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36. 휴식
* * *
씻고 나와 옷을 챙겨입은 뒤 일단 남은 식빵으로 간단히 주린 배를 채웠다.
파자마를 껴입은 채 살짝 나른해 보이는 겨울이의 체온을 재보니 37.3 도가 나왔다.
죄책감이 팍팍 밀려왔다.
감기 걸린 동생한테 뭐한 거지, 진짜로.
뒷정리하는 동안 내 방에서라도 재우려 했지만, 괜찮다며 기어코 따라와서 같이 흔적들을 치웠다.
창문을 열어서 냄새를 좀 빼고, 쓰다 만 콘돔은 대충 휴지로 둘둘 말아서 쓰레기봉투에 버렸다.
포장 안 뜯은 건 혹시 모르니 내 서랍에 다시 넣어놨지만.
옷이랑 베개피를 세탁하려고 했는데, 겨울이가 담요도 같이 빨겠다며 떼를 썼다.
“그걸 굳이 안 버리게?”
“빨아서 가지고 있으려구.”
“왜?”
아니, 그 정액에다가 되게 조금이지만 핏자국까지 묻어있는데.
빤다고 지워질 수준이 아니다.
암만 물티슈로 빡빡 문댔어도 안 될 거 같은데.
“증거 남겨달라고 했잖아.”
“.”
“가끔 오빠 이상한 소리 하면 보여주게.”
.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약점은 누구한테 폭로할 수 있어야 가치가 생기는 법이다.
이건 약점이 아니라,
폭탄이지.
“겨울아.”
“응.”
“가지고 있는 건 네 맘인데, 잘 숨겨.”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들키면 좀,
보통 문제가 아닐 테니까.
***
아점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다, 일단 돈까스 도시락을 하나씩 배달시켰다.
오기 전에 약을 먼저 사놔야겠다 싶어서, 마스크를 쓰고 집 밖을 나섰다.
아무리 찾아봐도 감기약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더라고.
바깥 공기를 좀 맡으니 끈이 풀려있던 이성도 슬슬 원위치를 찾아가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진짜 미친 새끼지, 내가.
어쩌냐.
도저히 남매로 돌아갈 수 있을 거 같지가 않다.
행복한 결말로 들어서는 길 따윈 전혀 없어 보이고.
솔직히 속옷만 입고 날 유혹할 때도 그냥 거절하려 했었다.
처음도 마지막도 내게 주고 싶다는 그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겨울이 자체를 포기할 순 없었으니,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생기는 애정만 포기하고.
서로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관계로.
좀 이상해 보여도 어디까지나 남매 사이로 남고 싶었는데.
성기를 잘라버리든가 하고 싶다.
그랬으면 이럴 일 없었을 텐데.
차라리 여자로 태어났으면 우애 깊은 자매로 멀쩡히 잘 살지 않았을까?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약국을 향해 걷다 보니 전화가 걸려왔다.
엄만 줄 알았지만, 사촌 누나였다.
“여보세요.”
“어, 가을아, 누나야.”
“어, 누나. 왜.”
“겨울이가 전화를 안 받길래. 걔 자?”
“걔 원래 휴대폰 무음으로 해놔서 잘 안 받아.”
“어, 별일은 없고?”
“멀쩡하지. 겨울이 수능도 잘 봤으니까.”
“그래?”
“아, 멀쩡하진 않다. 겨울이 살짝 감기 기운 있더라고.”
“감기 걸렸어?”
“열이 심하진 않은데, 그냥 좀 여기저기 아프다길래.”
“혹시 그거 아니야?”
“에이, 설마. 수능 볼 때 빼곤 나간 데도 없는데.”
“약은?”
“지금 사러 약국 나왔어.”
“원래 오늘 겨울이 저녁 사주려고 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그래, 그, 아니다. 겨울이한테 전화 한 번 더 해볼게.”
“응.”
누나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대화하기 너무 껄끄럽다.
원래 사촌 누나랑 별로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저번일 이후로 뭔가, 어렵다.
어떻게든 날 믿어주려는 것 같지만,
결국 그때 한 말도 전부 거짓말이 돼버렸네.
원래부터 진실 조금 섞인 거짓말이었던 게,
이제 와선 진실 한 조각조차 남지 않았다.
싱숭생숭한 기분을 애써 억누른 뒤, 약국에 들어와 약사 선생님에게 말을 걸었다.
“감기약 하나 주실 수 있나요.”
“어, 무슨 증상 있으신데요?”
“아, 저는 괜찮은데. 동생이 약간 미열이랑 몸살 끼가 있어서요.”
“열 얼마나 나세요?”
“37도 살짝 넘더라고요. 막 심하진 않은데.”
“다른 증상은 없으세요?”
“네네.”
“그럼 일단 타이레놀 드릴 테니까 아침저녁으로 한 알씩 드시고, 혹시 더 심해지거나 하시면 근처 보건소 들러서 한 번 검사 받아 보세요. 요즘 혹시 또 모르니까.”
“네, 알겠습니다.”
약을 사 들고 약국을 나서려던 순간, 잠깐 고민이 들었다.
원래 약은 맘대로 같이 먹으면 안 되지 않나?
물어봐야 하나.
근데 동생 줄 거라고 이미 말했는데?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하는 건가?
이리저리 고민해본 뒤,
다시 몸을 돌려 카운터로 향했다.
“아, 그. 혹시 피임약 복용 중인데 같이 먹어도 되는 거 맞나요?”
“네, 괜찮아요.”
“아, 네. 감사합니다.”
순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나 혼자 지레 겁먹은 모양이었다.
하긴 뭐,
피임약을 피임 용도로만 먹는 것도 아니고.
그런 용도로 먹는 게 맞아도 그런 쪽으로 생각이 들진 않겠지.
