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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사이가 좋은 남매-107화 (107/279)

〈 107화 〉 106. 집보기

* * *

늦다 못해 저녁에 가까운 점심을 먹어치우고, 엄마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렸다.

다시 평범한 남매인 척, 소파에 누워 TV를 본다.

“오빠, 소파 좁으니까 내려가.”

“안 눕고 앉아있으면 되잖아.”

“오빠도 누워있으면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부터 앉으면 나도 앉을게.”

“싫어. 내려가.”

동생이 다리로 날 퍽퍽 때리면서 강제로 내쫓아 버린 탓에, 어쩔 수 없이 위에서 내려와 소파 밑단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또 평소처럼 귀나 간지럽히고 괴롭히겠지, 하고 나이브하게 생각했는데,

“뭐하냐?”

“오빠가 앉으래서 앉았는데?”

겨울이가 소파에 앉은 척하면서, 목마를 타듯 허벅지로 내 목을 졸랐다.

힘 쓸데없이 세졌네.

운동 괜히 시켰나.

“숨 막혀. 풀어.”

“진짜?”

“진짜.”

“숨 막혀서 싫어?”

위를 올려다보니 겨울이가 머리카락으로 커튼을 치고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그 표정이네.

맨날 나 놀려먹을 때 짓는 표정.

마음만 같아선 잔뜩 혼내주고 싶지만, 엄마 오실 시간 머지않았으니까.

간단한 버드키스로 허벅지의 힘을 살짝 빼고,

잠깐 방심한 겨울이의 발바닥을 손으로 살살 간지럽혔다.

“악, 간지러워! 하지 마!”

간지럼 당한 겨울이는 몸을 뒤로 젖히고 바둥댔지만, 다리엔 전혀 힘을 빼지 않고 내 목을 더 강하게 조이고 있었다.

...이거 냅두면 진짜 숨 막히겠는데?

안 되겠다 싶어 간지럽히는 걸 멈추고 무릎을 잡아 억지로 벌려 겨울이에게서 탈출했다.

사실 그대로 올라타서 계속 간지럽힐 생각이었는데….

소파에 기어 올라가자마자 벨 소리가 울렸다.

“…엄만가?”

“아…, 시간 그렇게 됐구나.”

순식간에 휴전상태가 돼버린 채, 시끄럽게 울고 있는 핸드폰을 쥐어 든다.

엄마…, 가 아니라 큰이모 전화번호다.

뭐지?

…설마?

찝찝한 의문을 가지고 수화기를 받아들자,

“아들! 잘 지내남?”

당연하다는 듯 엄마 목소리가 나왔다.

“엄마? 왜 이모 전화로….”

“엄마 비행기 내리니까 폰 망가져서 이모 꺼로 전화했어!”

“아니, 뭐 하시다가요?”

…사람 좀 놀라게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다.

나쁜 일이라도 난 줄 알고 식겁했잖아.

“엄마도 모르겠어! 갑자기 전화도 데이터도 안되더라고. 와이파이는 잡히는데.”

“뭐, 유심 망가지신 거 아니에요?”

“엄마도 자세히는 몰라. 갑자기 그러더라구.”

“네. 일단 어디세요?”

“너네 사촌 형 차 타고 큰이모랑 같이 가는 중이야.”

“네.”

“둘다 점심은 먹었지? 겨울이는 어디 안 나갔고?”

“네.”

“좀 바꿔줘 봐.”

옆에서 엿듣고 있던 겨울이가 내 핸드폰을 뺏어가더니, 내 무릎에 앉아 전화를 대신 받기 시작했다.

하아.

저게 엄마 전화만 아니었으면 진짜로 간지럽혔을 텐데.

“아, 엄마. 나 오빠랑 있어.”

“응, 우리 딸. 밥 잘 먹었어?”

“응. 어제는 순두부찌개 끓여 먹었고, 오늘은 시켜 먹었어.”

“그래. 어제는 뭐 했어?”

“집에 있었어. 오빠랑. 둘다 그냥 공부하다가 쉬다가 했지.”

“그래. 오늘은 따로 약속 없지?”

“응.”

“느그 오빠랑 저녁 먹지 말고 기다려? 엄마가 고기 사 갈게.”

“응.”

“그래그래. 니 오빠 좀 다시 바꿔줘.”

