 자는 얼굴을 바라봤다.

잘 자네.

이불을 다시 똑바로 덮어주고 방에서 나왔다.

아침은 적당히 밥 국 계란이면 되려나.

일단 정신부터 차리려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어냈다.

천천히 머리를 말린 뒤, 즉석 된장국을 냄비에 붓고 끓였다.

그릇에 달걀을 까서 휘휘 젓던 도중, 전화가 왔다.

“아, 엄마.”

“아들, 일어났어?”

“당연하죠. 절 뭐로 보시고.”

“역시 우리 아들이 최고야. 뭐 하고 있었어?”

“아침밥하고 있어요.”

“그래, 겨울이는 잘 자디?”

“아까 잠깐 들여다봤는데 푹 자던데요.”

“슬슬 깨워야지.”

“밥 만들고 깨우려고 했죠.”

“그럼 만드는 동안 전화 끊지 말고 있어. 겨울이랑도 한번 얘기 좀 해야지.”

“계속 켜놓고 있을게요, 그럼.”

“그려.”

스피커 폰으로 바꾼 뒤 적당한 곳에 올려놓고 요리를 계속했다.

막상 배운 건 계란말이밖에 없긴 하지만.

“아들, 뭐 만들어?”

“계란말이요.”

“어이구, 이젠 계란말이도 만들 줄 알아?”

“막 그렇게 어렵진 않던데요.”

“나중에 엄마 돌아가면 다른 것도 가르쳐 줄까?”

“저 말고 겨울이 한테나 좀 가르쳐 주세요. 저도 좀 얻어 먹어보게.”

“알았어. 도시락은. 뭐 싸줄 거야.”

“죽 예약해놓은 거 가지러 가면 돼요. 보온병 가지고.”

“잘 생각했네, 괜히 위에 부담 가는 거 먹지 말고 죽 같은 게 나아.”

“저도 수능 때 죽 맛있게 먹었으니까.”

“아들은 점심 뭐 먹게.”

“죽 하나 더 사서 차에서 먹게요.”

“차에서?”

“아니, 엄마도 그랬잖아요.”

“우리 아들 안 같은데? 머릿속에 귀신이 들렸나?”

“너무하시네.”

엄마랑 떠들면서 즉석밥 두 개를 렌지에 넣고 돌린 순간, 방문이 열리고 동생이 걸어 나왔다.

너무 시끄럽게 통화했나.

어차피 슬슬 깨울 시간이니 상관없겠지, 뭐.

“푹 잤냐.”

“응, 푹 잤어.”

“겨울이 일어났니?”

“엄마?”

“어, 엄마야. 몸은 좀 괜찮고?”

“멀쩡해. 엄마는?”

“엄마는 멀쩡하지. 얼른 아침 먹어.”

“엄마, 아직 밥 렌지에 돌리는 중인데요.”

“빨리 좀 하지 그랬어.”

“아직 알람도 안 울렸거든요?”

물론 씻기 전에 꺼버려서 안 울린 거지만.

비대면으로 가족끼리 떠들어 대는 것도 생각보다 자연스러워서 신기했다.

이게 언택트니 뭐니 하는 그건가.

“아무튼, 아침 맛있게 먹고. 옷 따뜻하게 입고. 너무 긴장하지 말고.”

“응.”

“엄마가 같이 못 가줘서 미안해?”

“아냐. 대신 오빠 많이 부려 먹었어.”

“그래, 잘했어.”

“예?”

“오늘까지 더 부려 먹어. 끝나고 맛난 것도 사달라 하고.”

“응.”

이 집 여자들은 왜 자꾸 날 못 괴롭혀서 안달일까.

엄마도 그렇고, 이모들도 그렇고, 사촌 누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너무 긴장하지 말고, 빠트린 거 없는지 잘 확인해보고 갔다 와. 겨울이 열심히 한 거 엄마가 다 아니까, 잘할 거야.”

“응.”

“그럼 밥 먹어. 엄마 끊을게.”

“응, 엄마 사랑해.”

“엄마도 겨울이 사랑해~ 끊어~”

어째 나한테 걸려온 전환데 내 의사와는 하나도 관계없이 끝나버렸다.

어우, 소름 돋아.

이해는 한다만.

