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18. 기회.
가장 비싼 움집, 1일에 10만 코인.
60만 코인을 벌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숨기는 거 있으면 지금 다 말해.”
유다희는 인벤토리에서 이불 몇 개를 꺼내 탁탁 털며 흙바닥 위에 깔았다.
두툼하게 쌓인 이불은 제법 푹신해보였다.
“숨기는 거? 없는….”
“없어? 정말로?”
“그….”
“말 안 해도 돼. 대신, 지금 말 안하면 다시는 안 물어볼 거야.”
유다희가 벌떡 일어나 나를 빤히 쳐다본다.
차갑게 식은 눈동자는 분노나 살기보다 더 소름끼치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더 이상 묻지 않겠다, 그 말은 즉, 어느 정도 벽이 생긴다는 의미였다.
한 번 생긴 선이나 벽은 두 번 다시 넘을 수 없다.
그 공포감에 발기가 풀릴 정도였으니, 무언가 말하기는 해야 할 듯했다.
“사실은 나….”
“…….”
내가 입을 열자, 유다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바뀌었다.
재규어인 줄 알았는데, 탈을 벗겨보니 장화 신은 고양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 년, 지금 연기하네?’
순식간에 차가운 얼굴로 돌아왔지만 내 눈을 피할 순 없었다.
말 안하면 절교라도 할 듯이 구는 것도, 사실은 다 뻥카였다니.
내가 말을 멈추자, 다급해진 유다희가 묻기 시작한다.
“사실은 뭐? 말을 하다 말아? 이전 회차가 기억나는 것 같아? 아니면 뭐 오늘 바다 가르고 싶어 하는 소년 때처럼 그런 느낌이야?”
“…….”
“흐고? 그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그 호족 암ㅋㅐ…. 컷이 통했다는 것처럼 그런 표정을 지은 건데?”
“사실, 가끔 꿈에서 이상한 게 보여. 커다란 몬스터와 싸우는, 다양한 종족의 사람들…. 옛날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그 사람들이 플레이어라는 걸 알아. 너도 있거든. 멋있는 갑옷을 입고 있더라. 그 몬스터도, 아마 보스몬스터일 거고.”
유다희는 유심히 듣고만 있었다.
살벌하던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얼굴에는 달달한 흥미로 가득했다.
“미래를 보는 거구나. 오늘 만났던 그 애처럼, 미래의 단편을 본 거야. 틀림없어.”
“그런가?”
“그래서? 그 장면으로 흐고란 플레이어를 어떻게 아는 건데?”
“플레이어들이 서로 이름을 불렀으니까. 흐고라고 불린 플레이어는 호랑이 수인이었거든. 마침 오늘 호족을 만나기도 했고. 정령을 쓰는데, 정령이 엘리샤랑은 전혀 다른 느낌이라 팍 왔지.”
“흐응…. 그래? 그러면 너는? 그 꿈에서 너는 없어?”
유다희는 혹시 하는 기대감을 담아 물었다.
‘살짝 골려줘야지.’
가까스로 웃음을 찾고 어렵게 한 마디 뱉었다.
“내 꿈인데 당연히 나부터 찾아봤지. 근데 나, 는 없더라고. 하하. 어쩌겠어.”
“…….”
내가 어색하게 웃자, 유다희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끝까지 함께 갈 거라고 생각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내심 마음이 뿌듯했다.
‘근데, 마지막엔 너 혼자 가는 게 맞아.’
그게 올바른 클리어 방법이다.
유다희가 10층을 돌파하기 위해선, 유다희를 제외한 모두가 죽어야 하니까.
그걸 모르는 유다희로서는 이제까지 함께 해온 내가 없다는 것을, 나의 죽음으로만 받아들였다.
“김진우….”
유다희는 나를 가여운 강아지라도 보는 듯한, 그런 눈빛으로 바라봤다.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눈을 마주했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꿀 거야…. 그 거지같은 미래, 내가 어떻게 해서든 바꿔줄게…!”
그리고 훅 들어오는 입맞춤, 알코올 향이 확 풍겨왔다.
진실을 듣기 위해 참은 만큼, 유다희의 눈빛은 거칠게 일렁였다.
* * *
엘레나는 움집 앞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둘이 심상치 않은 관계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방까지 따로 잡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가장 좋은 방으로 말이다.
‘얼마 하지도 않지만….’
엘레나가 가지고 있는 코인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퍼스트 시티’에서 가장 좋은 움집이라 해봐야 엘레나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흐음….”
