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30. 2층.
엘리샤는 여전히 엘프 전통 복장을 걸치고 있다.
옆구리가 보이고, 허벅지가 드러나, 수영복보다 조금 더 가려주고 있을 뿐인 옷.
‘저게 보기 좋지.’
내 여자친구, 아내, 딸내미만 아니라면.
언제나 환영인 것이다.
“골렘을 잡아야 해.”
유다희는 제법 진지했다.
1층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했으니, 남은 건 우리끼리 보스를 잡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엘레나 찬스를 사용하면 쉽게 올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올라가봐야 우리를 기다리는 건 사망회귀.
결국 엔딩은 10층에 도달해야 마주할 수 있으니, 그에 맞는 힘을 얻어야 한다.
차근차근, 밑에서부터 성장하는 것.
그 성장들이 모이고 모여, 7층에 막혀 있는 현 상황을 타개하고, 10층으로 가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수련. 수련하자.”
또, 지루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한 달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일단, 퍼스트 시티에서 써드 시티로 옮겼다.
움집보다 판자촌이 훨씬 나았다.
공기도 텁텁하지 않고 선선해서 덜 찝찝했고.
2층에서 있었던 일이 머나먼 일처럼 느껴졌다.
오두막집이나 왕고한의 집 등이 희미해지고 있다.
한 달이란 시간은 훈련소를 다녀올 만큼 긴 시간이니까.
능력치는 나름 대폭 상승했다.
유다희가 단순무식하게 뒹구는 동안, 나는 조금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회귀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수단.
끼익-.
유다희가 부서지기 직전인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를 보며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요즘 가면 쓰고 PK하는 ‘인간’이 있다더라.”
“하하, 그래?”
PK.
몬스터 따위를 잡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성장 방법.
‘시스템’이 보조해주고 있어, 똑같은 전투도 엄청난 보정이 들어간다.
‘그래서 최상위층에선 PK가 금지되어 있지.’
하지만, 암묵적으로 PK를 방치한다.
최상위층은 현 상황을 박살내줄 수 있는 강자를 원하니까.
딜레마다.
PK는 훌륭한 수단이지만, 우수한 품종을 짓밟아버리는 자연재해가 될 수도 있다.
최상위층 랭커들은 눈치나 보며 방치하거나 되도 않은 잡종을 뽑아버리거나.
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곤 한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심하고 다녀야겠네.”
“…너잖아.”
유다희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나를 바라봤다.
크게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눈빛이었다.
“그래서, 성과는 있어?”
“성과?”
나는 내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유다희가 쪼르르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많지. 지금 당장 골렘 잡으러 가도 될 것 같은데?”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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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2★)》
종족 ─ 인간 [종족제한↓]
능력치 ─ [근력Lv.29][민첩Lv.26][마력Lv.30]
스킬 ─ [흑마술Lv.20][단단한 피부Lv.20][한손 검Lv.20][가벼운 발걸음Lv.17][흑영정령술Lv.13][묘족 체술Lv.12][보호색Lv.10][색공Lv.6][발정기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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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손 검을 주로 쓰며 흑마술을 직간접적으로 썼다.
그러자, 도중에 ‘방패’가 ‘한손 검’에 흡수되었고, 레벨이 대폭 올랐다.
색공은 여전히 감추고 있다.
성장을 위해 틈틈이 사용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밸런스 맞게 성장했다.
유다희와 함께 걷기 위해서,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수많은 플레이어가 내 검에, 흑마술에, 목숨을 잃었지만.
죄책감이나 후회 같은 감정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회귀하면 내 능력치를 제외한 모든 일이 ‘무’로 돌아가니까.
유다희가 속삭였다.
“그럼 내일 골렘 잡으러 가면 되겠네.”
“그치.”
그러곤 익숙한 듯 옷을 스륵스륵 벗어던졌다.
뽀얀 속살이 드러날 때마다 시야가 흐릿해져갔다.
실험을 위해 참고 있어서 그런가, ‘발정기’가 훅 올라오고 있었다.
“며칠 참았지…?”
“3일….”
“3일 참으면 오나보네. 좋아.”
유다희는 양손으로 강조하듯 새하얀 하복부를 보여주었다.
자궁 탓에 귀여운 하복부에서 익숙한 마력이 일렁거리고 있다.
“안에 잔뜩 싸도 괜찮으니까….”
유다희는 내 앞에 엎드리고서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었다.
“참은 만큼, 마음껏 싸도 돼.”
“으르르르르르륽!”
“개 소리 내지 말고…. 아흑!”
찌걱-!
몇 번이고 안에 쌌다.
