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17. 소문.
일반 토병 정도는 손쉽게 처리했다.
그 말은 즉, 일반 토병으로는 코인 말고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었다.
“숲으로 들어가 보자.”
유다희는 검과 방패를 들고 앞장서서 걸었다.
파티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꼽으라면 엘로인이지만, 엘로인은 앞에 나서거나 하지 않고 뒤에서 얌전히 따르기만 했다.
엘리샤가 유다희 옆에 붙어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짧다면 짧은 평지를 지나 숲으로 들어갔다.
언제 어디서 토병들이 나타나 덮칠지 모르기에, 잔뜩 긴장한 상태로 움직였다.
스스슷-.
얼마나 움직였을까.
흙바닥이 솟구쳤고, 토병이 생성됐다.
무기는 아니지만 흙으로 된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봉이라고 생각하면 적당할 막대기였다.
“넷이니까, 하나씩 막아요.”
여기서 전투력이 가장 약한 플레이어는 엘바런이다.
나와 비슷한 수준인데, 나한테는 그림자 정령이 있다.
2대1이라면 나보다 조금 강한 토병을 상대로도 승산이 있었다.
토병은 나를 향해 봉을 휘둘렀다.
무술이 입력돼있거나 하진 않은 듯했다.
신체스펙을 제외하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존나 아프네…!”
그 신체스펙이 흉기에 가깝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방패로 막았는데도 팔이 저리다.
잘못 맞으면 바로 부러지는 게 아닐까.
그럼 포션을 사서 마시는 수밖에 없다.
근데 이곳은 아카데미가 아니라서 포션이 존나 비싼 게 문제다.
아카데미 포션은 ‘시스템’ 때문에 들고 올 수도 없다.
철저하게 아카데미에서만 쓰라고 마련해둔 서비스라고 할까.
‘최대한 피하자.’
그래서, 위험한 역할은 그림자 정령에게 맡긴다.
저 새낀 맞아도 안 아플 테니까.
─ 끼엨!
“쉬이잇!”
토병의 봉을 몸으로 막아낸 그림자 정령이 비명을 질렀다.
이 새끼가 소리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아직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놈을 향해 검지를 세워 보이며 경고를 날렸다.
“존나 아픈 척 하네.”
그림자 정령은 자기 왼팔을 손으로 문지르며 우물쭈물 망설였다.
탱커 역할하기 싫다고, 딜러하고 싶다고 시위하는 듯했다.
근본이 고대정령이라 그런가, 자연정령보다 자기주장이 훨씬 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토병의 어그로를 가져왔다.
퍼억-!
주고받는 공방.
데미지가 축적되고 있다.
서로를 갉아먹는 난잡한 전투였다.
다행인 점은 나 말고 다른 쪽도 바쁘다는 것이 위안거리가 되어주었다.
“흐압!”
…방금 막 엘로인이 토병을 썰었다.
마나가 넘실거리는 검은 토병 따위를 손쉽게 베었다.
“엘리샤 공주님! 도와드리겠습니다.”
엘로인은 엘리샤에게 붙었다.
엘리샤는 전위가 생기자마자 토병을 깨부수었다.
‘이러다간….’
또 나만 남아 구경거리가 되고 만다.
당장, 토병을 무찔러야 돼.
하지만 방법이 없다.
지금 내 수준에선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장기전이 필수였다.
한 방을 노릴 수 있는 기회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
나는 잊고 있던 보호색을 떠올렸다.
코볼트에게서 전수받은 허접한 보호색.
플레이어 상대론 훤히 보여서 쓸모가 없지만, 이 병신 같은 토병에겐 통할지도 모른다.
[‘보호색’이 발동됩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주변 공기와 동화한다.
그 순간, 토병이 얼을 타며 그림자 정령을 공격했다.
─ 앜!
그림자 정령이 두들겨 맞고 있다.
후두둑, 흩날리는 내 그림자.
나는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완벽한 찬스, 토병을 향해 몸을 던졌다.
날카롭게 빛나는 검으로 토병의 목을 그었다.
토병 대가리가 데구르르 흙바닥을 뒹굴었다.
가루로 변해 사라지는 토병.
깔끔한 승리였다.
“다희야!”
“…아으…. 괜찮아. 걱정 마. 안 도와줘도 돼.”
내가 토병을 무찌르는 사이, 유다희가 토병에게 얻어맞고 흙바닥을 뒹굴었다.
바지가 흙으로 범벅이었다.
그다지 아파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조금 쪽팔렸는지, 엘레나를 흘겨보다가 투구를 제대로 썼다.