“밥 먹자. 매실장아찌 꺼내 줄까?”

“응.”

“뭐, 더 필요한 건 없고?”

“괜찮아. 조금만 먹고 가게.”

밥을 나한테 절반 가까이 덜어주곤 얌전히 먹기 시작했다.

나도 너무 많이 먹긴 좀 그런데.

그래도 뭐,

아까우니까 다 먹었다.

***

죽집에 들러 쇠고기야채죽을 두 개 포장한 뒤, 시험장으로 향했다.

넉넉하게 출발해서 그런지 시간이 좀 남았다.

진짜 마지막이네.

동생이랑 이러는 것도.

“오빠, 잠깐 같이 내려줄 수 있어?”

“왜?”

“같이 바람 쐬고 싶어.”

나도 살짝 답답했기 때문에 군말 없이 동생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확실히 겨울바람은 쌀쌀했다.

목은 목도리를 둘러서 괜찮았지만, 장갑을 안 가져온 탓에 손이 시렸다.

“긴장되냐?”

“응.”

“아예 긴장 안 하면 또 그래. 적당히 긴장 하는 게 나.”

“오빠.”

“어.”

“머플러 잠깐만 벗겨줘. 답답해서.”

그걸 왜 굳이 나한테 시키는지까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뭔 요구를 해도 다 들어줘야 하는 시점이잖아.

오늘만큼은 져 줘야지.

“손 좀 빌려줘.”

“손은 또 왜.”

“아무튼.”

내 손까지 멋대로 빌려 가더니 자기 목덜미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머플러 안에서 데워진 피부라 그런지 엄청 뜨끈뜨끈했다.

“뭔데.”

“잠이 덜 깨서. 잠 좀 깨려고.”

“남의 손을 아이스 팩으로 쓰면 어떡해.”

“남이 아니니까 괜찮잖아. 오늘 정도는.”

“오늘이니까 봐주는 거야.”

이왕 하는 거 양손을 전부 코트 속에 집어넣고 어깨를 주물러줬다.

주변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는 거 같은데.

그냥 신경 안 쓸래.

우애 좋은 남매끼리 그럴 수도 있지.

“잠이 안 가시네.”

“이렇게까지 해줬으면 좀 깨라.”

“오빠.”

“또 무슨 부탁 하려고.”

“오빠가 생각하기에 제일 역겨운 말 하나 해줘.”

“뭐?”

“듣자마자 막 소름 돋고, 잠 확 깰만한 거.”

“말로 해, 말로.”

“내가 말하면 의미가 없잖아.”

듣자마자 소름이 우수수 돋고,

술도 확 깨버리는 그 말을 알고는 있다.

한번 들어 봤으니까.

근데 여기서?

아닌가.

여기니까,

오늘이니까 해도 되는 건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어느 정도 어리광부려도 좀 받아줘야지.

동생이잖아.

“한다?”

“응.”

생각해보면 이 말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엄마한테도 거의 안 했고.

전역하고 나선 확실히 안 했구나.

그래도,

한 번쯤은 말해주고 싶었다.

어깨를 부여잡고 귓가에 내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나도.”

“소름 확 돋는데. 이런 말 하니까.”

“나도 잠 다 깼어.”

“굳이 꼭 이걸 시켜야겠어?”

“지금 아니면 못 들을 거 같아서.”

“그래.”

“머플러 다시 둘러줘.”

묵묵히 머플러를 칭칭 감아줬다.

붉어진 뺨이 안 보일 정도로.

꽉 조여 매니 눈을 무섭게 뜨곤 날 째려보길래 살짝 풀어 원래대로 매줬다.

긴장은 좀 풀렸으려나.

잠은 깬 거 같은데.

“슬슬 시간이니까, 다녀와.”

“이기고 올게.”

“누구한테.”

“어, 사회?”

“뭔데 그게.”

“그러게.”

“잘해. 그동안 한만큼.”

“응. 다녀올게, 오빠.”

터벅터벅, 동생이 시험장으로 걸어갔다.

고맙다고 말도 안 하냐.

별로 보답받고 싶어서 챙겨준 건 아니지만.

사라지는 뒷모습을 쭉 지켜보다, 다시 차로 돌아왔다.

