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09. 튜토리얼.
내 상반신을 길게 할퀴고 간 듯한, 소름끼치는 흉터.
화상 흔적 비슷하게 남아있는 흉터는 누가 봐도 심각한 상처처럼 보였다.
나조차도 놀랄 정도였으니 유다희는 오죽할까.
“어, 어…?”
유다희는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의 얼굴에 엿보인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기회다.’
절호의 찬스다.
이 흉터가 왜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지금 당장 알아낼 방법이 없다.
이거 고민할 시간에 이 찬스를 잡는 게 옳은 판단.
이 기회를 놓치면, 목줄 묶인 개새끼 마냥 끌려 다녀야 한다.
그건 정말 노-땡큐.
어떻게든 주도권을 가지고 말겠다.
목소리에 감정을 담아라.
아주 어릴 때 한 번쯤은 배우를 꿈으로 가졌던 적이 있겠지.
그 때의 감정을 떠올려서 유다희를 속여라.
“그래서? 알고 싶은 건 다 알았냐?”
“어…?”
최대한 차갑게 지금 감정을 숨기고 지웠다.
유다희가 떠올리고 있을 ‘실수’에 장작을 던졌다.
의심에 의심이 꼬리를 물고 따라오다가, 얼떨결에 아니었다는 결과를 마주했으니까.
많이 불안하고 초조할 것이다.
나는 반쯤 찢어진 옷을 주워서 인벤토리에 넣고 전투복을 꺼냈다.
안 버려서 다행이다.
전역복이라 버리기가 애매했거든.
“이제 됐지? 가도 되냐?”
“아니…. 아니, 잠깐만…. 왜 아닌데? 왜 아닌 거냐고….”
“도대체 뭔 소릴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괜한 사람 의심하고 몰아붙이기나 하고. 원래 이런 애였냐? 내 꿈에선…. 됐다. 말을 말자.”
“야, 야! 김진우! 잠깐만 기다려보라고!”
떠나려고 등을 돌리자, 유다희가 다급하게 내 앞을 막았다.
얼마나 잽싼지, 민첩2레벨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3레벨로 평가를 수정.
유다희는 내 앞에 서서 파르르 떨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중얼거리는 소리에서 간절함이 엿보였다.
“생각, 생각 좀 하자…. 나도 머리 아파….”
“무슨 생각? 뭐가 더 필요한데. 더 보여줘?”
“아니야. 아니라고. 이러려는 게 아니었어.”
내가 상의를 벗어젖히려 하자 유다희가 말렸다.
더 이상 볼 생각이 없어보였다.
김진우 = 가면남 가설이 완전히 박살난 듯했다.
유다희는 말까지 더듬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미안해. 사과할게. 의심했던 거 정말 미안하고, 이렇게 몰아세운 것도 미안해.”
“아.”
구질구질한 사과.
하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안절부절 못하는 눈빛에서 나를 향한 죄책감이 넘실거렸다.
‘이제 어떻게 하지?’
일단 싸질렀는데 뒤처리가 힘들다.
이대로 물러나면, 그 다음은 어떡하고?
유다희와 평생 따로 다닐 수도 없다.
시바, 유다희가 딴 놈이랑 하하호호 웃는 걸 떠올리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내 옆에 평생 묶어둬야 하는데 어떻게 묶어둔단 말인가.
그 때, 고개 숙인 유다희의 볼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한 번만 용서해줘…. 제발. 나, 너 없으면 안 된단 말이야….”
* * *
유다희가 처음 소환되었을 때, 귀여운 요정이 말했다.
─ 이곳에 소환된 순간부터 원래의 차원으론 돌아갈 수 없습니다. 돌아가고 싶다면 ‘탑’의 끝에 도달하시면 됩니다.
초록빛 피부를 가진 괴물의 머리가 터졌다. 사방으로 피가 뿌려졌다. 머리를 잃은 육체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듯 쓰러졌다.
유다희는 뒤늦게 상황파악을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르면 죽는다, 라고 경고라도 하는 듯했다.
─ 필드보스를 토벌하십시오.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허용됩니다.
손에 닿지 않을 듯 높게 떠있는 요정은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졌다. 어째선지 요정이 하는 말은 코앞에서 말하는 듯 크게 들렸다.
‘뭐야. 여긴 어딘데….’
당황한 유다희 앞으로 코리안 파티의 멤버가 그녀를 데리러 왔다. 동향 사람을 만나 다행이라 생각하며 파티에 합류했다. 거기서 김진우를 만났다.
‘군인이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었다. 전역복과 전역모 때문에 약간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유다희는 김진우를 보고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희야, 도망쳐…!”
정확히 3일째 되는 날, 코리안 파티는 전멸했다. 유다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공포에 질려있는 김진우의 얼굴이었다. 저렇게 무서워하면서 왜 희생하겠답시고….
“아.”
유다희도 얼마 안가 죽고 말았다.
[‘사망회귀’가 발동됩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튜토리얼. 유다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느껴지는 감각은 진짜였다. 죽은 줄 알았는데 되살아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2회차는 오래가지 못했다. 마지막에 보았던 김진우의 얼굴이 계속 떠올라서 혼자 다닌 탓이었다.
