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12. 속이는 자만 있는.
고블린, 놀, 코볼트에게서 생명력을 절반씩 뽑아냈다.
당장 죽는 것보단 낫다는 무적의 논리로,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생명력을 흡수했다.
덕분에 골렘을 잡을 수 있었다.
골렘의 코어가 깨지면서 던전이 클리어 됐다.
생각보다 빠르게 깼다.
‘생명력’을 자원으로 쓴 ‘흑마술’의 위력 덕분이었다.
‘생명력’과 ‘영혼’의 차이를 잘은 모르겠지만, ‘생명력’ 쪽이 위력이나 효율 면에서 훨씬 좋았다.
[‘육신강화’가 해제됩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다.
흡수한 ‘생명력’에 비례하여 내 육신을 강화시켜주는 플루토의 ‘흑마술’, 잠깐이지만 행복했다.
“케륵! 우리가 해냈다! 케륵!”
“컹!”
“스슷, 그런 힘을 숨겨놓고 있었나.”
이 새끼들은 흑마술의 정체를 모른다.
문명 수준이 많이 열등해서 그렇다.
그러나 밖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눈을 피할 순 없다.
특히 엘레나 트리가드.
엘프의 눈을 피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흑마술’을 사용한 이유는 간단.
‘어차피 회귀할 거니까.’
오늘 하루만 살 새끼에게 고향의 원한이니 부모님의 원수니 하는 건 아무런 쓸모가 없다.
엘레나도 체면이 있지, 오늘 막 테스트를 마친 뉴비 플레이어를 죽인다?
절대 불가능하다.
‘투쟁의 탑’ 내에서도 파벌이 있다.
정치가 이루어진다는 거다.
나에게 손 하나 까딱하는 순간, 상대 진영에 명분을 주는 것뿐이다.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빠르게 움직이니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다.
“케륵! 이렇게 가까웠다니.”
고블린 샤먼이 멍청하게 놀랐다.
존나 느리게 움직일 땐 언제고.
8번 통로 밖으로 나가자, 다음 파티가 통로로 들어갔다.
테스트는 계속되고 있었다.
“김진우!”
이미 클리어하고 나온 유다희가 호다닥 이쪽으로 다가왔다.
파티 잘 만나서 스크린으로 관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 멀쩡하네?”
“포션 받았잖아. 효과 좋더라.”
“흠…. 골렘한테 세게 맞은 거 아니었어? 어디 다친 거 아니지?”
“안 다쳤어.”
유다희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끝내 말을 꺼내진 않았다.
주변의 시선이 노골적이어서 서로 대화하기가 부담스러운 분위기였다.
“그, 다들 나만 보는 거 같은데. 자의식과잉 아니지?”
“아니야. 진짜로 전부 너희 팀만 보고 있었어. 좆ㅂ…. 아니, 최약체 팀이라고 다들 관심가지던데.”
하긴, 잘하는 애들 칼질하는 것보단 못하는 애들 구르는 게 더 재밌긴 하지.
“관심은…. 나쁘지 않네.”
말했다시피, 나는 관심종자에 조금 가깝다.
플레이어 하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걸음걸이부터 거만함이 뚝뚝 떨어졌다.
난쟁이 님프 주제에 건들거리니 우습기만 했다.
“거기. 너. 따라와라.”
님프 플레이어는 나를 가리키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엘레나는 흑마술에 과하게 집착한다.
유다희와는 적당히 선을 지키며 상부상조 하는 사이라 그 이상은 잘 모른다.
그냥, 부모님과 고향의 원수라는 것 정도.
“어디 가는 건데?”
“몰라.”
“방금 나왔잖아. 쉬게도 안 해주나?”
“어쩔 수 없지. 약한 게 죄니까.”
유다희는 내가 해야 할 불평을 대신 했다.
약한 게 죄다.
약하면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너는 따라오라고 한 적이 없는데?”
“아.”
님프가 유다희를 흘겨보며 말했다.
유다희는 멍청하게 서서 나를 바라봤다.
