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걸즈 토크
* * *
한성이 백화와 놀고 있던 그 시각 집.
“새로운 대장님을 위하여~~!”
“위하여~~~!!!”
밖에서 들려오는 즐거운 술자리의 소리.
그 소리에 나영은 오래간만에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아마 나가서 같이 마셨다가는 엄청 혼나겠지…?’
그래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조금의 눈치는 생긴 나영은 합류보다는 새로운 술판을 벌이기로 했다.
‘이제 오빠도 돌아왔으니까!’
한성이 떠난 나흘 동안의 금주령.
한성이 돌아온 이상, 나영을 말릴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술 파티를 결심한 나영은 온 집안의 사람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술 마시자!!!”
“술!!!”
“수우우울!!!”
문을 벌컥 열고 “수우울!!!”
하고 외치고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자고 있던 말던, 무얼 하든 말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횡포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부엌으로 끌려 나왔다.
단잠에서 깨어난 다영은 쩍 하품하더니, 언니를 향해 소리쳤다.
“술은 왜 또 술이야!”
“마실 거면 혼자서나 마시지…!”
투덜거리는 말과 달리 조용히 의자를 빼서 앉아버린다.
“그래서 안주는?”
“어…안주? 소현아아아~~♡”
그때 부엌으로 들어온 소현.
나영은 두 살 어린 동생을 향한 아양을 떨면서도, 한낱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저 뻔뻔하게, 그게 나라는 듯이 커다란 두 눈을 껌뻑이며 소현의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 알겠으니까 좀 놔요!!!”
“힝... 소현이가 화냈쏘….”
“화낸 건 아니에요!”
“그치~?”
푹 숙였던 얼굴을 들자, 나영의 얼굴엔 생글생글 미소가 가득했다.
‘...그냥 덜 친했을 때가 좋았을지도?’
이제는 너무나도 친숙해진 모습에 불만을 터트리면서도 소현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폈다.
각자 그저 자신의 안위만 챙기기에 바빴던 때와 달리 지금은 서로 기대기도 칭얼거리기도 하니까.
나영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사실 좋았다.
머리도 항상 예쁘게 잘 정리해주고, 화장법도 배웠다.
가끔 이렇게 부려 먹는 것쯤이야.
“뭘 먹을까요~~?”
냉장고 문을 붙잡고, 알 수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메뉴를 정하던 소현이의 눈에 냉동 치킨이 보였다.
예전에 한성에게 실컷 아는 척을 하며 해동해서 튀겼던 냉동 치킨.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알고 보니 냉동 상태로 튀기는 것이 맞았다.
“치킨 할까요? 저녁이니까 에어프라이어로?”
“굿!!! 소현이 최고!!!”
15분 뒤.
화장실을 다녀온 아람이와 세연이를 안고 있는 유나까지 모여, 온 집안의 여자들이 치킨을 둘러싸고 앉았다.
“그럼 우리도 마시자아아~~♡”
“짠~~!”
불평을 터트린 것 치고는 다들 인상이 밝았다.
한성도 무사히 돌아왔고, 사람들도 잔뜩 추가되어서 어딘가 마음이 푹 놓인 탓이었다.
이왕이면 한성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마음은 모두 같았던지, 아람이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주인님은 어디 갔어요?”
“뭐 할 일 있다고 캠핑카 끌고 나갔어.”
약간 퉁명스레 대답한 다영의 말에 소현이가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할 섹스가 있어서 나갔겠죠.”
“…….”
그 말에 다들 이견이 없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불만을 공유한 여자들.
그리고 술.
완벽한 뒷담화의 시간에 나영이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고는 불만을 토로했다.
“또 여자 챙겨왔어!”
“…….둘.”
친절하게 숫자까지 더해주는 다영이.
사실 이곳 여자 중 가장 불만이 많은 소현이도 동조했다.
“맞아요! 있는 것도 다 못 먹어놓고서!!!”
“켁…!”
당돌한 소현이의 말에 맥주를 마시던 다영이가 사레들었다.
“왜요...! 이제 다들 알잖아요...! 저 그, 그런 거….”
“응....”
모두가 그 말에 숙연해진다.
