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19. 속는 사람이 없는.
---
[전투정산 중…….]
[800코인 획득!]
---
수인들이 알아서 처리하는 바람에 내 몫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벌어들이는 총 수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사냥횟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적어진 체력소모 덕에 전체적으론 이익이었다.
“꾸익! 꾸익! 너무 힘들다!”
“아파옹!”
“오늘따라 당근이 먹고 싶다.”
수컷 수인들의 찡찡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상처가 늘어난 만큼 지랄염병이 심해졌다.
“이쯤에서 쉬어야 할까?”
“쟤들 상태 보면….”
유다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살살 끄덕였다.
강한 긍정이 아닌 약한 긍정이었다.
수컷 수인들의 상태는 그만큼 심각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살고 싶다는 생존본능이 수인들을 똥밭에서 구르게 했다.
그에 비해 호린은 멀쩡했다.
수컷 수인들과 레벨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느낌이었다.
“…익숙한 냄새…. 흐고랑 비슷한 냄새. 너, 흐고와 무슨 사이야?”
“흐고란 새끼가 누군지도 모르니까. 제발 나한테 좀 묻지 마라.”
호린이 내 옆에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유다희의 눈이 가늘어진다.
“아냐. 넌 모를 리가 없어. 너한테서 나는 그 냄새는, 분명 흐고한테서 전해 받은 걸 테니까!”
“모른다고 개 같은 년아!”
“흐흐흥. 흐고와 같은 냄새가 나는 수컷이니까, 그 정도 무례는 봐주도록 할게.”
술 취해서 던진 한 마디 때문에 흐고 관련 얘기가 나올 때마다 간담이 서늘하다.
아니나 다를까, 유다희가 눈을 부라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다희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흐고가 누군지 정말 몰라?”
캐묻는 듯한, 취조 당하는 기분.
움집 안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뭐야. 인간 암컷. 넌 뭔데 흐고를 안다는 듯이 말하는 거야?”
“흐고. 정령술사잖아. 고대정령을 다뤘다지?”
“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유다희는 내게 들어서 알고 있다.
이전 회차에서 섹스하기 전에 약간 흘렸었다.
‘꺼림칙한 이 기분은 뭐지…?’
진짜 모르냐며 묻는 유다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가면 쓰고 강간한 직후, 하루 종일 의심받던 그 느낌이었다.
말실수를 한 걸까 싶어서 머리를 존나 굴려본다.
두뇌 풀가동.
‘…어…?’
회차 별로 대조해본다.
이전 회차에서, 나는 유다희에게 말했다.
미래 비슷한 꿈을 꾼다고.
‘꿈을 꾼다는 건, 바꿔 말하자면 잠을 잤다는 말인데….’
타이밍이 어긋난다.
1층에 올라와서 잔 적이 없으니까, 이전 회차에서 알려준 꿈의 정보는 지금도 알고 있는 정보인 것이다.
내가 여기서 계속 흐고에 대해서 모른다고 말을 해버리면, 알면서도 발뺌하는 게 돼버린다.
‘쉐엣….’
침이 절로 삼켜진다.
끔찍한 엔딩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애써 당황하지 않은 척,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아! 고대정령술사 흐고!”
마치 방금 기억났다는 듯이.
“나 알아. 알지. 모를 리가 있나.”
유다희의 시선을 피하면서 흐고에 대해 술술 털어놨다.
대부분 유다희도 아는 것이지만 거기서 조금 모자라게.
“그게 다야?”
“당연하지! 내가 너한테 숨기는 게 이, 있을 거 같아?”
“…꽤 많은 것 같은데…?”
크윽!
한 순간의 방심이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의심일까.
솔직히, 가면남에 대해선 만난 지 꽤 오래돼서 거의 잊고 지내는 것 같았다.
아니면 마음속에서 칼을 갈고 있다거나.
어찌됐든 오늘은 유다희를 범할 생각이다.
이길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엘레나를 쓰면 되니까.
‘상상만 해도, 아, 아…!’
가까스로 발기를 억눌렀다.