유다희의 자궁을 내 정액으로 채우겠단 욕망 하나로, 쉴 틈 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발정기Lv.1’ ▶ ‘발정기Lv.2’]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유다희의 몸은 군데군데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성을 놓고 탐한 보람이 있다.
‘발정기 레벨이 올랐네.’
차마 얘기는 못해주었다.
효과가 여전히 괴팍해서 말해줄 수 없었다.
자궁에 씨를 뿌릴 경우 임신 확률을 높여주고 발정기 상태에서 정력이 증가한다는 걸,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하겠어.
자주 몸을 섞다보면 알아서 눈치 채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진우야.”
자연스러운 팔베개, 이젠 떨어져 자는 게 더 낯설었다.
유다희는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웬만하면 무리하지 마.”
“…왜?”
“나는 가호 덕분에 고통을 안 느낄 수 있지만 넌 아니잖아. 네가 고통스러운 거, 지켜보기 힘들어.”
가면을 쓰고 PK를 다녔다.
항상 완벽하게 이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은 궁지에 몰리고 팔다리가 잘려나갈 때도 있었다.
“…그, 흥분하면 덜 아파서 괜찮아.”
“더 아프고 덜 아픈 게 문제가 아니야. 내가 싫어.”
유다희가 얼굴을 부비며 안겨왔다.
애교라도 부리는 것 같아,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근데, 아까 전까진 짐승처럼 부둥켜안고 그랬잖아.
‘갑자기 왜 이런 분위기를…?’
달달한 건 좋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유다희는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내 손을 붙잡았다.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탑을 오르는 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거든.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내 곁에 너만 있어주면, 끝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어.”
“어, 어…?”
유다희가 손에 깍지를 꼈다.
유다희의 왼손 약지에, 본 적 없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유다희 생일인가?
아니다.
계속 회귀하는 우리 사이에, 기념일이 있었나?
있을 리가.
도대체 무슨….
“배란일이야. 위험한 날. 거기다 이것도 먹었어. 배란유도제.”
“예…?”
“오늘, 내 뱃속에 아기 생길 수도 있다? 너랑 나, 둘을 닮은 아기 말이야.”
“그런….”
언젠가는 아이를 가지겠지.
하지만, 회귀에 묶여 있는 동안은 헛된 꿈이다.
“확실하게 도장 찍은 거 알지? 내일 골렘 토벌하고 2층으로 올라가면, 내 뱃속에는 진우 아기가 자라고 있는 거야. 어때? 기대되지…? 그러니까….”
유다희의 얼굴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엘레나, 아이실리아, 건들지 마아아아아아아악!”
“어흑! 시바…!”
“으응…. 왜 그래, 진우야…?”
끔찍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나 때문에 깬 것인지, 유다희는 졸린 눈을 비비며 느릿하게 일어났다.
‘꿈? 꿈이야?’
도대체 어디서부터 꿈인 걸까.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하다.
유다희가 머릴 긁적거리며 손수건을 꺼냈다.
“어휴, 식은땀 좀 봐. 악몽 꿨구나?”
“어…. 악몽이라면 악몽이지….”
본인이 등장한 악몽이란 것도 모르고, 유다희는 내 이마와 목을 닦아주었다.
“덕분에 일찍 일어났어. 1층 마무리하는 날인데 나쁘지 않네.”
히죽 웃으며 일어나 씻으러 가는 유다희.
매일 봐도 질리지 않을 뒤태였다.
“도대체가….”
발정기 때문에 정신을 잃어버린 것 같다.
기억을 되짚었다.
뒤죽박죽 섞여 있는 기억 중, 어젯밤의 기억만 골라서 떠올렸다.
반지를 발견한 뒤부터 꿈인 듯했다.
우리는 아직, 커플링 같은 걸 나누지 않은 관계니까.
─ 끝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어.
─ 김진우를 다른 말로 하면 뭔 줄 아냐? 상남자다. 상남자가 여자 뒤에 숨어있는 게 말 돼?
─ 숨어있으란 게 아니고 조금은, 내가 걱정 안하게 조심하면서 다니란 말이잖아.
유다희는 날 보며 위험한 짓 하지마라고 걱정했다.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더 이상 장난기를 섞을 수 없었다.
─ 나, 가끔 처음 죽을 뻔했을 때 꿈 꿔. 네 표정이 계속 아른거려서, 물론 지금은 회귀를 한다지만…. 아프잖아. 많이, 정말 아프잖아.
─ 어제도 그래. 대련하다가 엘레나가 갑자기 뛰어가더라. 그래서 따라 갔는데, 네 팔다리가 잘려 있었어. 넌 그 때도 애써 웃었지.
