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수상할 정도로 사이가 좋은 남매-265화 (265/279)

〈 265화 〉 IF 외전. 친누나 김겨울, 친동생 김가을 (7)

* * *

2월.

춥디 추워야 할 겨울.

고도는 1만 미터.

“가을아, 비빔밥 맛있어?”

“그냥저냥. 먹을 만해.”

여권 발급받고.

표 예약하고.

자취할 방도 미리 찾아두고.

캐리어에 짐을 쌓고.

내 방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니 어느덧 비행기 안이었다.

“누나도 한입만 줘봐. 너도 빵 하나 먹고.”

“빵 말고 웨지 감자 줘. 나도 한 입만 먹게.”

적도를 향해가는 비행기에서 소곤소곤, 동생과 잡담을 나눈다.

최대한 싸게 구한다곤 했지만, 재수생이랑 고등학생 남매에겐 부담되는 표값.

그래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빠를 쳐다본 결과, 티켓을 뜯어낼 수 있었다.

“음…. 냉동 맛이네.”

“그야 냉동 맛이겠지. 이코노민데.”

뭐, 원래부터 비즈니스는 기대도 안 했으니까.

생일선물 겸 수능 잘 본 기념으로도 충분한 선물이었다.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지, 누나?”

“응. 한숨 푹 자면 도착할걸?”

“거기 날씨가…, 아. 인터넷 안되는구나.”

“누나가 알기론 한 30도? 그 정도 한다던데?”

“내리면 훅 덥겠네.”

“반팔 입었으니까, 괜찮아.”

목적지는 싱가포르.

이유는…,

적당히 외국 느낌 나면서 영어가 통하니까?

처음엔 일본이었는데, 이왕 해외로 나가는 김에 몇 마디라도 통하는 곳으로 가는 게 나을 거 같더라구.

그렇다고 영국이나 미국, 캐나다 이런 데는 너무 멀고 비싸니까.

절충안으로 나온 게 홍콩이랑 싱가포르.

둘 중 마지막 선택은 제비뽑기로 정했다.

…참, 내가 생각해도 대책 없는 여행계획이긴 하네.

뭐,

어차피 동생이랑 가는데, 뭐가 중요하겠어.

“호텔에 짐 풀고, 뭐 할 거야?”

“일단 밥 먹고…, …가을이가 땀 뻘뻘 흘리면서 음료수 사다주면 누나가 혼자 다 마셔야지.”

“장난치지 말고.”

“…일단 누나가 갈만한 식당은 다 찾아놨는데, 볼래?”

“인터넷 안 되잖아.”

“사진 찍어놨지. 당연히.”

이렇게 물 건너로 놀러 가서, 한국에선 먹기 힘든 음식들만 잔뜩 먹어도 본전은 치는 거니까.

싱가포르면 치안도 괜찮다고 하고.

가을이 덩치면 나름 듬직하긴 해도, 아직 고딩이잖아.

아니 아니, 애초에 내가 동생을 보살펴줘야지.

생각을 반대로 했네.

“…이거 토스트가 되게 부실해 보이는데, 누나?”

“너 카야잼 토스트 몰라? 이거 디게 달달하고 맛있다는데.”

“그냥 빵에다가 버터랑 잼 바른 거 아니야?”

“그러니까 맛있지, 바보야. 설탕에, 탄수화물에, 기름까지 듬뿍 발랐는데.”

“간식으로 그런 거 먹으면 살쪄.”

“괜찮아, 가을아. 거기 더워서 걷다 보면 살 빠져.”

그래도 의식주는 전부 계획 짜놨으니까, 나머지는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거 생각해보면 될 일이다.

어차피 얘랑 무슨 데이트 다닐 것도 아니고?

배 채우고 호텔에서 에어컨 바람 좀 쐬다가,

시간 나면 호텔 수영장이라도 들려서 며칠 놀면 되겠지.

수영복 같은 것도 다 거기서 빌려줄 거 아니야.

없음 말구.

***

2월.

덥디더운 겨울.

고도는 0미터.

“와, 씨. 더럽게 덥네….”

