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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멸망한다는 계시를 받았다-171화 (171/224)

〈 171화 〉 수력발전소

* * *

내게 도착한 병사들은 익숙한 움직임으로 반원의 방진을 그린다.

뒤는 두더지가 만든 낭떠러지.

사방에서는 산기슭을 타고 좀비들이 몰려든다.

고개를 어디로 돌려보아도 그곳에는 흉측한 모습의 좀비들이….

어, 쟤는 좀 예쁜 거 같기도 하고?

자세히 보니, 분명 TV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아이돌이었던가?

배우였었나?

“아아... 비참한 일이네.”

“...맞아요.”

다영이는 내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아마, 내가 주차된 차를 보며 느꼈던 그런 감정들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였겠지.

“우리는 다를 거예요.”

살짝 즈려문 입술, 또렷이 힘준 눈매가 그 의지를 내보인다.

다영이는 허벅지에 멘 화살통에서 화살 한 발을 꺼내, 능숙한 자세로 시위에 걸어서 당겼다.

찌이이익­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새빨간 입술을 살짝 짓눌렀고,

퉁.

깔끔한 소리와 함께 날아가, 그 여자 좀비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어우....”

“네? 왜 그래요?”

“아니야, 그냥 생각보다 훨씬 잘 쏘길래.”

그것으로 잠깐의 여유가 끝이 났다.

“일하자.”

*

‘...죽을 거야.’

밀려드는 좀비들을 바라보자, 자연스럽게 그런 절망스러운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1당 100의 전사.

말은 쉽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들은 지치지 않지만, 우리는 지친다.

저들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엄마....”

병사는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을 찾으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말릴 때 들을걸.

그냥 조용히 농사나 하면서 지낼걸.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에 맞춰 새로운 삶에 도전해보겠다는 무모한 생각을 수도 없이 반성하지만,

그럼에도 역시나 과거의 선택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의 눈은 좀비들의 날카로운 이빨에 고정되었다.

이미 무엇을 씹은 듯, 붉게 물든...

‘이제 저 이빨이 내 목을....’

“정신 차려!!!”

후회 속에 멍하니 망연자실하고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잠시.

어깨를 잡아채는 강한 손길에 병사는 고개를 돌려 그 손의 주인을 마주 보았다.

옆자리의 남자는 그의 뺨을 거칠게 잡아 눈을 마주했다.

“죽을 거야?”

“아, 아닙니다!!!”

그 또한 같은 처지의 군인.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생을 향한 짙은 열망이 가득했다.

“이름이 뭐야?”

“...현수요.”

“신기하네? 나는 상수인데.”

투명한 전경 방패 너머로는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는 좀비들의 무리가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앞에는 좀비.

옆에도 좀비.

사방이 좀비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통성명이라니?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현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상수의 표정에는 약간의 여유로움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 무섭지 않으십니까?”

“무섭지.”

대답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뱉어져 왔다.

‘역시....’

상수 또한 자신과 다름없는 힘없는 일개 병사.

그들의 뒤에 선 능력자들과는 다른, 방패병에 불가한 남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무서운데, 기대도 돼.”

“...네?”

“우리 형님이 좀 대단하거든? 존경스러울 정도로.”

그의 형님이 누구고,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 상황 속에서 웃을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런 사소한 의문을 지속하고 있을 시간조차 남지 않았다.

“준비해. 온다.”

현수는 눈을 질끈 감고서 충격에 대비했다.

퍼버벅­

쿵!

방패에서 느껴지는 작은 진동.

첫 충격은 예상한 것보다는 훨씬 덜했다.

반면에 그 소리와 냄새는... 예상과는 다른, 현수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것이었다.

“으으.... 씨발.”

상수의 욕설에 눈을 뜬 현수는 가만히 얼어붙었다.

비스듬히 선 방패에 몸을 뉜 좀비.

그 머리는 어디론가 사라진 채, 턱의 반절 정도만을 남겨 자신의 구강구조를 훤히 내보이고 있었다.

그 때, 부대를 지휘하는 성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밀어!!!”

“밀어!!!”

우렁차게 터져 나오는 복명복창.

현수 또한 뒤늦게나마 그 말을 따라 외치며 방패를 밀쳐냈다.

“미, 밀어...!”

방패가 시체를 밀어내자 그 자리를 새로운 좀비들이 채워간다.

그리고 누군가 그 머리통을 박살 낸다.

그들의 뒤를 지키는 능력자들의 활약이었다.

“아...!”

전투는 그런 일련의 반복이었다.

방패에 몸을 기댄 채 힘을 비축하다, 명령에 맞춰 밀어낸다.

그리고 또다시 비축.

다시 밀기.

그때마다 좀비는 머리를 잃고 바닥으로 흐드러졌다.

‘살 수 있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몸은 지쳐갔지만, 희망은 점차 강해져 갔다.

하지만 그 희망을 짓밟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백골의 비명소리.

“끼에에에에에엑!!!!”

일반 좀비들은 어디까지나 소모품.

그들의 본 전력이 백골의 명에 따라 그 모습을 드러낸다.

두더지 변종이 땅을 뚫고 튀어나왔고, 구멍에서는 각종 변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더지, 곰보, 로쿠로쿠비.

종류도 다양하지만, 그 숫자는 셀 필요가 없을 정도.

많다.

그냥 빌어먹게 많았다.

“...어라?”

“혀, 형님이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거 맞죠?”

“글쎄...? 아마도...?”

육체형 변종, 곰보는 그 거대한 팔을 휘둘러 자신의 앞길을 막아대는 좀비를 날려버리며 진형을 향해 그대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쿵쿵쿵­

땅을 울려대는 육중한 몸체.

그 팔에 담긴 힘은 자신들의 방패를 사뿐히 날려버리고도 남아 보였다.