“믿어줄게?”
“왜 끝이 의문형인 건데요…?”
유다희는 게슴츠레하게 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숨기는 이유가 있을 거라 믿으니까. 언젠가는 얘기해달라는 뜻이야.”
“아….”
화사한 미소 앞에서, 나는 왜인지 죄책감을 느끼고 말았다.
“다시 가자. 돼지, 앞장서.”
유다희는 수인들을 앞에 세우고 푸른 기둥을 향해 움직였다.
‘퍼스트 시티’에서 꽤 멀어진 상황이라 토병들의 수준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스스슷-.
“몬스터다. 싸워, 얼른.”
“꾸익!”
간단한 무장을 한 토병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묘사해보자면, 갑자기 징집된 농민 느낌이랄까.
토병들은 초라한 창을 들고 우리를 중심으로 넓게 퍼졌다.
마치 학익진.
“꾸익! 자유를 위하여!”
돼지 수인이 뱃살을 출렁거리며 돌진한다.
자신의 가죽을 믿고 무식하게 싸웠다.
“아프다옹!”
고양이 수인은 날쌔고 얍삽하게 토병을 괴롭혔다.
문제는 같은 동료들도 존나 괴롭게 만들었다.
“당근! 당근 펀치!”
토끼 수인은 폴짝 폴짝 뛰며 정신 사납게 싸운다.
뒤통수 갈기고 싶은 거 억지로 참는 게 너무 힘들다.
그에 비해 호랑이 수인인 호린은 제법 수인다운 느낌을 풍겼다.
폭발적인 도약,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는 듯 잔혹한 면모, 사나운 포효가 호족의 위엄을 돋보이게 해주었다.
“개꿀.”
수인들을 방패삼아 모기처럼 촉 빨아먹는다.
달달해도 이렇게 달달할 수 있을까.
“좋아?”
유다희가 은근한 말투로 물어봤다.
나를 보는 유다희의 눈빛은, 놀이동산에 처음 와서 좋아하는 애새끼를 보는 듯한, 그런 묘한 만족감을 품고 있었다.
“…크흠…. 몸이 좀 뻐근한데?”
“흐흫, 아까까지 좋아해놓고 왜 그래?”
“내가 언제 좋아했다고….”
“그래도 너 좋아하는 거 보니까 기분은 좋네. 다음에도 이렇게 시작해야겠어.”
유다희는 해맑게 웃으며 토병 대가리를 깼다.
‘근력 10레벨 정도.’
가호 보정까지 받으면 대략 12레벨이라고 본다.
그 정도면 내 선에서 처리 가능하다.
여기 있는 수인 새끼들 ‘생명력’ 전부 뽑아서 ‘육신강화’에 쏟아 부으면 비빌 수 있다.
비열한 가면남은 기습을 할 거니까, 뒤치기 보너스 보정까지 하면 충분하다.
‘근데 이번엔 흔드는 게 목적이니까.’
일대일 결투를 할 생각은 없다.
훨씬 유리한 지점에서 싸우는데, 왜 불리하게 내려간단 말인가.
---
[전투정산 중…….]
[2,000코인 획득!]
---
정산이 완료되었다.
전투가 끝났다는 의미.
“꾸익! 더 이상은 불가능!”
“아프다오오옹!”
“당근. 아이 러브 당근.”
수컷 수인들이 기절하듯 쓰러졌다.
더 이상 포션도 없어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쯧쯧…. 돼지야, 푸른 기둥까지 얼마나 남았니?”
“꾸익! 얼마 안 남았다! 꾸익!”
“그럼 조금만 더 버티면 자유의 몸이란 소린데, 더 못가겠어?”
돼지의 눈동자가 뒤룩뒤룩 굴러다닌다.
“꾸익! 나는 할 수 있다! 꾸익!”
돼지는 상처를 딛고 일어섰다.
‘지금쯤 부르면 되려나.’
나는 엘레나에게 ‘명령’했다.
내가 있는 곳까지 와서 적당한 곳에서 대기하라고.