멋쩍은 듯 머릴 긁적거리는 유다희를 놔두고, 나는 님프 플레이어를 뒤따라갔다.
“엘레나 님 앞에서 말조심해라. 헛소리 하거나 한다면 내가 너를 죽여 버릴 테니까.”
“예.”
플루토의 흑마술 때문에 부르는 것이다.
근데, 소설 속에선 이런 경우가 없었다.
즉, 지금부턴 아예 본 적 없는 상황이란 소리다.
엘레나가 시작부터 적대적으로 대하는 경우는 아예 없어서, 솔직히 많이 긴장된다.
님프는 나를 데리고 공터에서 벗어나 한 건물로 향했다.
아카데미에서 엘레나가 머무는 건물이었다.
2층짜리 건물을, 엘레나 혼자서 쓴다.
누구는 10평 좀 안 되는 방에서 지내는데, 존나 부럽다.
“들어가면 된다.”
건물 정문 앞에서 님프가 등을 돌렸다.
셔틀이 질럿 떨구듯이 여기 이렇게 두고 간다고?
미친 새낀가?
나는 어딘가 모르게 위압감이 풍기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는 아무도 없어서, 소름끼치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도대체 뭐 어쩌라고….”
님프 새끼는 왜 나를 그냥 두고 간 것일까.
엘레나가 불렀으면 엘레나 앞까지는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소설 속 묘사를 기억해서 엘레나가 있을 법한 방을 찾아갔다.
똑똑똑-.
─ 드, 들어오세요.
목소리가 많이 부드럽다.
내 생각보다 날 선 말투가 아니었다.
나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엘레나가 앉아있었다.
띵-!
엘레나를 보자마자, 이상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일정 범위 내에서 ‘플루토의 노예’가 확인됩니다.]
“……?”
‘플루토의 노예’, 그게 뭐야?
듣도 보도 못했다.
“앉아요.”
엘레나는 갑옷이 아닌 가벼운 차림으로 나를 반겼다.
속이 다 비치는 나풀나풀한 속옷…?
속옷 맞지? 그, 네글리젠가 그건데.
흑마술사를 증오하는 여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허물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엘레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푹신푹신해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엘레나는 차를 한 잔 내주며 말했다.
이상하게 얼굴이 들뜬 것 같았다.
“후우, 저도, 당신도,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본론부터 말할게요.”
“예.”
이유는 모르겠는데,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소설에서 흑마술사를 대하던 태도가 아니었다.
죽일 듯이 지랄할 줄 알았는데.
“저는 오늘, 당신이 테스트 때 쓴 마술에서 플루토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예.”
“분명 당신은, 플루토와 관련된 사람이겠죠?”
“굳이 따지자면, 맞습니다.”
“후우, 드디어 찾았네요. 다시 한 번 물을 게요. 플루토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엘레나는 흑마술사를 증오하는 엘프 기사단장이다.
그 포지션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말투.
강당이나 시험장에서 보이던 강압적이던 태도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존중하는 듯한, 그런 태도여서 오히려 낯설었다.
유다희를 대할 때보다 더 정중한….
‘플루토의 노예가 문제인가?’
소설에선 플루토 같은 존재가 안 나왔다.
흑마술사가 여럿 있기는 했지만, 뭔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근데, 얼떨결에 얻은 히든피스가 이렇게 굴러가나?
나는 플루토와의 관계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리치’, 라는 흑마술사 궁극의 경지에 이른 플루토가 나한테 강제로 ‘흑마술’을 쑤셔 넣었다.
그 과정에서 친분이라든가 정이라든가 뭔가 나눈 기억은 없는데.
엘레나의 묘하게 달짝지근한 눈빛, ‘플루토의 노예’, 거기다 은은하게 빛나는 엘레나의 하복부.
“…제자입니다.”
“플루토는 어디에 있죠?”
“죽었는데요.”
“아….”
이상한 비석 아래 공동에 앉아있지만 굳이 말해주진 않았다.
어차피 찾아갈 방법도 없고.
엘레나는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꼭 잡았다.