[‘사망회귀’가 발동됩니다.]
두 번째 죽음. 세 번째 시작. 유다희는 자신이 죽는 순간 새롭게 시작한다는 걸 깨달았다.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코리안 파티에 합류했다.
그리고 놈을 만났다. 가면을 쓰고 덤비는 남자. 그는 유다희를 제압하고 강간했다. 살아생전 누구도 손대지 못한 유다희를 범했다.
‘죽인다.’
김진우를 다시 만났다. 가면남과 너무도 흡사했다. 체형, 목소리 톤, 냄새까지. 뇌에 강렬하게 박힌 정보들이 가면남을 김진우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닐 거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유다희의 합리화가 심해졌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유 모를 배려가 계속해서 느껴졌다. 세상 살아오면서 무언가를 바라고 하는 호의는 많았는데, 김진우는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김진우는 가면남이 아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다. 의심을 거두려고 계속해서 노력했다. 지내면서 정이 들기도 했고 그와 함께 하면 이상하게 일이 잘 풀렸다. 그와 다른 플레이어 사이에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지곤 했지만 모르는 체하며 넘어갔다.
김진우가 도대체 왜 자신을 범했는가. 이렇게 잘해주면서 왜 강제로 그런 걸까. 자신의 취향을 정확히 맞춰줄 정도로 서로 잘 통하는 사이인데. 가면남이란 미지의 존재만 없었다면 더 가까워질 수 있을 텐데. 정답 없는 의문이 계속되면서 유다희 본인도 너무 답답했다.
“정현재…. 이형우…. 드워프 포렝….”
그러다가, 이번 회차에서 김진우가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름이 나왔다. 그 순간 유다희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겨우 억누르고 있던 의심이, 회귀라는 키워드 때문에 다시금 터졌다. 확인하고 싶었다. 김진우와 가면남이 같은 사람인가. 직접 확인하고 매듭 짓고 싶어졌다.
‘왜 안 보여주려는 건데?’
계속 거부하는 김진우를 보면서 유다희는 확신을 가졌다. 강렬해진 확신만큼 입에서 나가는 말이 격해졌다. 자신을 강간한 남자 앞에서 멀쩡할 여자는 없다.
여기서 김진우의 정체를 밝히고 그를 죽이려고 생각했다. 가면남에게선 본 적 없는 흉터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알고 싶은 건 다 알았냐?”
김진우의 차가운 반응에, 유다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턱 끝까지 차오른 변명들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해왔던 의심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전투복을 꺼내 입고 돌아가려는 그를 보면서 유다희는 무어라 정상적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손을 잡고 왜 나오는지 모를 눈물을 찔끔 흘리며 비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 번만 용서해줘…. 제발. 나, 너 없으면 안 된단 말이야….”
김진우는 유다희의 호소를 듣고도 등을 돌렸다. 그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원래라면 진실을 마주하고 ‘회귀’할 생각이었지만, 김진우 또한 ‘회귀’ 비슷하게 기억을 계승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이대로 ‘회귀’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놓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유다희는 왜 이렇게 그를 의심하게 되었는지 속에 있던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설사 그가 자신을 더럽게 본다고 해도, 김진우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 * *
똑똑똑-.
유다희를 버려두고 여관 ‘쉼터’로 돌아왔다.
혼자 내버려둔다, 라는 선택지는 나로서도 도박의 수였다.
하지만 마지막에 본 유다희의 얼굴은, 진심으로 후회하는 얼굴이었다.
왜 이런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인지.
소설을 다 읽은 나조차 이해할 수 없지만.
유다희는 분명 나에게 미안함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인가?
우리 사이에 그 정도의 상호교류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언컨대 없었다고 답할 수 있다.
소설 속 정보를 통해 잘 보이려고 온갖 구애를 펼치기는 했지만.
그, 알잖아.
기묘한 썸씽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내가 본 것을 믿고 주사위를 던졌다.
아니면 다음 회차에서 모르쇠로 밀고 나가려 했다.
어차피 반쯤 넘어와서 괜찮으리라.
─ 진우야. 나랑 얘기 좀 해.
그 결과, 유다희는 아직도 ‘회귀’하지 않고 내 방문을 두들겼다.
이번 회차에서 풀고 싶다는 의미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 풀 생각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지만.
나름 마지막 수가 있으니까 찾아온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문앞에 서서 여전히 화가 났다는 티를 냈다.
“무슨 얘기? 아까 전에 이미 다 끝나지 않았나?”
─ 얼굴 보고 내 말 좀 들어줘. 아까 전 일은 미안해.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부탁하는 유다희.
정말 처량하고 불쌍하게 다가왔다.
지독하게 저자세로 나오니, 양심의 가책이 심하게 느껴졌다.
차마 더 끌기가 애매해서, 지금 상황을 강하나가 듣고 있을까봐, 일단 문을 열어주었다.
“그거 뭐냐?”
유다희는 맨손으로 오지 않았다.
소주를 양손 봉투에 가득 담아서 들어왔다.
“…술이야.”
“그건 아는데 왜 들고 왔냐고.”
“얘기가 길어질 거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