발정이라니.
너무나도 음란한 증상을 겪고 있는 집안의 귀염둥이를 향한 잠깐 묵념의 시간이 있었다.
그것도 잠시.
술을 홀짝이던 아람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어때?”
발정.
마조의 입장에서는 내심 부러운 일이었다.
페로몬을 맡고 달아오른 몸을 취하지는 않고 젖꼭지만 꾹꾹 씹어대는 모습을 상상했더니….
“으아으으... 좋을 거 같은데….”
질문을 하고 몸을 부르르 떨어대는 아람이.
“뭘 또 물어요!!! 그리고 전혀 안 좋거든요?!”
“왜~ 나도 궁금해~!”
“...사실 나도.”
“꺄아~~!”
온 집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소현에게 향했다.
다들 하나같이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새로운 먹잇감에 이빨을 내보였다.
“그러니까요.... 그... 대충 비교하자면 생리 전의 10배?”
“10배…?!”
다들 조심스레 자기 감각을 되새겨보았다.
며칠 동안 보지가 봉인되는 것에 대한 보상심리.
그 탓에 생리 전에는 알게 모르게 몸이 근질근질하곤 했다.
그런데 심지어 10배라니...!
다들 조용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
“...불쌍해.”
“...주인님이 나빴어.”
한성에 대한 불평이라곤 입에 담기도 힘들어하는 아람이마저 한성을 나무랐다.
“그러면 계속 그 상태가 계속되는 거야?”
“따, 따로 해결하면 괜찮아져요.”
“아.”
“샤, 샤워에요! 냉수마찰!”
잔뜩 얼굴을 붉힌 소현이는 맥주를 꼴깍꼴깍 마시며 표정을 숨겨보았다.
하지만 능글맞은 나영이의 농담을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
“아~ 냉 수 마 찰?”
“네!”
“마찰은 맞는 거 같은데에~?”
“냉수마찰이요!!!”
그러자 아람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나랑 소현이랑 언니랑 셋이서 같은 방 쓰는데, 소현이는 그런 거 한 적 없는데요?”
“냉수마찰 했어요!!!”
빼액 소리를 지르는 소현이를 뒤로하고,
여러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청소할 때?”
“아, 혹시 부엌에서?”
“당연히 화장실에서 했겠지~ 냉수마찰이니까.”
“안 했어요! 아, 아니 화장실에서 했어요! 내, 냉수마찰….”
그런 가운데 홀로 가만히 입을 닫고 있었던 유나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언니는 왜 아무 말이 없어요?”
“어…? 어? 그… 그냥?”
그냥이라 말하지만, 누가 보아도 그냥은 아니었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나영.
“언. 니.”
자신의 잔에 맥주를 반 잔.
거기다가 소주로 나머지 반을 채워 맑은 색의 폭탄주를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그 잔을 유나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나 술 못 마셔!”
“왜요? 이제 수유도 안 하잖아요.”
세연이는 이제 모유를 끊고 분유로 갈아탔다.
다만, 새로운 수유 대상이 생긴 탓에 유나는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수유 잘만 하던데요?”
이번에도 딴지를 걸어온 것은 소현이였다.
“야아아!!! 나는 조용히 있었는데...!”
“뭘요?!”
찔릴 것이 없다는 듯 당당해진 소현이에게 유나가 귓속말했다.
‘너 식량 창고에….’
“아으으으악!!!”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곧장 유나의 입을 막아버린다.
“으으읍…!”
“유나 언니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꺄아아아~!”
그때 세연이가 두 손을 힘차게 바둥거렸다.
그 순간 소현은 대화의 주제를 돌릴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을 떠올렸다.
"저는 불쌍한 축에도 못 들어가요!"
“왜???”
사람들의 물음에 소현은 세연이를 가리켰다.
“능력자들끼리는 친밀감을 느낀다고 했어요. 세연이 봐요, 처음엔 저랑 오빠밖에 안 좋아했죠?”
“아, 그러네?”
“그럼 우리 세연이가 능력자란 말이야?!”
유나가 세연이를 꼭 안고 기쁨의 소리를 질러왔다.
“우리 딸 대단하네~ 무슨 능력이 있어? 엄마한테만 말해봐 응?”