‘하얀 가면 하나 가지고 와. 옷도 다른 걸로 갈아입고.’
엘레나가 도착하면 그림자 정령을 엘레나에게 붙인다.
목소리를 속이기 위해서.
‘아, 귀도 가려야 된다.’
체형까지는 굳이 안 바꿔도 되겠지.
내가 원하는 것은, 가면을 쓴 변태 새끼들이 개인이 아닌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니까.
‘쯥. 목소리, 그림자 정령이 처음부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유다희는 아직까지 가면남을 확정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와선 다 의미 없는 얘기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유다희는 나를 가면남으로 확정하고도 버리지 않았다.
지난 회차 동안, 내가 가면남인 것을 부정하고 싶을 만큼 정이 쌓였다는 의미다.
여기서 가면남 행세를 멈춘다면, 유다희와 알콩달콩 ‘투쟁의 탑’을 올라갈 수 있다.
‘그건….’
싫었다.
유다희를 괴롭히고 싶었다.
그냥저냥 평범한 연인 관계로는, 도저히 유다희를 내 곁에 둘 자신이 없었다.
“꾸익! 이 기둥이다!”
사색에 잠겨 따라 걷다보니, 5미터는 될 법한 푸른 기둥 하나가 한기를 뿜어내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꾸익! 길안내 했으니 이제 내 자유를 돌려줘라! 꾸익!”
“잠깐만. 진짜인지 확인해봐야지.”
유다희는 푸른 기둥을 확인하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어으…. 얼어 죽겠는데?”
일정 조건을 맞춰야 접촉할 수 있다.
‘마력’ 레벨 10.
한기가 느껴진다는 것은 10레벨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찌잉-.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내 뒤통수를 뚫어버릴 듯한, 살기에 가까운 시선.
‘어휴, 시발. 깜짝이야….’
엘레나가 뒤쪽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백색 가면을 쓰고 로브를 뒤집어 쓴 모습이었다.
입 부분이 드러난 가면인데, 엘레나의 얼굴을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내가 그녀의 주인이 아니었다면, 엘레나의 정체를 몰랐을 것 같다.
‘인식방해’가 걸려있는 가면인 듯했다.
나는 그림자 정령에게 명령했다.
엘레나 옆에 붙어서 적당한 목소리로 적당히 연기하라고.
‘신호주면, 우리 전부 빈사상태로 만들어. 정체 숨겨야 하니까…. 주먹만 쓰고.’
‘명령’을 전달받은 엘레나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포함해서.’
순간, 엘레나의 입 꼬리가 귀 끝까지 올라간 것 같다면, 착각이겠지…?
“진짜인 것 같네.”
“꾸익!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 너도! 약속을 지켜라! 내게 자유를 돌려달라! 꾸익!”
“좋아. 풀어줄게. 너만 이 기둥을 알고 있었으니까, 너만 풀어주는 거야.”
“어…. 고맙다, 꾸익! 나는 도시로 돌아가겠다! 너무 쉬고 싶으니까!”
돼지 수인은 다른 수컷 수인들을 흘겨보고 바로 손절했다.
우리가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
‘지금, 돼지 죽여.’
나는 ‘명령’을 내리면서 ‘생명력’을 빨아들였다.
콰앙-!
“꾸익!”
한 대 맞고 도로 날아온 돼지가 푸른 기둥에 부딪쳤다.
츠츠츳-.
“꾸이이이익!”
돼지의 몸이 빠르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새하얀 서리가 돼지를 뒤덮고, 발버둥 치던 돼지는 냉동된 상태로 숨을 멈췄다.
“가, 가면남…?”
유다희는 나와 가면남을 번갈아봤다.
자세히 보면 차이점이 보일 테지만, 지금의 유다희는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이 개좆같은 새끼…!”
유다희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분노로 가득한 눈빛으로 가면남을 직시했다.
“다희 씨, 오랜만이군요. 반갑습니다.”
“가면남, 이 개새끼야아아아아!”
가면남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내 목소리와 비슷한 듯 달랐지만, 이성을 잃은 유다희는 그런 것을 따져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