“그러게….”

“누나, 일단 물 마셔. 물.”

“응….”

누나와 같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간신히 체크인까지 성공했다.

널찍하진 않지만, 쾌적하고 깨끗한 트윈룸.

깔끔한 침대 두 개에, 추울 정도로 에어컨이 빵빵한 게 참 마음에 든다.

호텔 안에 수영장도 하나 있고.

헬스장도 있고.

근처에 카페랑 식당도 많고.

하지만 이렇게 비싼 호텔을,

악랄한 누나는 돈도 없는 고등학생의 용돈을 뜯어가서 반띵해버렸다.

“하아…, 누나 못 일어나겠어. 가을아….”

“배 안 고파?”

“몰라. 그냥 자고 싶어….”

여행 온 첫날 대낮부터 바닥에 널브러진 우리 집 김겨울 씨는, 숨을 헐떡대면서 옷도 안 갈아입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래서 갈까 말까 마지막까지 고민한 건데.

죽고 못 사는 친구나 연인, 부부도 여행 가면 다투는 일 수두룩한데,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누나랑 해외여행 오면 솔직히 한 번 싸울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누나가 생일선물로 나랑 여행 가고 싶다 하는데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왜 굳이 나랑 가려는 지는 아직도 의문이긴 한데.

그냥 뭐…,

수능 보는 내내 아침 차려준 게 고마워서 그런 거라 치자.

“잘 거여도, 씻고 옷 갈아입고 자. 옷 그거 땀에 절어서 내버려 두면 냄새나.”

“괜찮아, 괜찮아, 누나 냄새 안 나….”

“누나는 냄새 안 나도 땀 냄새는 나니까, 빨리.”

“아야.”

내버려 두면 진짜 잠들 거 같은 누나를 억지로 일으킨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잡아끈 손목을 어루만지며 엄살을 부리던 누나는, 이내 캐리어에서 옷가지를 몇 개 가지고는 욕실로 쓱 들어갔다.

…아, 그냥 나 먼저 씻고 깨울 걸 그랬나.

나도 더럽게 찝찝한데.

“…아, 춥다.”

땀방울이 하나하나 에어컨 바람에 말라가면서, 점차 추위가 느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카야잼 토스튼지 뭔지, 생각도 안 날 만큼 더웠는데.

“아, 배고파….”

더위가 가시고, 추위가 느껴지자마자 허기까지 내 배를 괴롭힌다.

…저 귀찮은 누님만 아니었으면, 그냥 혼자 나가서 밥이라도 먹고 돌아와서 씻었을 텐데.

내버려 두고 갈 수도 없고.

어쩐담.

먹을 거라고 해봤자 고추장밖에 없는데.

“하아…, 시원하다….”

“뭐야, 벌써 다 씻었어?”

“응.”

호텔 바닥에 응크리고 누워서 기다려 보니, 누나가 금세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딱 집에서 입던 반팔에 반바지 차림.

푹 젖다 못해 물방울을 뚝뚝 흘려대는 검은색 머리카락.

…저 단발도 아니고 장발도 아닌 애매한 길이가 되게 거슬렸지만,

방바닥에 물을 뚝뚝 흘려대면서 수건으로 대충 팡팡 쳐내는 걸 보니 두 배는 더 거슬렸다.

집에선 대놓고 깔끔떨던 사람이 왜 저런데.

“가을이 너두 씻어…. 누나는 잘 테니까….”

“…나 배고픈데.”

“…배고파?”

“누나는 배 안 고파?”

“누나는 배보다 잠이 고파서….”

“…누나 혼자 자고 있을래? 나 나가서 편의점이라도 들릴 테니까.”

“아, 안돼. 너 혼자 돌아다니면 누나 혼나….”

머리도 덜 말린 채로 침대에 쓰러져서 왱알대는 누나를 보니, 아무래도 비행기에서 잠을 설쳐서 상태가 메롱한 게 분명했다.

저러는데 억지로 끌고 나갈 수도 없고.

혼자 나가면 분명 따라 나올 거고.

…모르겠다.

