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37. 대가.
설아가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자신의 건물에서 지내게 하던 플레이어들인데, 하나 같이 어린 애들이었다.
약 서른 정도 되는 인원 중 3할 정도.
어떻게 모은 건지 의문이 들었다.
“하나둘 보호하다보니까 이렇게 늘어났어.”
설아는 멋쩍게 웃으며 머릴 긁적였다.
자신에게 건물을 넘겨준 사람도, 똑같은 반응이었다고 했다.
“대충 상점 주변에 자리 잡아. 빈 건물 있으면 가져도 좋고.”
“고마워.”
내 말을 들은 아이들이 쪼르르 뛰어갔다.
몇몇 어른들이 통제하려 하지만, 애새끼들답게 말을 안 듣는다.
그들을 빤히 쳐다보던 설아가 말했다.
“…처음엔 색마인 줄 알았는데, 나름 남자다운 면도 있구나. 의외네.”
“칭찬이냐, 욕이냐.”
“칭찬이야.”
설아는 옅게 웃었다.
진심이라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강간 안하고도 쓰레기인 남자들도 많은데 뭘. 강간하고 이 정도면, 남자 그 자체지. 2층에서 상점을 가지고 있잖아. 강간이 문제겠어?”
“그건 그렇지.”
“구멍에 양물 박으려는 게 뭐 대수라고. 강간당하면서 꺄아악 거릴 만큼 순수한 시절, 진짜 못된 새끼들 때문에 이미 버렸어. 그런 놈들에 비하면 넌 나쁘지 않아.”
“그건 좀 슬프네.”
“나중에, 다희 언니 몰래 찾아오면, 찐하게 서비스해줄게.”
사실대로 말해줘야 할까?
사실은 유다희가 너보다 어려, 라고.
나는 진실을 숨기고 물었다.
“무슨 서비스?”
“…제대로 빨아준다는 소리야. 지려버릴 정도로.”
설아가 뻔뻔하게 내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겁을 상실했네.”
“다희 언니나 다른 언니들한테 잡혀 사는 걸 봐버렸는데, 어떻게 널 무서워하겠어.”
“그거랑 너 죽이는 건 별개인데.”
“그래? 그러면 사려야겠네.”
설아는 끝났다며 툭툭 내 엉덩이를 두드리고 자기 무리를 도우러 뛰어갔다.
설아가 떠났는데도, 누군가가 내 엉덩이를 스윽스윽 문지르고 있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엘레나가 내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다.
“…내 엉덩이에 꿀 발라놨나? 왜 다 못 만져서 난리고, 왜 못 빨아서 난리야?”
“…오늘 본 저 애도 만지는데, 나라고 만지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
“없지. 없는데. 엘레나, 네가 이러고 있으니까 어이없어서 그러지.”
“요즘 애들은 상도덕이 없어. 상도덕이. 쯧쯧….”
엘레나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설아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찰 뿐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손.
엘레나를 보니, 만족할 때까지 주무른 듯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얘는 뭘까.’
뭔데 내 엉덩이를 만진 걸까.
존나 뻔뻔한 얼굴로, 당당해보여서 할 말이 없다.
“네가 만진 만큼, 나도 엘리샤 엉덩이 만지러 간다. 그렇게 알아둬.”
“뭐, 뭐!? 이, 이 쓰레기가!”
“불만이야?”
“불만이다! 너와 나 사이에 나눈 스킨십인데, 왜 엘리샤 공주님을 끌어들이는 것인가. 차라리 너도 내 엉덩이를 만져. 그러면 공정한 게 되잖아!”
빼액 소릴 지른 엘레나가 내 손을 잡고 자기 엉덩이로 가져갔다.
“엘리샤 공주님은 안 된다. 그 욕망, 나한테 풀면 되잖아. 그리고 그거 촬영해서 다희 님께 갖다 주면, 모두가 행복해…. 으흥….”
이해 안 되는 새끼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냥 전부 이해할 수가 없다.
유다희를 제외하면, 오히려 여자 캐릭터들보다 남자 캐릭터들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
특히 어디가 민감하고 어떤 플레이에 만족을 하는지….
