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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사이가 좋은 남매-276화 (276/279)

〈 276화 〉 IF 외전. 친누나 김겨울, 친동생 김가을 (18)

* * *

나쁜 꿈이라도 꿀 줄 알았는데,

놀랍도록 평온하고 따사로운 아침.

눈을 뜨니, 누나가 잠들 때 모습 그대로 내 품에 안겨있었다.

“….”

…내버려 두면 죽지 않을까,

그렇게 진심으로 걱정할 만큼, 어제의 난 불안했었다.

누나 재수할 때도 이렇게까지 걱정해본 적은 없는 거 같은데,

고작 동생한테 그렇게까지 매달리는 걸 본 이상,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으응….”

살짝 미소를 지으며 숨을 색색 내쉬는 누나를 보니, 그렇게 힘들어하던 어제의 누나가 괜히 엄살 부린 것만 같다.

몸을 뒤척이면서도, 누나는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보드라운 뺨을 내 팔뚝에 비벼대며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다.

잠시 떨어져 산 3주 동안, 누나한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고,

안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내가 없는 동안 많이 불안해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

아직 나이가 어려서, 친누나가 힘들어할 때 어떻게 돌봐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외로우니 옆에 있어 달라고 할 때, 자리만 지켜주면 되는 걸까?

아니면 동생보다 듬직하고 멋있는 애인이라도 사귀어서, 대학생답게 살아보라고 해줘야 되는 걸까.

내가 동생이 아니라 오빠였다면,

조금 더 경험이 많았다면 그렇게 말해줬을 수도 있을 거 같다.

하지만 알지도 못하면서 섣부르게 그리 말해줄 순 없었다.

누나가 남자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좋아한다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는 건, 애나 할 법한 짓이잖아.

힘들어하는 사람한테 괜한 말실수를 꺼내는 것만큼,

후회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누나.”

“으응….”

여전히 깰 기미가 없는 누나를, 어제처럼 꽈악 안아준다.

누나가 원해서 억지로 안아주는 게 아니라,

말랑말랑한 누나의 살갗이 내 옷 위에 짓눌리도록, 꾸욱.

누나에게 있어서 내가 뭔지는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별 의미 없는 포옹만으로 누나가 편안해한다면, 몇 번이고 다시 해줄 수 있었다.

“…으으응…, 가을아…?”

“아, …깼어?”

“응….”

너무 숨 막히게 껴안은 탓일까, 누나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어제 봤던 불안함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는 나른한 눈동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놓인다.

“근데, 좀 숨 막혀….”

“…아, 미안.”

누나를 놓고, 힘을 풀어줘도 당장 어디로 뛰쳐나갈 거 같진 않아서,

한시름 놓게 된다.

“지금 몇 시지…?”

“대충…, 여섯 시. 더 자도 될 거야.”

“응…. 그럼 더 자야겠다….”

“어, 더 자. 나도 더 잘 거니까.”

“으응….”

자기가 풀어달라고 해놓고선, 자연스레 나한테 다시 매달리는 누나를,

언제까지 돌봐줘야 할진 모르겠다.

돌봐준다는 표현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알 수 있는 건 너무나도 적다.

그저,

이대로 눈 감으면 서로 푹 잠들 수 있으리라는 거 빼곤.

알고 싶지 않다.

알아봤자,

좋은 일은 없을 거 같아서.

***

꿈인지, 현실인지 애매모호한 기억이 내 머릿속에서 맴돈다.

꿈이라기엔 너무 또렷하게 남아있고,

현실이라기엔 너무 몽롱해서 믿기 어려운,

그런 기억.

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얼굴은,

그 기억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간단하게 설명해준다.

“…잘 자네, 내 동생.”

어제 잠들었을 때 보다 꼬옥.

숨 막힐 정도로 날 끌어안고, 추욱 늘어져 있는 가을이의 얼굴이 내 코앞에서 느껴진다.

따뜻하지만, 절대 뜨겁지 않은 숨결은 내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든다.

그게 간지럽고 따뜻해서,

딱히 소름 끼치지는 않았다.

“진짜, 누나 너무 좋아해, 너….”

깰 때까지 빠져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빠져나가고 싶어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내 몸을 완전히 품어서, 도망치지 못하게 옭아매 놨으니까.

고작해야 가을이 등을 쓰다듬는 게 전부다.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팔이 무거워서 치우기도 어려웠다.

“하아….”

잠결에도 날 갈구하는 동생에게 조그마한 선물을 주려고, 나 역시 가을이를 꼬옥 껴안아 준다.

그렇게 포근하고, 단단한 동생의 품 안에 묻혀, 살짝 버거운 숨을 색색 내쉰다.

어제 잠들 때보단 조금 냄새가 짙어졌지만, 여전히 깔끔한 체취.

나도 조금 냄새나지 않을까 걱정하다가도, 어차피 몸은 부드러울 테니 별 상관없겠지, 괜히 혼자 변명해버리고 만다.

…어차피 베개도 웬만큼 냄새나지 않는 이상, 푹신한 게 더 좋은 법이잖아.

여행 가서 처음 맛본 누나 베개를 그렇게 좋아하던 가을이니까, 조금 냄새가 뱄어도 괜찮을 거다.

“김겨울….”

“앗, 가을아…?”

너무 꽉 껴안아 준 탓인지, 놀란 가을이가 몸을 뒤척이더니 날 반말로 불러대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바로 되물어봤지만, 이상하게도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짜식, 잠꼬댄가?

무슨 꿈을 꾸길래, 누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거야.

건방진….

“으음…, 말랑해….”

“…뭐래. 진짜….”

…녀석.

말, 말랑하긴 뭐가 말랑해.

