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27. 맛보기.
‘순혈이네.’
뱀파이어는 피를 다룰 수 있다.
그렇지만, 피 자체가 될 수 있는 뱀파이어는 드물다.
순혈 중에 순혈.
흡혈귀는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핏빛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정말이지…. 이런 맛있는 냄새라니…. 꼭 맛보고 싶습니다.”
흡혈귀가 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입술을 혀로 훑는데, 그저 좆같았다.
아무리 잘생겼어도 아래에 달린 번데기가 내 심기를 거슬렀다.
“처리해, 엘레나.”
내 단호한 말에, 엘레나가 검에 마나를 실었다.
마나를 사용하면 못 베는 것도 벨 수가 있다.
“무섭군요.”
촤악-.
흡혈귀가 피 웅덩이로 스며들었다.
엘레나는 개의치 않은 듯 피 웅덩이를 베었다.
“꺼흡…! 어, 어떻게…!”
웅덩이 위로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흡혈귀는 당황한 듯 고통을 호소했다.
서걱-!
엘레나에게 자비란 없었다.
이 시간이 아깝다는 듯 최대한 빠르게 베어버렸다.
후두둑, 떨어지는 핏물.
순혈 흡혈귀 하나가 하늘로 떠나갔다.
[‘생명력’을 흡수합니다.]
놈의 피에선 누구보다 양질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흑마술Lv.10’ ▶ ‘흑마술Lv.11’]
흑마술은 다른 생명을 필요로 한다.
다른 생명을 빼앗아야 성장시킬 수 있다.
그런 만큼 성장효율이 다른 스킬보다 좋았다.
그래도, 이런 속도는 회귀자여서 가능한 속도다.
회귀자가 아니라면 이런 식의 무자비한 PK는 불가능하다.
적이 너무 많이 생긴다.
“골렘 잡으러 가자.”
평야에는 멍청한 골렘이 서있다.
약 15미터에 달하는 골렘.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엘레나, 출격.”
엘레나가 검을 뽑았다.
---
[1층 보스몬스터 토벌 정산 중…….]
[1층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
골렘은 아무것도 못하고 무너졌다.
1층 보스몬스터 따위는 7층에서 명함도 못 내민다.
아무것도 안해서 그런가, 보상으로 주어지는 게 없었다.
다음에 도전할 때는 유다희와 함께 직접 토벌할 생각이다.
파스스슷-.
포탈 하나가 생겼다.
이 포탈은 정해진 시간 동안 2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해준다.
제한 시간이 지나면 포탈은 닫힌다.
다시 생성된 보스몬스터를 잡아야 된다.
“후, 기대되네.”
2층이 어떤 곳인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기대하는 게 당연했다.
포탈을 통과하며, 공기가 바뀐다.
2층은 1층보다 좀 더 후덥지근한 날씨라 전체적으로 습하고 찝찝하다.
“여기가 2층…?”
엘리샤는 2층 장소를 보며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1층이랑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2층도 대부분 나무 밖에 안 보인다.
숲이 아니라 섬이라는 게 다른 점이지만.
“사람부터 만나봐야지.”
‘투쟁의 탑’은 기본이 약육강식이다.
아카데미는 최상위권 공략조가 어이없게 짓밟힐 수 있는 새싹을 위해 만들어놓은 기관이지, 모든 플레이어의 생존을 책임지기 위해 만들어진 자원봉사단체가 아니다.
약자를 보호해주는 기득권?
있을 리가 있나.
전부 착취하려드는 새끼들뿐이다.
우리는 숲속에서 한 방향으로 쭉 나아갔다.
하산하는 느낌으로 내려갔다.
등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2층의 보스 몬스터를 만나게 될 테니까.
2층은 기본적으로 섬이다.
중심부로 갈수록 산처럼 높아지는 섬.
그래서 하부에 플레이어들이 모여 산다.
하부로 내려가면 나무는 적어지고 점점 평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모래사장과 황토색 흙바닥이 이질적이게 선을 그어놓고 나뉘어 있는 땅.
평지에는 각양각색의 초라한 집들이 있고, 울타리가 그 집들을 둘러싸고 비실비실하게 서있다.
“저기. 안전지대다!”
엘리샤가 나무 울타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안전지대라….’
퍼스트 시티보다 허술한 나무 울타리.
플레이어가 직접 만든 것이라 허접할 수밖에 없다.
“엉?”
울타리를 통과해도, 안전지역이라는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엘리샤는 그에 당황하며 멍청한 얼굴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엘레나는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엘리샤를 강하게 키우는 편이었다.
‘없지. 안전지대, 없어.’
2층은 안전지역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플레이어 각자가 지은 집만 안전지역으로 인정된다.