‘시발.’
알고 싶지 않은 정보.
삭제.
“읏흥…. 훤히 공개된 장소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 쓰레기….”
나는 엘레나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평범한 수련도 해봤고, 무분별한 PK도 실컷 즐겼다.
더 나은 방법에 무엇이 있을까.
답은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았다.
최대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길….
무력으로 따지면, 내 수준도 꽤 괜찮다.
2층 최상위권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다.
3층에서도 인간치고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진짜 뛰어난 존재들은 반년 동안 7층에 도달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목표가 ‘투쟁의 탑’ 클리어라면 문제가 된다.
왜 클리어 하려는 것인가.
삶의 질은 지금이 더 좋은데.
‘그게, 이 소설의 이야기니까.’
본능적으로 옳다고 생각했다.
유다희를 따라 탑의 끝에 도달하는 것.
그래야 이 소설 속에서 나갈 수 있다고, 무의식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 때, 엘레나가 울먹거리며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만질 건데, 이 쓰레기야…. 애가 보고 있다고…!”
“아.”
나도 모르게 너무 깊이 빠져버렸다.
누가 가까이 온 것도 모르고서, 엘레나의 엉덩이에 심취하고 말았다.
나는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꼬마를 노려봤다.
“뭘 보냐.”
“짹-. 인간 형.”
꼬마는 조인, 새대가리였다.
신체 일부만 수인의 특징을 띠는 애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머리가 조류여서 기괴한 애들도 있다.
수인이라는 게 랜덤 요소가 제법 큰 종족이다.
“짹짹-. 엘프 누나 엉덩이, 말랑해요?”
“그럼, 존나 말랑하지. 왜? 만져볼래?”
새대가리 꼬맹이가 당돌하게 물었고, 나는 당연하게 대답했다.
단련된 엘레나의 엉덩이는 토실토실하니 만지는 맛이 있었다.
“뭐라고 했어. 방금 뭐라고 했냐고!”
“짹-. 진짜 만져 봐도 돼요?”
“만져도 될 것 같아? 그런 말 하면, 아이라도 봐주지 않아!”
발작하는 엘레나와 진짜 만질 기세인 새대가리 꼬맹이.
“되겠냐? 콱 씨, 가서 집이나 지어.”
“짹짹-!”
새대가리 꼬맹이가 오도도 뛰어갔다.
진짜 엉덩이 만지는 게 부러워서 와본 듯했다.
“아무튼, 좀 도와줘.”
기껏 사색에 잠겼었는데, 새대가리 꼬맹이 때문에 헛수고가 되었다.
더 이상 깊은 생각은 시간 낭비.
수련이 됐든 PK가 됐든, 일단 행동으로 옮기는 게 옳다.
나는 검을 꺼내들었다.
* * *
늦은 오후.
저녁 식사 시간.
넓은 식탁에 한 자리를 차지한 엘리샤가 엘레나를 보며 물었다.
“엘레나 단장. 오늘, 그 놈 많이 때렸어요?”
엘리샤는 김진우와 엘레나가 대련하는 것을 지켜봤다.
김진우가 나뒹굴 때마다 환호를 지르곤 했다.
“예. 실컷 때려주고 왔습니다. 포션이 없었다면, 어딘가 부러지거나 해서 한 달은 누워있어야 했을 겁니다.”
“으히히, 내일은 더 세게 해요. 아주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버리라고요.”
엘리샤가 사악한 마녀처럼 낄낄 웃었다.
‘쓰레기가 엘프 여럿 망치는 구나….’
교양이라곤 내다버린 것 같은 엘리샤의 웃음소리에, 엘레나는 안타까운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기사였으면 직접 때려줄 수 있는 건데. 이럴 땐 정령술을 익힌 게 슬프네요.”
툭 치면 부러질 듯 가녀린 팔뚝.
엘레나는 엘리샤가 정령술사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엘프 둘이서 나누던 대화가 뚝 끊겼다.