겨울이가 손을 뒤로 뻗어 폰을 다시 내게로 돌려줬다.

그걸 받아들자마자 몸을 돌려 날 바라보더니,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내가 개냐?

“아, 엄마.”

“응, 아들. 저녁 먹지 말고 기다려!”

“뭐, 얼마나 맛있는 거 사주시려고 그래요?”

“이따 아들 하는 거 봐서.”

“네.”

“도착하면 전화 할 테니까, 부르면 나와. 엄마 짐도 들고 올라가야 되고, 장도 보러 가야 되니까.”

“장이요?”

“그러면 엄마 캐리어 들고 장 보러 다녀? 짐 놓고 가야지. 먹을 것도 사놔야 되니까, 아들이 짐꾼 역할 좀 해주세용?”

“야, 하지 마.”

“아들?”

머리를 쓰다듬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이젠 옆구리마저 쿡쿡 찌르기 시작해 솔직히 더는 견디기 어려웠다.

동생을 들어서 소파에 던져놓고, 간신히 전화를 이어갔다.

끝나면 두고 보자.

“아, 겨울이가 자꾸 괴롭혀서요.”

“뭘 했는데 괴롭혀?”

“그냥 뭐, 심심하면 맨날 간지럽혀요. 저 때문에 헤어, 그런 것도 있으니까.”

“당분간은 좀 받아줘. 걔도 힘들 테니까.”

“네.”

실연의 고통을 날 괴롭혀서 중화시키고 있는 ‘척’ 하는 동생에겐, 어느 정도 면죄부가 들려있긴 했다.

실연한 적 없다는 게 문제라서 그렇지.

“아무튼, 좀 이따가 전화할게? 기다리고 있어?”

“넵.”

“응, 끊을게~”

전화가 끊어졌다.

겨울이가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날 바라본다.

한 시간 반.

안전하게 생각해도 한 시간.

…아, 사실 이러면 안 되는데.

얼마 뒤에 시험인데.

“전화 받는 중엔 간지럽히지 마.”

“왜?”

“왜가 아니잖아.”

“어차피 엄마도 뭐라 안 하시니까 괜찮잖아? 난 오빠 때문에 남친이랑 헤어진 불쌍한 앤데, 그 정도도 못 괴롭혀?”

틀린 말은 아닌데.

나도 너 때문에 여친이랑 헤어졌거든?

물론 그 여친이 너긴 한데.

뭐, 여동생이나 여자친구나 그게 그거긴 하지.

할 거 다 하는데.

“…야한 거 안 돼, 오빠.”

“무슨 소리야. 그럴 생각 없어.”

물론 틀린 말이든 맞는 말이든,

보복할 시간은 넉넉하다 못해 차고 넘치게 남아있었다.

그냥은 못 넘어가지.

“뻥 치지마. 오빠 지금 엄청 음흉한 표정 짓고 있어.”

“그거야 뭐.”

소파에 앉아있는 겨울이를 밀어서 눕힌다.

그리곤 가슴을 만지….

“꺄악, 오빠! 간지러…엇!”

는 척하다가 순식간에 겨드랑이를 간지럽힌다.

간지럼 태울 때마다 이렇게 꺅꺅대는 겨울이가 잘못인 거다.

저렇게 반응 잘해주는데 어떻게 안 괴롭히냐고.

“야한 짓은 안 했잖아.”

“간지러…! 그마내….!”

이제 와서 팔짱을 끼고 내 손가락을 막아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사실 겨드랑이 말고 어딜 찔러도 엄청 간지러워하거든.

옆구리를 쿡쿡 찌르던, 아니면 갈비뼈를 쿡쿡 찌르던 별 차이 없이 몸을 움찔움찔댄다.

“항복?”

“하아. 하. 그만.”

“계속 간지럽힐까?”

“항복. 항복할 테니까.”

“항복이지?”

“응.”

그 잠깐 사이에 기진맥진해진 겨울이를 들어 안고 내 방으로 향한다.

야한 건 안 할 거야.

그냥 껴안고 여기저기 만지면서 눈 좀 붙일 생각인 거지.

진짜로,

둘이 이러면서 살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거 같다.

윤리니 도덕이니 개좆같은 소리는 더 이상 생각 안 하고 싶다.