우리가 이상한 거니까.
***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서 커피를 두 잔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도 요즘 마시다 보니까 달달하니 맛있더라고. 헤이즐넛 라떼.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잠시 나간 사이 밥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파자마 위에 겉옷을 하나 껴입은 겨울이가 도시락 포장을 열심히 벗기고 있었다.
“아, 오빠. 왔어?”
“어. 여기, 약. 밥 먹고 나서 먹어. 커피도 사 왔으니까 좀 이따 마시자.”
“고마워.”
“누나한테서 전화 받았어?”
“오빠한테도 전화했어?”
“네가 안 받는다고 하던데.”
“핸드폰 봤는데 부재중 걸려있길래, 내가 다시 전화했어.”
“저녁 사준다고 하던데.”
“아, 그래서 오라고 했어.”
“뭐?”
“열나는데 밖으로 나가긴 그러니까, 그냥 여기서 먹자길래.”
왜?
물론 오늘은 좀 몸이 안 좋아 보여서 더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다 치우긴 했지만, 혹시 또 모르는 거고.
뭣보다,
아니다.
오늘은 안 할 거다.
안 한다고 둘이서 있기 싫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꼭 그런 짓만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대놓고 불만인 표정을 짓고 있다 보니,
다시 겨울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오빠.”
“어.”
“언니가 우리 수상하게 보는 건 나도 알아.”
“어.”
“종종 나한테 톡한단 말이야. 수능 끝나면 나가서 사람도 만나보고 그러라고. 아니면 언니가 어디 데려다주겠다거나.”
“그래?”
“그러니까 괜히 안 만나주면 더 의심할 거 같아서.”
“뭔 소린지는 알았다.”
“화났어?”
“아니, 화 난건 아니고. 그냥, 혹시 또 모르잖아.”
“나도 바보 아니고, 오빠가 무슨 걱정 하는지 알고 있어.”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행동거지든,
하는 말이든,
솔직히 진짜 모르겠다.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인식이 있는 건지를.
“티를 안 내는 거뿐이야. 나도, 되게 고민 많이 했어. 안 들키려고 노력도 했고.”
“.”
“엄청 깊게 고민하고 정한 거야.”
겨울이가 한번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내게 고백했다.
“처음도, 마지막도, 그 사이까지 전부, 평생 한 사람한테만 주겠다고.”
“너, 뭐 월요일까지만이라고 하지 않았냐?”
“그 뒤론 누구랑도 그럴 일 없다는 소리야. 진짜 남매로 돌아갈 거야.”
“.”
“그러니까 오빠도 그 뒤로 누구 만나지 마.”
“난 안 만난다고 했잖아.”
“신용이 안가.”
“왜.”
“그, 오빠 되게 그러니까. 그래서,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서.”
“난 원래 안 그래. 네가 못 참게 만드니까 그렇지.”
“내 탓 하는 거야?”
“네 탓 맞아.”
“아무튼, 다른 사람이랑 절대 그러지 마.”
“안 그래.”
하아.
지금 얼굴을 붉히는 게 감기 기운 때문에 그런 건지,
부끄러워서 그런 건지 잘 구분이 안 간다.
어느 쪽이든 오늘만큼은 참자.
한번 해버리면 누나 올 때까지 못 멈출 거 같으니까.
***
점심에 더 가까운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신 뒤 건조까지 끝마친 세탁물들을 적당히 정리했다.
담요는 예상대로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뭐 그래도, 핏자국도 한 방울 정도 묻은 거라 유심히 보지 않으면 잘 안 보이고.
보더라도 코피 자국인갑다, 싶겠지.
정액 묻은 자국도 마찬가지고.
겨울이 옷을 들고 방으로 향했다.
담요도 같이.
세탁한 걸 던져주니 겨울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오빠.”
“어.”
“언니 오면 있잖아.”
“어.”
“살짝 싸운 척할래?”
“안 될 거 같은데.”
“왜.”
“너나 나나 거짓말 잘 못 하잖아. 차라리 평소대로 하는 게 나을걸.”
“저번에 언니랑 말할 때 보니까 오빠 연기 엄청 잘하던데.”
“그건 반쯤 진심이니까 그렇지.”
“진짜?”
“네가 자꾸 들러붙어서 내가 이렇게 된 거잖아. 그러니까 반쯤 사실이지.”
“오빠가 먼저 이상하게 말해서 나 그렇게 만들었잖아.”
“내가 뭘.”
“진짜 기억 안 나?”
“아니, 난 되게 건전하게 동생으로서 널 아낀다, 뭐 이런 소리를 한 거지.”
“보통 동생한테 평생 같이 가자느니, 너밖에 없다느니 하면서 고백 안 해.”
“내가 그랬어?”
“그랬어. 진짜로.”
어라, 이상하네.
분명 난 그런 기억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원래 그런 의미로 말하려던 건,
반쯤 맞긴 한데.
내가 말을 좀 이상하게 했나?
내 탓인가?
“겨울아.”
“응.”
“궁금한데, 넌 왜 나랑 그, 그럴 생각을 한 거냐.”
“나중에 말할래.”
“나중에 언제.”
“비밀이야.”
나중에 언제.
남매로 돌아간다면서.
겨울이에게 진짜 그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대화를 끝마친 뒤, 겨울이가 담요를 고이 접어서 침대 밑 서랍에 잘 모셔뒀다.
어디에다가 써먹을 진 진짜 의문이긴 한데.
만약에라도 내가 약간 거리 두려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려 하면,
저걸 보여주면서 날 옭아매려 하는 거 아닐까?
물론 여친을 사귀거나 할 생각은 없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뭔가 되게,
나쁘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내게 의지하고,
나만 봐주고,
나밖에 모르는 이성을,
내가 놓아줄 리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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