─ 그거 보면서, 속이 찢어지는 것 같아. 엘레나가 처음으로 부럽더라. 아, 엘레나는 엄청 쉽게 구해줄 수 있구나…. 하고.
진지한 분위기였다.
감성적으로 변한 유다희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속마음을 털어놨다.
─ 질투, 많이 났거든. 너랑 엘레나가 가깝게 지내는 것 같아서 막 화도 나고. 티 안 났지? 너는, 영 모르는 것 같더라.
─ 그런데 엘레나가 없었다면 얼마나 더 1층에 머물러야 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 당장 수련만 해도 엘레나 덕분이잖아.
─ 고민을 해보니까, 엘레나 없이는 내 계획이 한참은 더 걸릴 것 같더라고.
나는 침을 삼키며 계획에 대해 물었다.
유다희는 달아오른 뺨을 애써 감추며 속삭였다.
─ 집으로 돌아가야지.
집….
착잡해지는 말.
어찌됐든, 임신공격은 꿈이었다.
정신적으로 피곤해서 악몽이라도 꿨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애초에 스타팅 포인트는 5층에서 바뀌니까.’
임신공격을 조심해야 할 타이밍은 4층 클리어 직전이다.
그 때 임신해버리면, 자라나는 아기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진다.
“오늘은 다섯 명 밖에 없네.”
“어제 갔던 사람도 있고…. 쯥, 실패했나봐.”
써드 시티 광장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골렘 레이드를 희망하는 플레이어라면, 이곳에 모여 함께 움직인다는 룰.
최대한 인원을 모아야 안전하게 클리어 할 수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대규모로 꾸려서 도전을 한다.
최소 스무 명.
“가능할까?”
“…안 될 거 같은데.”
이미 모여 있는 인원 다섯에 우리 여섯.
다 합쳐 열하나 밖에 안 되는 소규모 인원.
거기서 엘레나는 싸울 생각이 없으니, 실질적인 전투인원은 열 명 뿐이다.
“더 모아야 돼.”
우리끼리 공략을 해보려면 적어도 스물은 있어야 한다.
스물을 모으는 게 불가능하다면, 인간 그린스킨 수인 따위의 흔한 종족이 아닌 종족이 필요하다.
“호오, 요즘 들어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는데….”
멀리서 어딘가 익숙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다.
평범한 걸음걸이도 우아하게 느껴지는 남자.
잘생긴 남자는 내게 다가와 끔찍한 소리를 해댔다.
“당신이 풍기는 향기였군요.”
“너는….”
“저를 아십니까?”
한 달 전쯤에 봤던 뱀파이어.
이름은 모르지만, 내 흑마술의 거름이 되어준 흡혈귀다.
어떻게 살아있는 걸까.
원래대로, 나나 엘레나가 간섭하지 않으면 보스 잡다가 죽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도망치나보네.’
뱀파이어는 스물 정도를 이끌고 골렘을 잡으러 갔다.
그러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레이드를 실패하고 만다.
“…네가 누군지 모르니까, 좀 떨어져주면 좋겠는데.”
“하하, 알겠습니다.”
“감사. 하마터면 분노조절장애가 도질 뻔했지 뭐야.”
나는 남자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화가 나는 병을 앓고 있다.
“스물 좀 넘겠는데?”
유다희가 광장에 모인 인원을 다시 셌다.
뱀파이어가 이끌고 온 플레이어들까지 합쳐버렸다.
저 새끼, 매혹 쓰고 다니는데.
정작 유다희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도전 해볼 만하네.”
나쁘지 않다.
나와 유다희는 한 달 전보다 훨씬 강해졌고.
나머지 플레이어들도 나름 자신 있으니까 도전하는 것이리라.
“10분만 더 기다려봅시다. 스물 정도 모였으니까, 슬슬 출발해도 될 거요.”
드워프의 제안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긍정했다.
10분을 더 기다렸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오늘 보스를 노리는 플레이어는 우리가 전부였다.
“가봅시다!”
드워프가 앞장섰다.
구릿빛 근육이 꿈틀거렸다.
땅딸보였지만, 나름 패기가 느껴졌다.
가는 길은 정적으로 가득했다.
긴장감이 차오르고 있어서, 다들 떠들지 않고 걸었다.
뱀파이어 빼고.
“…한 번만 더 킁킁거리면 보스고 나발이고 너부터 죽인다.”
“어쩜 이리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겁니까. 어머님의 피에서 눈을 뜬 이후, 처음 맡아보는 냄샙니다. 딱 한 모금이라도 좋으니 마셔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