아, 피곤해.

온몸에 기운이 빠진다.

정신적으로 너무 지쳤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왜 내가 긴장하고 앉아있는 건지.

엄마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 때려치웠다.

자고 싶다.

이젠.

***

차에서 푹 자고 일어나니 어느덧 4시가 훌쩍 넘었다.

밖을 보니 이미 시험 끝난 사람들도 종종 보였다.

아직 동생은 시험 중이겠지만.

오래도 잤네.

하긴, 어제 잠 좀 설치긴 했지.

배가 고파 내 몫으로 사 온 죽을 꺼내 먹었다.

보온병 안에 따뜻하게 보관돼 있어서 맛있었다.

핸드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무수히 찍혀있었다.

엄마부터 해서, 이모에 사촌 누나 형 가릴 거 없이.

일단 어머니에게 전화를 거니 불같이 화를 내시며 나를 꾸짖었다.

사고라도 난 줄 알았느니, 어쩌니 하시면서.

쭈구리가 돼서 열심히 사과하니 이내 용서해 주셨지만.

전화를 끊고 나니 어느덧 저녁이 다 돼갔다.

슬슬 끝날 시간이려나.

목도리를 다시 동여매고 학교 앞으로 향했다.

바람이 거세서 주머니에 손을 푹 박았다.

진짜 한겨울이구나.

춥긴 춥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하나 둘 씩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유심히 살펴보니, 기다리던 인물이 내게로 뛰어왔다.

뛰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

머플러는 또 어디 갖다 버렸고.

그 귀여운 덩어리가 숨을 헥헥대며 내 앞에서 멈췄다.

그리곤,

내 손을 부여잡았다.

“오빠.”

“어.”

“나 지금 엄청 두근두근 거려.”

“그거야 그러겠지.”

“여기.”

자기 손목에 내 손가락을 올렸다.

맥을 짚어보니, 확실히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야 이 날씨에 뛰어왔으니 심장이야 뛰겠지.

“두근두근 거리네.”

“되게, 기분 이상해.”

“어떤데.”

“말로 설명 못 하겠어.”

설명 대신, 이번엔 내 손을 자기 경동맥에 가져다 댔다.

아까보다 더 확실하게 맥박이 느껴졌다.

쿵쿵, 하고.

“목 엄청 따뜻한데.”

“응.”

“어땠어.”

“잘 모르겠는데 잘했어.”

“모르겠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몰라.”

“됐다, 뭘 더 말하냐.”

“오빠.”

“어.”

“심장 소리 들려주고 싶어.”

아.

진짜.

참으려고 했는데.

선 안에서 해도 되는 일이라면,

주도권을 다 넘겨주긴 싫었다.

겨울이가 가방을 땅에 내려놓는 순간,

내가 먼저,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엄청 잘 들리는데.”

“응.”

“이거 되게 부끄럽다. 눈 못 뜨겠어.”

“왜?”

“주변에서 막 째려볼 거 같은데.”

“상관없잖아. 이상한 것도 아니고.”

“아니, 좀이상하긴 하지.”

“안 이상해. 이 정도는.”

“그럼 뭐가 이상한데.”

“.”

“왜 입 다물어.”

“오빠.”

“어.”

“고마워.”

“이제 와서?”

“수능 망쳤으면 고맙다고 안 하려 했었어.”

“망치면 네 잘못인데 왜 내 탓 하려 해.”

“내 맘이야.”

“나도 고맙다. 항상.”

“응.”

서로 눈을 감고, 좀 더 몸을 가깝게 겹쳤다.

심장의 거리를 좁혔다.

코트 너머에서 두근거릴 터인 가슴의 고동,

온몸이 떨릴 정도로 느껴졌다.

얼마나 긴장한 거야.

이래선 시험 잘 본 게 맞는지도 의문인데.

“그, 오빠.”

“왜.”

“슬슬, 놔줘.”

“왜.”

“집 가야지. 엄마도 전화해야 하고.”

“힘으로 풀어 보든가.”

“.”

잠깐 바둥바둥대더니 이내 포기하고 얌전히 내 품속에 안겨 있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둘이서 있었다.

껴입은 옷 덕에춥진 않았다.

그렇게,

계속 그렇게 있고 싶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