…누나가 좀 말랑말랑하긴 해도,

지방이 많이 붙은 데가 보들보들하고 말랑한 거지,

지금 딱 붙어있는 뱃살이나, 손 얹은 허리 같은 덴 살 하나도 없는데.

“…야, 김가을. 일어나.”

“으어어….”

그 뒤로도 쭉 알 수 없는 말을 이어가며 잠버릇을 늘어놓는 가을이의 목을 살금살금 물어뜯어 본다.

이빨이 닿으면 아플 테니까, 가볍게 입술로만.

귀 깨물면서 놀 때처럼 살짝.

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해서, 조심스레 동생을 깨운다.

“간지러워….”

“…그니까 일어나라구. 그만 자고.”

“흐으으음…. 으음….”

하지만 깰 기미가 없어 보이는 가을이는, 자꾸 내 머리나 쓰다듬으면서 앓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동시에 발도 내 허리에 쓱 올리고, 잠을 핑계로 내 위에 올라타려 한다.

되게 큼직한 동생 손에 쓰다듬어지는 건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동생에게 짓눌리는 건 조금 불편했다.

아무리 친해도,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위계질서를 지키지 않는 동생한텐 벌이 필요한 법이니까.

날 짓누르려고 하는 가을이를 휙 뒤집어서,

내가 가을이 위에 올라탄다.

“일어나라구. 김가을. …확 깨물어버리기 전에.”

“…아, 누나….”

이제야 옳게 된 자세로 동생을 꾸욱꾸욱 짓누르고 나서야, 가을이는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며 날 쳐다봐줬다.

나이랑 안 어울리게, 꽤 어른스러워 보이는 그 표정이 얘가 내 동생이라는 걸 알려주는 거 같아서, 너무 반가웠다.

그 반가움을 턱으로 어깰 꾹꾹 짓이겨 주는 거로 표현하고, 갈 곳을 잃은 동생의 손도 내 허리에 둘러준다.

“…잘 잤어?”

“어, 어. 잘 잤긴 했는데….”

“누나도 잘 잤어. …가을이 덕분에.”

이사 오고 나서 그토록 불안하고 쓸쓸했던 기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건, 전부 얘 덕분이니까.

잠꼬대로 말랑말랑하다고 헛소리를 내뱉을 만큼 좋아하는 누나 베개를 한동안은 더 빌려줘야 빚을 갚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나도 단단하고 따끈한 동생 베개 마음에 들고.

서로 나쁠 거 하나도 없으니까.

괜한 일이 일어날 일도 절대 없고.

“어제는 누나가 이상한 소리 해서 미안해. …원래 여자는 그…날 가까워지면, 우울해지구 막 그러거든? 그거 때문에 그랬나 봐, 아마.”

“…아, 생리.”

“야, 그걸 입에 담으면 어떡해, 멍청아! 에잇…”

어린 동생을 위해 기껏 돌려 돌려 말해줬건만, 대놓고 그걸 입에 담아버리는 동생 목을 콱콱 깨물어버린다.

어차피 깨버렸으니까 통증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다만 잇자국은 남지 않게.

살짝 침이 묻어서 더럽다고 생각할 법도 한데, 가을이는 뱀파이어같은 누나한테 물리면서도 날 놓거나 밀쳐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꽉 껴안아 줬지.

“…프하. 흐흐. 가을이 피 맛있다.”

“누나 송곳니 무뎌서 잘 안 박히는데.”

“치과 가서 갈아올까? 목에 박히게?”

“안 돼. 그럼 아파.”

이상한 헛소리.

이상한 잠꼬대.

이상한 짓이나 저지르며 킥킥대는 남매의 아침이, 이토록 달콤한 거라곤 알 수가 없었다.

나 말고,

가을이 말고 이 달콤함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무런 대가 없이 정을 줄 수 있고,

아무런 부담 없이 정을 받을 수 있는 사이는,

고작해야 부모자식밖에 없잖아.

나이 비슷한 혈육끼리는, 싸우지만 않아도 다행일 텐데.

넌 가끔 엄마아빠보다도 어른스러우니까.

자꾸 기대고 싶어진다.

“히히…, 아무튼. 일어나자. 아침밥 먹어야지. 누나가 차려줄게.”

“아침은 원래 내가 차렸잖아. 맨날.”

“작년 얘기를 이제 와서 해봤자 의미 없거든? …얌전히 누워있어. 가을이는 평생 누나 밥이나 얻어먹으면 되니까.”

“뭔 평생이야, 평생은.”

“평생이야, 평생. …너 여든 살 먹어도 네가 내 동생인 건 절대 안 변하거든? 누나는 그때 여든 세 살일 테니까.”

힘들 땐 기대고 싶고,

날 돌봐줬으면 좋겠고,

힘들면 버팀목이 돼주고 싶고,

내게 신경 써줬으면 좋겠고,

내가 차린 밥을 먹어줬으면 좋겠고,

시간 나면 같이 놀러 가고 싶고,

밤에는 꼭 붙잡고 쿨쿨 잠들고 싶고,

잠깐만 떨어져도 외로워서 참을 수 없는 사람을,

난 동생이라고 부르기로 정했다.

“뭐, 한 번이라도 누나답게 행동하고 그런 소리를….”

“네가 동생답지 않으니까, 누나가 누나답지 않은 거잖아, 바보야. …너도 힘들 때 되면 누나가 누나답게 돌봐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이 애늙은이야.”

“…예예.”

그야, 원래부터 동생이었으니까.

내가 태어날 때부턴 아니어도,

네가 태어날 때부턴 그랬잖아.

내가 아무리 널 좋아해도,

네가 날 아무리 아껴줘도,

우린 남매.

…그래서 좋다.

절대,

이 관계가 변할 리는 없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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