알 게 뭐야, 그딴 게.

씨발.

***

침대에 나란히 누워 한 시간 내내 가슴을 쪼물딱대다 보니, 다시 한번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엄마 번호로.

“엄마야?”

“어.”

“왜 안 움직여, 오빠?”

“전화 받는 동안만 이러고 있자.”

손에 잡혀있는 지방 덩어리를 절대 놓기 싫어서, 한 손으로 전화만 받아 스피커폰으로 바꾸고 머리맡에 둔 뒤 다시 티셔츠 밑에 손을 집어넣었다.

미친 짓거리라는 건 아는데,

사실 우리가 미친 것도 맞으니까.

“아, 엄마. 폰 고쳤어요?”

“어. 고쳤어. 아들 말대로 유심 바꾸니까 되더라고.”

“그렇구나. 어디세요?”

“집 앞.”

“지금 내려가요?”

“응, 혼자 내려와.”

“겨울이는요?”

“겨울이는 좀 쉬게 냅둬. 한동안은.”

“네. 내려갈게요.”

전화가 끊기자마자 아쉬움을 머금고 티셔츠에서 손을 뺀 뒤, 벽장을 열어 겉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하아.

또 언제 이럴 시간이 나려나.

여름이 너무 멀어 보인다.

“오빠.”

“어.”

“나도 같이 내려갈래.”

“엄마가 너 쉬라는데?”

“그래도.”

“그러면 겉옷 입고 와.”

나랑 잠시라도 떨어지는 게 싫은 건지,

아니면 엄마한테 배려받는 게 불쾌한 건진 모르겠지만,

겨울이도 침대에서 일어나 내 겉옷을 훔쳐 입기 시작했다.

사이즈 안 맞잖아.

나갈 때 정도는 네 옷 입어라.

“갑자기 기분 왜 또 다운됐어?”

“사실 안 힘들고, 엄청 행복한데. 엄마가 챙겨주니까 되게 기분 이상해서.”

“그러냐.”

“오빠가 막 이상한 설정 잡아서 그렇잖아. 오빠 탓이야. 동생을 막 이상한 남자한테 속은 사람으로 만드는 게 오빠가 할 짓이야?”

“네가 이상한 옷 안 걸렸으면 그럴 일도 없었어.”

둘다 대충 거적때기에 가까운 옷을 껴입고, 집을 나서 계단으로 걸어 내려간다.

하, 이상하네.

방금까지 그렇게 수상한 짓 하고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누가 봐도 남매다.

생긴 것도 비슷하고, 분위기도 비슷하고.

“그것도 오빠 때문에 산 거니까 오빠 탓 맞아.”

“알았으니까, 버리지 말고 나중에 보여주기나 해.”

“응.”

하는 말만 보면 전혀 아니지만.

이야기를 멈추고 1층까지 내려가니, 공동현관 앞에서 엄마가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기다리고 있다.

“아, 엄마. 형은요?”

“형?”

“요한이 형 차 타고 오신 거 아니에요?”

“그건 당연히 이모네까지만 태워준 거고. 엄마는 전철 타고 왔지.”

엄마와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뒤에서 따라오던 겨울이를 눈치챈다.

순간 흠칫하셨다.

“우리 딸도 나왔네? 오빠 부려먹고 쉬고 있지 그랬어.”

“엄마 빨리 보고 싶어서 나왔어.”

“그래?”

겨울이가 터벅터벅 엄마에게 걸어가 안긴다.

참으로 보기 좋은 모녀애다.

아, 진짜.

심경이 복잡하네.

아까까진, 그냥 행복했는데.

“전 캐리어 들어서 집에 넣어놓고 올게요.”

“아들.”

“네?”

“아들도 일로 와. 한번 안아보자.”

“갑자기요?”

“일로 와. 아들도 한번 안아 봐야지.”

갑자기 감성적으로 변한 어머니의 생각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으니 얌전히 따라가 엄마의 품에 안겼다.

하아.

가슴속에서 죽은 줄 알았던 죄책감이 꿈틀꿈틀댄다.

쉽지 않네.

“아들.”

그리곤 귓속말로,

“겨울이 올려보내고 와. 아들이랑 할 얘기 있어. 겨울이 얘기 좀 하자.”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겨울이에게 들려줘선 안될 무언가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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