그러다가 시뻘게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얘가 도대체 왜 이럴까 싶을 정도로, 기괴한 반응이었다.
“흐, 흐읏…. 플루토…. 이 빌어먹을 새끼….”
엘레나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중얼거렸다.
욕까지 내뱉는걸 보니 어지간히 분한 모양.
잘못 했다간 불똥이 튈 것 같았다.
그래도, 뉴비를 건드리진 못하겠지.
나한테 일 생기면 다 같이 좆 되는 거야.
엘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뭔가를 갈구하는 듯한, 간절함이 깃든 눈빛이었다.
“후으…. 플루토의 제자라면, 흑마술 쓸 줄 알겠죠?”
“대강은요?”
“복종서약도?”
“복종서약?”
나는 흑마술 리스트에서 ‘복종서약’을 찾아봤다.
“아. 예. 쓸 수 있네요.”
대신 대가가 존나 컸다.
사람 다섯 명 정도는 뒈져야 할 것 같다.
그 마저도 스킬 레벨 때문에 존나 허접한 수준일 것이다.
“복종서약으로 생긴 제한들을 해제할 수 있나요?”
“해제는….”
잘 살펴보니, ‘플루토의 노예’는 ‘복종서약’에 의해 만들어진 지위이고, ‘복종서약’은 세부적으로 여러 제한을 걸 수 있었다.
자살방지, 살인금지, 마력봉인, 뭐 등등.
제한 강도에 따라 필요한 생명력도 달라졌다.
근데 웃긴 것은, ‘복종서약’을 위해선 피지배대상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년은 지가 동의해놓고….’
이제 와서 탈출하려고, 플루토 제자 코스프레 중인 나한테 쇼부 보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을 거 같긴 한데요….”
“그럼 해제 부탁드릴게요. 보상은 원하는 만큼 해드리겠습니다.”
엘레나가 허공에 대고 인벤토리를 만지작거렸다.
10이라 적힌 금화가 툭 떨어졌다.
1코인이 1동화,
1,000코인이 1은화,
1,000,000코인이 1금화,
10이라 새겨진 금화는 무려 1천만 코인.
“선금이에요.”
이렇게 가벼운 금화가 인벤토리에 들어오면 1천만으로 바뀐다.
무려 1천만.
겨우 1만 코인에 바들바들 거리던 박철언이 떠올랐다.
“한 번 해볼게요.”
플루토에게 복종서약을 한 건데, 그걸 내가 풀 수 있을까?
[플레이어 엘레나 트리가드의 ‘복종서약’을 해제하시겠습니까?]
“오, 가능하네요.”
이게 어째서 되는 건지 의문이었다.
대강 끼워 맞추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플루토와의 강제 계약을 통해 그의 흑마술을 계승하면서 복종서약의 주인도 나로 넘어왔다….’
편하게 생각하면 의외로 간단했다.
‘그러면 뭐야.’
엘레나의 ‘복종서약’이 내 것으로 바뀌었다면, 그녀의 주인도 플루토가 아닌 나로 바뀌었단 뜻이다.
개꿀인데?
“저기요? 아직 ‘복종서약’ 해제가 안 됐는데요?”
엘레나는 여전히 빛나고 있는 하복부를 흘겨보았다.
아마도 저게 ‘복종서약’의 증거인 듯했다.
플루토 새끼, 취향 참 독특하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간단한 명령 하나를 내렸다.
플루토와 엘레나 사이에서 이루어진 ‘복종서약’에 대해, 나는 자세한 내용을 모른다.
어디까지 제한이 걸려있는가, 그게 궁금했다.
“그, 속옷 좀 들어보쇼.”
“자, 잠깐…!”
엘레나는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옷을 들어올렸다.
깨끗한 보지, 하복부에 새겨진 요상한 문신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이, 이 새끼가…! 죽고 싶어!? 당장, 당장 명령 취소해!”
“몸은 따르는데 입은 또 험하고…. 플루토 새끼, 취향 존나 지리네?”
스승, 아리가또.
나중에 회귀하면 한 번 들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