남녀 단 둘이서 방을 따로 잡았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엘레나도 모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술이라는 게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도.
엘레나의 머릿속에서 남녀 한 쌍이 엉키며 뒹군다.
옷으로 꽁꽁 가리고 있던 나신을, 서로 물고 빨고 핥으며 온기를 나눈다.
야릇한 소리가 방 안을 달구고 허전한 보지를 한 가득 채워준다.
“하응….”
엘레나는 점점 바지가 젖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괜히 상상해버리는 바람에, 흥분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씨이….”
달아오른 몸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복종서약’ 때문에 홀로 하는 자위는 오히려 독.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했던 자위가 오히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만든다.
플루토 앞에서 하는 자위로만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다.
김진우의 자지도, 엘레나의 흥분을 가라앉혀 주었다.
“흐응….”
엘레나는 김진우가 나오길 기다리며 움집 주변을 서성였다.
이미 짝이 있는 남자에게 매달려야 한다는 게 자존심 상하고 슬펐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복종서약’ 때문에 플루토와 관련된 자가 아니라면 그 어떠한 것도 불가능했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아이가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러면, 아이를 통해 ‘복종서약’을 깨부수고 김진우, 플루토에게 복수할 수 있다.
‘씨는 받았으니까….’
엘레나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아이를 품게 되었다.
자신의 몸 안에 생명이 싹 뜬 것이다.
무려 수십 년 만에….
부스럭-. 부스럭-.
‘헙….’
움집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나오고 있었다.
엘레나는 다급하게 움집 뒤에 숨었다.
쭈그리고 앉아서 몸을 숨겼다.
‘내가 왜….’
순간 울컥했지만, 몸을 일으키거나 하진 않았다.
김진우가 아닌 유다희가 나왔기 때문이다.
“아휴으…. 술 적게 먹일 걸.”
네 번째 사정 이후, 김진우의 자지가 더 이상 발기하지 못했다.
축 늘어진 자지처럼 김진우는 기절하듯 뻗어버렸다.
유다희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상점으로 향했다.
밤바람이나 쐴 겸 사부작사부작 걸어갔다.
“저기요. 호린이와 결투 잘 봤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밤도 깊었는데, 한 잔 어때요? 제가 살게요.”
“네. 괜찮아요.”
상점까지 가는 길, 그리 오래 걷지도 않았는데, 유다희는 수없는 대시를 받았다.
“씨받이라면 우월한 드워프의 씨를 받는 것이 당연하지! 검은 수염 부족의 전사인…. 그, 뭔가 불쾌한 손가락은 뭐지? 왜 중지를 세운 것인가!”
“푸히히히힝!”
“왜 사람 대가리로 말소릴 내는 거야?”
가끔 보이는 인간은 당연하다는 듯 말을 걸었고, 까칠하고 예의 없는 드워프, 찐득한 액체로 범벅인 리자드맨, 좆을 덜렁거리는 반인반마 켄타우로스까지.
좆 달린 수컷이라면, 종족을 초월해서 유다희에게 씨를 뿌리고 싶어 했다.
“짜증나….”
무수한 수컷들의 구애가 혐오스러운 듯 유다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상점으로 들어갔다.
엘레나는 자연스럽게 마주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유다희가 빵빵한 봉투를 쥐고 상점 밖으로 나왔다.
“엘레나 씨?”
유다희는 상점 앞에 서있는 엘레나를 보며 직감했다.
이 여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다희 님. 잠깐 시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 뭐…. 잠깐 정도는….”
유다희는 움집 안에 있는 김진우가 떠올랐지만, 애써 외면하며 시간을 냈다.
‘이 여자, 분명 김진우 때문에 이러는 거니까.’
엘레나가 왜 김진우에게 다가가려는 것인지,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유다희는 엘레나를 가만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순수한 감이었다.
‘이유를 듣고, 회귀를 해서, 접촉 자체를 막는다.’
유다희는 아카데미에서부터 엘레나의 접근을 막을 생각이었다.
엘레나는 유다희보다 앞장서서 걸으며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마나로 소리를 지울 수 있음에도 다른 사람이 없었으면 해서,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희 님.”
엘레나는 유다희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사용했다.
엘리샤 공주를 구해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유다희란 사람이 어떻든 은원을 구별하지 않고 존중받아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날 선 유다희.
오늘 아니면 내일, 회귀를 다짐하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가시를 잔뜩 세워버렸다.
엘레나가 김진우를 향해 보내던 달달한 눈빛에 대한 반항이었다.
‘진짜 사랑하는 사이인가?’