유다희는 몇 합을 겨루더니 토병을 쓰러뜨렸다.
---
[전투 정산 중…….]
[1,200코인 획득!]
---
전투 정산이 이루어졌다.
전투 난이도에 비해 코인 수급이 제법 쏠쏠했다.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더 가도 되겠어?”
“남자는 빠꾸 없지.”
“…그래….”
유다희는 나를 한심하단 듯 쳐다보고 앞으로 걸어갔다.
수인들이 알려줬던 방향으로 끊임없이 나아갔다.
그러다가 넓게 펼쳐진 호수에 도착했다.
우리 맞은편에서 한 소년이 호수를 향해 손을 뻗고 온갖 지랄 아닌 지랄을 해대고 있었다.
1층 거주민 중 하나.
0층과 다른 점은, ‘안전지역’이 아닌 밖에서 지낸다는 것.
이 소년 주변에는 토병이 생성되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다.
“…네가 가봐.”
“내가? 왜?”
“애들도 남자보단 예쁜 여자가 더 좋을 테니까.”
“…그냥 같이 가.”
나는 유다희의 등을 떠밀었다.
못 이기는 척 소년에게 다가가던 유다희가 갑자기 뒤로 돌아보며 물었다.
“흐흠, 그 말은, 내가 예쁘다고 생각한다는 거네?”
“어? 말투가 왜 그래.”
“…뭐! 말투가 뭐! 넌 그냥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
“어….”
유다희가 멈춰서는 바람에, 우리 모두 제자리에서 어색하게 서버렸다.
“저희는 따로 있는 걸로 해요. 엘로인, 엘바런, 엘레나 단장?”
엘리샤가 엘프들을 이끌고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이탈했다.
유다희는 나와 멀어진 엘프들을 번갈아 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내가 제일 예쁘냐고. 묻잖아, 지금.”
“어, 어. 당연하지. 네가 제일 예뻐. 존나 예뻐.”
따봉, 따봉, 쌍따봉.
농담이 아니라 유다희가 가장 아름답다.
층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투쟁의 탑’에서 내로라하는 톱클래스 플레이어들이 유다희에게 구애를 하러 달려들 텐데, 그거 때문에 스트레스성 탈모가 오고 있을 정도로 존나 예쁘다.
진심을 담았는데, 유다희는 내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근데, 엘레나 씨랑 왜 이렇게 친해 보여? 하나 언니 때랑은 완전 다른 느낌이던데?”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 싸늘하기 짝이 없다.
방어적인 팔짱을 끼고, 가시를 세우듯 짝다리 짚는다.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존나 빡쳤을 때 나오는 소설 속 유다희 시그니처 모션이었다.
근데 뭔가 느낌이 달랐다.
화가 난 대상이 내가 아닌 느낌.
유다희는 말까지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러는 거, 네 입장에선 우습게 느낄 수도 있어. 그래도…. 그래도 우린 세, 세, 섹스까지 한 사이인데….”
“아.”
“물론 내가 덮친 거니까, 이렇게 집착하는 거 어이없고 싫어할 수 있다고 생각해. 정 떨어진다고 하면, 내가 좀 많이 슬플 것 같지만, 이해는 할 수 있어. 근데 이건 진짜 못 참겠다.”
유다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엘레나를 흘겨봤다.
“엘레나 씨 눈빛이 너무 이상해. 아카데미 밖에 나온 후부터 계속. 널 당장이라도 덮칠 듯이 노려보고 있는데 신경 쓰여서 사냥이 안 돼.”
“그, 아무 사이 아닌데….”
“아무 사이 아니야? 근데 엘레나 씨 눈빛은 제법 애절한 사이처럼 보이더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엘레나 씨가 너 짝사랑하는 줄 알겠어.”
주인과 노예의 관계니까, 짝사랑보다는 애증.
달달한 표정이나 눈빛은 바이브레이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엘레나의 항문에선 바이브레이터가 진동하고 있다.
유다희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내 감정이랑 네 감정이, 온도 차이가 심한 것 같아. 혼자 회귀해서 혼자 반복하는 것도 슬슬 지치는데….”
“어?”
내 뇌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템포였다.
분명 방금 전까지 잘 지냈으면서, 갑자기 급발진 하듯 화냈다가, 이젠 혼자서 축 늘어져버리네.
그래도 유다희에게 무언가 슬럼프가 찾아왔다는 건 알겠다.
회귀자라서 겪을 수밖에 없는 병.
회귀를 계속 반복하면서 점점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곤 해도, 이 짓을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는가, 끝이 보이지 않아서 무너진다.