“…그럼 나도 씻고 잘 테니까, 누나 먼저 자고 있어.”

“응….”

일단 씻자.

눈 맛탱이 간 거 보니까,

한 20분 정도 느긋하게 씻으면 뻗어있겠네, 뭐.

***

“…헉.”

몇 시지.

모르겠다.

일단 어둑어둑한 걸 보니까 밤 아니면 새벽.

핸드폰도 어디에다가 뒀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아….”

옆을 돌아보니, 옆 침대에 동생이 엎어져서 쿨쿨 자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비닐봉지가 하나.

겸사겸사 내 핸드폰도 얌전히 올라와 있다.

“….”

가을이가 깨지 않게 최대한 조심조심 테이블로 걸어간다.

핸드폰을 켜보니, 시간은 1시.

…혹시 시계가 이상한 건가 했는데, 확실하게 싱가포르 시각이 맞았다.

날짜도,

깔끔하게 하루 날아가 있었고.

“아, 바보야…!”

숙소까지 걸어오다가 반쯤 쪄 죽어버린 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푹 잘 줄은 몰랐는데.

핸드폰을 켜 보니 부재중 전화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아빠, 아빠.

엄마.

친구.

친구.

엄마.

친구.

친구 친구 친구.

친구 친구 친구….

…아무래도 엄마랑 아빠한텐 가을이가 대신 연락한 거 같은데,

내 친구 꺼는 안 받아준 모양이다.

카톡을 열어보니, 벌써 내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었다.

“어쩌지, 이거….”

일단 생존 신고부터 올리니, 아직도 깨있는 친구들이 온갖 이모티콘으로 날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미안하다고 열심히 답장하면서, 핸드폰 옆에 있던 비닐봉지를 뒤져보니 먹을 게 있었다.

아, 맞다.

얘 배고프다고 했었지.

…혼자 나가서 편의점 들린 거구나.

“아, 진짜 바보 멍청이, 뭐한 거야, 누나잖아 너….”

게다가 비닐봉지 뒤쪽에는, 깨면 먹으라고 포스트잇까지 붙여놓은 동생의 글씨를 볼 수 있었다.

쓰레기통을 뒤져보진 않았지만, 아마 가을이가 먹은 건 이미 버렸겠지.

이거는 나 먹으라고 사놨다는 거잖아.

…진짜 어쩌지, 나.

기껏 동생 해외까지 끌고 왔는데, 잠이나 푹 자버리고.

깨면 뭐라고 변명해야 하는 거야.

…변명할 것도 없지만.

“…배고프다.”

하지만 아무리 동생한테 미안해도 배는 솔직해서, 어서 동생이 사다 준 양식을 입안에 욱여넣으라 소리 지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제일 소리가 덜 날 만한 음식을 손에 들고, 포장을 뜯는다.

아까 내가 그렇게 노래 불렀던 카야잼 토스트.

편의점에서 파는 거라 퀄리티는 낮아 보여도, 한입 베어 무니 엄청 달았다.

“….”

우두커니 서서 토스트를 꾸역꾸역 먹으면서 가을이를 내려다본다.

세상모르고 자고 있지만, 깨어 있을 때는 누나 욕을 얼마나 했으려나.

일어나면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열심히 고민해봤지만, 아무리 싹싹 빌어도 누나 취급을 안 해줄 거 같았다.

…살면서 동생한테 도움받은 적은 있어도, 민폐 끼친 적은 없었는데.

어쩌지.

진짜 절이라도 해야 하나.

미안한 마음으로 다 먹은 토스트 포장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같이 사다 준 음료수 캔을 따려던 순간,

“아.”

“으음…, …누나…?”

…바닥에 떨궈서 팅그르르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동생이 깨버렸다.

진짜, 멍청아….

“…깼어? 누나?”

“으, 응….”

“….”

팡팡.

자다 깨서 게슴츠레한 눈으로도, 짜증 난 듯 자기 침대를 팡팡 내리치는 동생이 처음으로 무섭게 여겨졌다.

“…앉아 봐, 누나.”

“…응.”

…혼날 거 같아서.

혼나도 마땅하니까.

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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