“꺄아아아!”
불쌍하다는 말은 잊어버리고 잔뜩 신이 난 유나와 달리, 다영이는 그 상황을 상상하고 있었다.
능력자인 세연이.
세연이가 아빠라 부르는 한성.
지금은 아무렇지 않지만, 사춘기가 지나고 나면….
“에이~ 그때쯤 되면 다른 애들도 생기겠지.”
“새…생겨요?!”
그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소현이가 말을 더듬었다.
생겨?
어떻게?
왜?!
생명의 탄생. 그 신비로움을 생각했더니 절로 얼굴이 붉혀진다.
그리고 그 시선은 자연스레 다영이에게로 향했다.
“그… 생겨요?”
“으…?응.”
“언제요...?”
“오빠가 풀면...?”
부끄러워하긴 하지만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다영아 너 진짜 임신할 거야? 벌써? 너 아직 20살이야!”
“뭐… 어릴 때 낳으면 아기도 건강하고 산모도 건강하다고 하고….”
“와….”
벌써 임신까지 생각하는 동생의 모습에 나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왜…?”
아기는 딱히 싫어하지는 않지만, 벌써 임신하고 싶다는 동생의 말은 이해되지 않았다.
아직 20살.
곧 21살이 되긴 하다지만, 엄마가 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이유일지도 모르는데.”
“왜? 뭐가?”
잔뜩 뜸을 들이더니, 이유를 말해왔다.
“왜 소설이나 영화에서 왕이나 귀족들 보면, 저...정실부인이 애를 낳아야 하잖아? 그러면 반대로 임신을 먼저 하면…. 아, 물론 오빠도 좋아하니까 그래서 아기도 가지고 싶은 것도 맞고….”
중얼중얼 뱉어낸 다영이의 본심.
다영이의 걱정과 달리 다들 별로 큰 반응은 없었다.
“다들 생각보다 안 싫어하네?”
“왜 싫어해?”
“언니는 내 언니니까 그렇지.”
“나도 상관없어.”
아람이도 담담하게 대답해왔다.
“왜…?”
오히려 의문을 뱉어오는 건 다영이 본인.
그 말에 아람이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내가 주인님 거지, 주인님이 내 건 아니니까.”
아람이다운 대답에 소현이만 이상한 소리를 냈다.
“으아어아으…! 야해요!”
“뭐가~? 뭐가 야한데? 뭐가아아~~?”
“아! 언니 자꾸 놀릴래요?!”
티격태격 자기들끼리 놀기 시작한 둘을 내버려 두고, 다영은 유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언니는요?”
“나? 나야 다들 알다시피 과거가 있으니까, 첩이라도 시켜주면 다행이지….”
새로운 여자 둘이 나타난 시점.
집안의 여자들은 딱히 아내라는 칭호에 욕심은 없어 보이는 상황.
다영은 이때다 싶어 말을 꺼내 보았다.
“그러면 다들 응원해 줄 수 있어요…?”
“어떻게?”
“결혼하자고 하면 밀어준다던가….”
한성에 대한 집착은 조금 강하지만, 그래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다영이 안주인이 된다는 것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도 거의 부 리더격으로 행동하고 있기도 했고.
누군가 본처를 정해야 한다면 그건 다영이어야 한다고 무심결에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다.
“응.”
“나도 좋아.”
아람이와 유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영이 두 사람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 고마워요. 언니...!”
그때.
장난을 치고 있던 나영이와 소현이가 다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겨,결혼은 나도 하고 싶은걸…!”
“그, 그러니까 왕비 같은 걸 하고 싶다는 거지, 언니보고 결혼하지 말라는 건 아니야.”
“아? 그래? 그럼 나는 괜찮은 것 같아.”
정실이니 첩이니.
나영은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호칭과 총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자기 외모와 색기에는 자신이 넘치는 나영이었기에, 동생의 당돌한 요구에도 별다른 거부감은 없었다.
다만 소현은 조금 다른 듯 보였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저는 안 괜찮아요.”
“...응?”
“안 괜찮아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은 말에 또록또록한 목소리로 다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대답했다.
“안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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