‘시스템’이 인정해주는 안전지역이 작아서, 집 밖으로 나갈 때마다 긴장을 해야 한다.
누가 어디서 기습할지 모르니까.
이 울타리는 최소한의 사회가 구성되어 있다는 증거.
동맹 비슷한 느낌으로 뭉쳐 지내는 것이다.
쇄액-!
화살 하나가 날아와 우리 아래 흙에 박혔다.
멀리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활을 겨누고 있었다.
“누구냐!”
인간이었는데, 누군지는 전혀 모르겠다.
나는 얌전히 두 손을 들었다.
굳이 깽판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방금 막 1층에서 올라왔습니다. 내려오다가 이곳을 발견했고요.”
익숙한 얼굴이라도 만나고 싶다.
“1층에서 올라왔다고?”
남자는 미간을 좁히며 우리를 흘겨봤다.
“엘프…. 엘프로군.”
남자가 활을 거두고 손을 내밀었다.
“엘프의 일행이라면, 굳이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 난 호스라고 한다. 이름이?”
“김진우.”
자연스럽게 악수, 그리고 이어지는 힘 싸움.
놈이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허.’
엘프가 있어 믿기는 하겠지만, 기를 죽여 놓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같은 인간을 상대로 고개 숙일 생각은 없다.
내가 얼굴을 알 정도로 네임드 캐릭터라면 무릎을 꿇겠지만, 무명 캐릭터에겐 절대 꿇지 않는다.
애초에 질 자신도 없고.
“윽…?!”
호스는 내 근력에 놀란 듯 인상을 찌푸렸다.
내 근력은 무려 18레벨.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넘겨야 달성할 수 있는 숫자.
인간 기준으론 절대 낮은 수치가 아니다.
순간, 놈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놈의 손을 풀어주었다.
“더 하고 싶냐?”
“…아니다. 인정하지. 엘프 덕에 올라온 건 아닌가보군.”
호스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긴, 이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1층에서 막 올라온 파티는 대부분 함께 다닌다.
처음 보는 장소에서, 위기를 함께 극복한 파티라니.
따로 다닐 이유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셋이서 다니고 있다.
방금 1층에서 올라왔다면서 겨우 셋이서 다니고 있다?
누가 봐도 의심되는 파티인 것이다.
‘엘프가 의외로 도움이 됐네.’
태생이 선한 종족이다.
비록 내 옆에 있는 엘프 둘은 이상하지만, 평균적으로 엘프는 선하고 착한 경우가 많다.
“방금 올라와서 궁금한 게 많겠군.”
호스의 말에, 엘리샤가 손을 슬며시 들었다.
호스는 부드럽게 엘리샤를 바라봤다.
나를 볼 때의 느낌과 전혀 달랐다.
“궁금한 게 있어요, 호스 씨. 여긴 안전지역이 아닌 건가요?”
“하하, 아쉽게도 안전지역이 아닙니다.”
“아, 그러면 안전지역이 없어요?”
모든 생명은 잠을 잘 때 가장 취약해지니까, 안전지역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큰일을 당할 뻔했던 엘리샤에겐 더더욱.
“없지는 않습니다. 여기 곳곳에 지어진 집들이 개개인의 안전지역이죠. 넓게 지으면 그만큼 안전지역이 넓어집니다. 쉽지는 않지만요.”
2층에 있는 것들로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집들은 움집보다 더 열악한 경우가 많았다.
일단 지어놓고 천천히 넓혀가야 한다.
안 그러면 하루하루 위험하게 보내야 하니까.
‘나름 재밌기는 하겠지만 오래 있을 곳이 못 돼.’
전체적으로 무인도에서 생활하는 그 수준.
물론, 회귀자라는 이점을 이용하면 남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생활을 누릴 수 있다.
그래도, 올라오자마자 바로 보스를 처치하고 3층으로 올라가는 게 맞다.
모세를 통해 수정구를 얻는 것도, 전부 2층 스킵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호스! 그 사람들은 누군가?”
드워프 하나가 도끼를 질질 끌고 다가온다.
호스는 그런 드워프를 보며 말했다.
“오늘 올라온 플레이어들입니다. 좋은 전력이 될 것 같아서 데리고 다니며 설명해주고 있었어요.”
“오호….”
드워프는 엘리샤와 엘레나를 위아래로 흘겨봤다.
음흉한 시선이었다.
이해는 하는데,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
‘이런 놈들이 있었나?’
1층에서 올라오면, 넓은 2층 땅 중 한곳에 랜덤으로 소환된다.
먼저 올라온 2층 플레이어 중 어디를 먼저 만나게 될지는 순수하게 운이었다.
‘인간에 드워프….’
의외로 넓은 영역.