아무것도 안했는데 얼떨결에 연인을 빼앗은 나쁜 년 역할을, 엘레나는 이미 겪어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유다희가 보이는 적대감을 충분히 이해했다.
당황하지 않았다.
다만, 김진우가 자신에게 보였던 태도 때문에 헷갈릴 뿐이었다.
“김진우와는 무슨 관계입니까?”
엘레나의 질문에, 유다희는 이를 악물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겠다…?’
그냥 평범한 질문, 그러나 유다희 귀에는 평범하게 들리지 않았다.
엘레나는 모르고 있지만, 유다희는 김진우에게 찝쩍대던 호린에게 참교육을 해주고 왔다.
‘한 년 잘라냈더니 또 한 년 붙네.’
문제는 이번에 붙은 년이 제법 거물이란 것이다.
1층에서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호린과는 다르게 최상층에서 놀아야 하는 거물.
“…김진우와는….”
유다희는 대답을 고민했다.
‘고민할 게 있나? 어차피 회귀할 건데?’
유다희는 뇌를 비워버렸다.
더 이상 필터가 무의미하단 것을 깨달았다.
“결혼할 사이인데요?”
“결혼 말입니까…?!”
“네. ‘투쟁의 탑’ 정복하고, 밖에 나가서 결혼할 거예요. 왜요?”
당돌한 유다희의 말에, 엘레나는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빌어먹을 흑마술사랑 결혼을 한다고?’
아무리 차원이 다르다고 해도, 납득이 안 가는 말이었다.
유다희와 김진우 사이의 갭이 너무 커서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 김진우와 결혼을 하려는 겁니까?”
“…그냥요.”
이유를 묻는 엘레나의 말에, 유다희는 딱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유…. 이유가 뭐지?’
김진우를 붙잡으려 하는 이유를, 유다희 본인도 몰랐다.
널리고 널린 다른 남성 플레이어들에게선 느껴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
김진우의 옆에 있으면,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진우가 없었던 7회차는 짧다면 짧은 두 달이었지만, 유다희에게 있어서 지옥 같은 두 달이었다.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알고 결혼이란 단어를 입에 담는 거예요?”
“그쪽보다는 잘 아는 것 같은데요.”
퉁명스런 유다희를 보면서, 엘레나는 화나기는커녕 안타깝게 느껴졌다.
‘어째서 저런 여자가….’
플레이어로서의 수준을 내려두고, 여자 대 여자로서, 김진우 따위에게 얽혀있는 유다희가 불쌍했다.
“…그 남자는….”
엘레나는 유다희에게 진실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목이 무언가로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흑마술사!’
엘레나는 김진우가 모종의 제한을 걸어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다희에게 김진우와 있었던 성적인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마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못된 놈…!’
‘흥, 어디서 꼬리 치려고.’
부들부들 떨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엘레나를 보며, 유다희는 코웃음 쳤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 살짝 진한 색으로 물들어 있는 바지 앞섶, 달달한 숨결까지.
‘변태 같은 년.’
유다희는 엘레나에 대한 평가를 저질로 수정하고, ‘자결의 가호’를 발동했다.
더 이상 그녀와 나눌 말이 없었다.
[‘사망회귀’가 발동됩니다.]
“적당한 장비를 드리겠습니다. 착용하면 덜 위험할 거예요.”
‘어…?’
회귀를 했음에도, 엘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뒤에는 아카데미가 있었다.
‘여기 어디야?’
주변을 둘러보니, 엘레나가 인벤토리에서 장비들을 꺼내고 있었다.
엘리샤, 엘로인, 엘바런, 그리고 김진우.
‘1층이잖아…?’
유다희는 다시 한 번 ‘자결의 가호’를 발동했다.
[‘사망회귀’가 발동됩니다.]
“적당한 장비를 드리겠습니다. 착용하면 덜 위험할 거예요.”
또.
[‘사망회귀’가 발동됩니다.]
“적당한 장비를 드리겠습니다. 착용하면 덜 위험할 거예요.”
또.
[‘사망회귀’가 발동됩니다.]
“적당한 장비를 드리겠습니다. 착용하면 덜 위험할 거예요.”
여전히 1층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시작지점이 바뀌었잖아…?’
엘레나의 접근을 초장부터 막는다는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유다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엘레나가 떨군 장비들을 향해 다가갔다.
‘…언제 따먹지…?’
취기가 날아간 김진우가 음흉한 눈빛으로 보고 있단 것도 모른 체, 유다희는 장비를 주워서 착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