회귀가 유다희를 갉아먹고 있었다.
소설 속 유다희, 소다희는 정체를 섹스로 극복했다.
자신이 만난 남자들과 색다르게 살을 섞으면서 슬럼프를 뛰어넘었다.
비유하자면, 히로인 공략을 다양한 루트로 즐긴 느낌.
새로운 관계, 새로운 상황, 거기서 나오는 새로운 반응으로 회귀의 장점을 깨달았다.
‘이게 다 강간을 안 해서 그래.’
그 장점, 내가 깨우치게 해주면 될 것 같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서? 쟤한테 가서 물어보면 되는 거야?”
“…그냥 같이 가자. 묻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여전히 쇼 하고 있는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소년의 기합이 들려왔다.
“흐아아아아아아압!”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크게 외친다.
저런 걸로 바다를 가를 수 있다면, 나는 이런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없다.
병신 같은 모습을 실제로 보니까, 확실히 느껴지는 게 달랐다.
나도 모르게 퉁명스런 말투로 툭 던지며 말했다.
“친구야. 그렇게 해서 언제 호수를 가르겠냐.”
“시비 걸 생각이라면 그냥 가세요.”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닌 듯 소년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집중했다.
유다희가 내 옆구리를 콕 찔렀다.
왜 말을 그렇게 하냐며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흠, 얘.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바다 가르는 법 연습이요.”
“바다 가르는 법? 바다를 가를 수 있어? 어떻게?”
유다희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낯선 여자 목소리에, 소년이 유다희를 흘겨봤다.
그리고 유다희 얼굴에 빠져 멍청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매일 훈련하면 돼요. 저는 아직 이 호수도 가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바다까지 가르고 말거예요.”
소년의 비장한 눈빛을 보며, 나는 장난기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쯥.
글로 읽을 땐 그저 그랬는데, 실제 감각으로 느끼니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바다를 가르려는 이유가 뭔데?”
“바다를 가르려는 이유요?”
유다희가 이유를 물어보니, 소년은 우리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사적인 얘기라서 그렇다.
“응. 무려 바다를 가르려고 하다니. 뭔가 대단해서 이유가 듣고 싶어졌어.”
“…….”
“사람이 무언가를 하고자 할 때는 이유가 있어야 동기부여가 되거든. 그 이유가 작든 크든 말이야.”
소년은 허공에 뻗고 있던 팔을 내렸다.
얘기 할 생각이 생긴 모양이었다.
저 멀리서 엘프들이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게 보인다.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는 않고, 자신들끼리 토의라도 하는 듯했다.
“그럼 누나는 왜 탑을 오르는 건데요?”
“나? 나는 강해지고 싶어서 탑을 오르고 있지.”
“왜요? 강해지고 싶은 이유가 뭔데요?”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유다희가 나를 슬쩍 흘겨본다.
확실히, 유다희는 내가 가면남이란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유다희가 다른 플레이어를 의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매 회차마다 나만 의심하고 있으니, 이젠 알고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복수?”
“응. 나한테 못된 짓을 한 남자를, 내 손으로 죽이고 싶어.”
“주, 죽이기까지 해요?”
“응. 죽일 거야.”
유다희는 아직 녹슬지 않은 분노를 다스리며 물었다.
“그럼 넌?”
“네?”
“나도 네 질문에 대답해줬잖아. 그럼 너도 해줘야지. 바다를 가르려는 이유가 뭐야?”
“그건….”
원래라면, 첫 만남에서 의뢰만 받고 끝난다.
소다희는 이런 질문을 다음 회차에서 던진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서 바다를 갈라야 해요.”
“어? 돌아갈 수 있어?”
“천사님이 말해줬어요. 플레이어 중 하나라도 탑을 클리어하면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소설 속 대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년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힘을 얻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돌아가는지는 잘 모른다.
이 소설은 유다희가 소원을 빌면서 끝이 나니까.
그 이후 이야기는 완결을 읽은 나도 알 수가 없다.
아마 못 돌아갔을 것이다.
이 세계에 소환되는 순간부터, 나를 대신해 클론이 원래 세상을 살아가게 되니까.
유다희는 놀란 감정을 애써 감추고 물었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바다는 도대체 왜 갈라야 하는 건데?”
“…마을 사람들이 왕국 병사들에게 쫒기고 있거든요. 바다 때문에 모두 궁지에 몰렸어요. 바다를 넘어갈 수 있다면…. 모두 살아남을 수 있어요.”
소년은 앙증맞은 주먹을 꽉 쥐며 의지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