듬성듬성 지어진 집을 헤아려보면, 대략 쉰 정도는 머무는 집단이다.
아는 플레이어가 있을 수도 있다.
“2층 시스템은 1층이랑 많이 다릅니다. 식량을 직접 구해야 한다는 게 큰 차이점이죠. 아무리 코인이 많아도 소용이 없어요.”
이건 거짓말이다.
2층에도 코인을 사용할 수 있는 상점이 마련되어 있다.
다만, 상점을 점령하고 있는 세력만 이용이 가능하다는 게 문제 아닌 문제.
‘진짜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진짜 모를 가능성은 매우 적다.
쉰 정도 모인 집단에서 상점의 존재를 모를 수가 없다.
상점 자체가 섬 중앙에 위치해있어서 모르는 게 힘들다.
“그래도 다른 곳보단 저희가 훨씬 괜찮습니다. 나름 규칙이 잘 잡혀 있고 사람들이 다들 착하거든요.”
호스는 히죽 웃었다.
그다지 좋게 보이는 웃음은 아니었다.
이 마을 중심에는 그럴싸한 오두막집 하나가 지어져 있다.
1층 써드 시티의 고상가옥보다 훨씬 발전한 집.
그 집에서 남자 두 명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촌장님과 그의 호위에요.”
호스가 말했다.
촌장은 배불뚝이 인간, 그의 호위도 마찬가지로 인간.
하지만 옷차림으로 미루어 볼 때, 둘의 차원은 엄연히 달랐다.
‘호위는 무림 출신인가?’
단련된 근육, 진한 흉터, 펑퍼짐한 무복은 분명 무림의 것이었다.
오두막집 계단을 걸어 내려온다.
오랜만에 보는 근사한 집이라 그런가, 촌장이 존나 있어 보였다.
“손님이군. 호스, 네가 데려온 사람들인가?”
“아닙니다. 이 분들은 1층에서 올라와 섬을 헤매다가 저희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오? 그래? 방금 올라온 신입이라 이거지?”
배불뚝이 촌장은 나를 무시하고 내 뒤에 있는 두 엘프를 훑어봤다.
드워프보다 더 노골적인 눈빛이었다.
오늘은 뭘 먹을까, 저녁을 고민하는 것 같은 느낌.
‘오케이, 결정했으.’
불쾌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다.
매력적인 여자를 보며 야한 눈빛이 되는 건 이해를 한다만, 그 눈빛 속에 따먹겠단 실행의지가 담기면 안 된다.
그건 도전이니까.
엘레나에게 명령 한 마디면 이 마을을 정복할 수 있다.
이 마을은 오늘 안에 사라지고, 저 오두막집은 내가 먹는다.
“아름다운 엘프들이로군. 하지만 검을 찬 엘프에게선 산뜻한 향기가 나지 않아.”
배불뚝이 촌장은 엘레나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보인 건 엘레나가 아니라 엘리샤였다.
“거기 너, 살고 싶다면 내 집으로….”
서걱-.
“어?”
엘리샤를 가리키며 까딱거리던 촌장의 손이 사라졌다.
툭-.
바닥을 뒹구는 손.
팔꿈치 아래로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내가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엘레나가 먼저 행동했다.
엘레나는 살벌하게 촌장을 봤다.
“그 더러운 손가락 치워라. 쓰레기.”
“이, 이이이이이익! 좆같은 엘프 년이!”
배불뚝이 촌장은 팔을 주워들며 소리쳤다.
팔을 주워들었다는 점에서, 놈이 2층 플레이어라는 게 느껴졌다.
“운! 네 역할을 하라고! 저 년이 나를 향해 검을…!”
“알았으니까 조용히 해. 시끄러워.”
운, 이라고 불린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펄럭거리는 무복, 호랑이 같은 기세가 사내를 감싸는 듯했다.
서걱-.
“죽고 싶지 않다면 저 남자를 넘겨.”
엘레나는 무인의 다리를 베었다.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청운이 크게 휘청거렸다.
“크읍…!”
“처, 청운!? 도대체 어떻게…?”
배불뚝이 촌장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파들파들 떨었다.
제자리에 박힌 듯 꼼짝도 못했다.
움직였다간 엘레나에게 죽고 말 테니까.
‘?’
그러나 엘레나는 위협만 할 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무리 짓지 않고 멍청하게 나를 바라봤다.
“네가 죽여야 돼. 그래야 저 오두막집을 빼앗을 수 있어.”
“어?”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왜 외팔이 상태로 내버려 둔 거지?’
청운처럼 다리를 분질러두면 죽이기도 편하고 좋잖아.
“너랑 비슷한 수준인 놈이야.”
선물이라도 주는 것 마냥, 엘레나는 베시시 웃으며 나보고 싸우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