“온다, 온다, 온다, 으...!!!”

현수가 눈을 질끈 감은 그 순간.

슈우웅~

퍼어어억!!!

축포처럼 퍼져버리는 변종의 머리.

백골의 비명이 그 본격적인 진격을 알려왔듯,

한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드가자!!!”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이었다.

*

“하나 더!!!”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재차 던진 창 한 자루.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한 창은 마치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위아래로 거칠게 꿀렁인다.

슈우웅­

퍼어어억!!!

한성이 일주일간의 수련을 통해 완성한 음속의 창.

그 창은 E=mc2이라는 과학의 공식을 훌륭하게 증명해내며 또 하나의 머리를 분쇄했다.

“형님!!!”

“세 마리 째~!”

자신을 향한 환호에 보답하듯, 한성은 재차 또 다른 창을 쏘아냈다.

분명 한성의 능력은 다른 능력자들에 비해 단순했다.

향상된 신체 능력과 재생능력.

특이하지 않지만, 단 하나의 추가적인 사실이 그를 그 누구보다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끝없는 성장.

성장을 반복한 그는 이미 하나의 전략 병기.

한성의 손에서 출발한 창들이 변종의 목숨을 차례차례 앗아가기 시작했다.

좀비들 사이로 삐쩍 솟은 곰보의 머리가 하나둘 자취를 감춰간다.

압도적인 무력의 향연에 사기 또한 무섭게 치솟았다.

“밀어!!!!!!”

“밀어!!!!!!”

족히 두 배는 커진 목소리.

이미 반쯤 쉬어버린 목으로 병사들은 악에 받친 구령을 토해냈다.

그 목소리는 괴로워 보였으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할 수 있어...!’

“이길 수 있어!!!”

저런 사람과 함께 싸우며 질 리가 없다.

죽을 리가 없다.

버티기만 하면 이긴다.

버티기만 하면.

희망으로 가득 찬 순간.

몸의 무거움은 더 이상 그들을 옭아매지 못했다.

한성이 압도적인 무력을 뽐내고 있을 무렵.

지수는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사뿐히 내려앉은 길고 짙은 속눈썹.

비에 젖은 머리카락과 옷.

그 모습은 어딘가 조금은 야릇해 보이기도, 동시에 성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눈을 감고 선 그녀의 모습은 분명 이질적이나, 그 공간은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고요하게만 느껴졌다.

‘어디지?’

그녀의 능력은 분명 성감이었다.

[뭐? 군인? 지금 자네의 모습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가?]

[노리개로 딱이구만.]

그녀는 모욕적인 혁수의 말에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민감한 것 또한 사실.

그 쓸모가 하나뿐이라는 것 또한 사실.

그녀에게 능력은 능력이 아닌 저주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 저주가 지금 꽃을 피워낸다.

‘거기냐!’

땅속 깊숙한 곳을 움직이는 두더지의 자그마한 움직임조차 그녀의 레이더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백화와 달리 신체의 감각에 특화된 지수의 능력.

하지만 그 덕분일까? 그녀에게는 백화와는 또 다른 특별함이 깃들었다.

인체에 존재하는 다양한 불수의근.

의지의 지배를 받지 않기에 불수의근이었으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감각은 그 근육마저 느끼고 움직이게 한다.

그녀의 의지에 맞춰 심장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분당 300.

심장이 온몸으로 쏘아낸 다량의 산소가 순간적으로 신체의 한계를 벗어나게 한다.

순간적으로 쏘아지듯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간 지수.

그녀가 칼을 내리 꽂은 곳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다음.’

그녀는 또 다른 먹잇감을 위해 또다시 눈을 감았다.

곰보는 접근도 하기 전에 죽어버리고, 땅 밑으로 접근하는 두더지도 제대로 된 공격 한 번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암습이 아닌 전투, 로쿠로쿠비의 기다란 목은 처음부터 큰 장점이 되지도 못했다.

이 싸움이 길어지게 될 경우, 그 승패는 눈에 보듯 뻔한 일.

결국 백골은 변화의 시발점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기로 했다.

육중한 몸을 굴려,

반원의 진형을 부수기 위해 달려 나간다.

“끼에에에에엑!!!!!!”

구르는 과정에서 수많은 좀비가 그 몸에 깔려 터져나갔다.

퍼어어억!

퍼억!

구르면 구를수록 백골은 순백의 색을 잃고 적골이 되었고, 굴러간 길을 따라 레드카펫이 깔린다.

백골, 아니 적골이 방진을 무너뜨리게 되었을 때 일어날 일은 분명했다.

일반 좀비들이 한성의 창을 막아설 것이고, 그 순간들이 모여 변종이 도착할 시간이 된다.

하나가 들어온 이상 끝.

한성은 몰라도, 여타 다른 병사들과 능력자들의 생사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시발!!! 저 새끼는 왜 또 굴러!!!”

욕설과 함께 불만을 토로해보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백골은 죽음을 각오한 채 굴러오고, 한성은 그 돌진을 막아야만 했다.

재빨리 창을 던져 백골의 몸에 꽂는다.

하나, 둘, 셋.

세 발의 창이 그 몸을 수 놓았으나, 백골의 돌진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피해!!!”

희생을 각오하며 회피를 명령한 순간,

겨울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야, 피하라니까!!!”

피부 경화.

조금 단단해서 물리지 않는다는 이점은 있었으나 그뿐인 능력.

결국 겨울은 고기 방패.

그 고기 방패가....

육중한 철벽이 되어 백골의 앞을 막아선다.

쿵—

대형 트레일러가 마티즈를 들이받은 것과 같은 상황.

하지만 자리를 지키고 선 것은 마티즈.

겨울이었다.

“제가 기대하셔도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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