어색한 기류를 없애기 위해, 과장되게 대화를 한 것인데.
엘리샤는 멍하니 앉아 있는 유다희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 아침부터 영 심상치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오!’
물어봐도 답을 안 해준다.
유다희, 아이실리아, 심지어 엘레나까지도.
유다희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때, 유다희와 엘레나의 눈이 마주쳤다.
엘레나는 모종의 신호를 보냈고, 유다희는 용케도 그 신호를 캐치했다.
“잘 먹었어요. 먼저 일어나볼게요.”
유다희가 먼저 일어났다.
“빙수 안 먹어?”
아이실리아의 물음에, 유다희는 멍한 얼굴로 그쪽을 바라봤다.
아이실리아가 귀여운 얼음 그릇에 빙수를 만들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사라락 떨어지는 얼음조각들….
“엄청 시원하고 달달하게 만들었어. 먹고 가.”
유다희에게는 친절했다.
원래도 친구가 될 운명인데, 김진우 때문에 관계 변화가 빨라졌다.
괴롭힘 당하는 아이실리아가 더 빠르게 숙이고 들어간 것이다.
유다희 > 김진우 > 아이실리아 > 엘레나로 이루어진 서열을, 유다희 = 아이실리아 > 김진우 > 엘레나로 역전하기 위해서.
하지만, 유다희의 텐션은 평소보다 낮았다.
달달한 것을 봐도 먹고 싶지가 않았다.
“됐어. 오늘은 별로 안 당기네.”
유다희는 아이실리아의 호의를 거절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드러누워 김진우에 대한 원망을 쏟아냈다.
“김진우우…. 진짜, 진짜 싫어….”
자위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섹스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나름 상스러운 생활을 즐겨왔는데.
갑자기 참으란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었다.
그 때, 문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유다희는 이 발걸음이 엘레나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똑똑-.
“들어와요, 엘레나 씨.”
─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엘레나가 들어왔다.
이런 관계가 제법 익숙한 듯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유다희의 방에 들어온 엘레나는 인벤토리에서 영상기록용 크리스탈을 몇 개 꺼냈다.
“김진우가 수련할 때 있었던 일들을 남겨두었습니다.”
엘레나가 건넨 것은 다양한 각도로 촬영된 수련영상.
“수련하면서도, 그 짓거리를 했나요?”
“예. 기어코 해달라고 하더군요.”
유다희는 크리스탈을 만지작거리다가 영상을 확인했다.
평범하게 수련하는 모습이 이어졌다.
“열심히 하네….”
흙바닥을 뒹구는 김진우를 보며, 유다희는 얼굴을 붉혔다.
이 영상이 스킨십 영상이라는 것도 잊고서, 열중하는 김진우에게 빠져들었다.
─ 성장이 막힌 것 같은 기분이 드나?
─ 어떻게 알았어.
─ 몇 번, 합을 나누어보면 느껴져. 벽에 막혀있구나, 하고.
영상 속 엘레나가 김진우에게 아낌없이 충고를 건넸다.
나약한 인간에게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팁들이었다.
─ 정 안 되겠으면, 확실한 동기부여를 스스로에게 거는 건 어떨까.
─ 동기부여?
─ …내기 같은 걸로, 의지를 다지는 거다. 멈추면 안 되는 이유를 만들어주는 거지.
영상 속 엘레나가 내뱉은 말에, 유다희가 엘레나를 노려봤다.
저 말의 의도를, 유다희는 순식간에 눈치 채고 말았다.
─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거야.
김진우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엘레나가 뿌린 덫에 제 발로 기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휴, 저 병신!’
유다희는 속에서 천불이 끓는 것을 느꼈다.
부글부글 거리는 이 감각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자위만 할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짜증나아!’
차마 보지를 건드리진 못하고, 유다희는 영상에 집중했다.
─ 자, 이게 뭔지 알아?
─ 그냥 돌이잖아.
─ 겉보기엔 그냥 돌이지. 하지만….
영상 속 엘레나는 돌을 쥐고 마력을 일으켰다.
꿈쩍도 않는 돌을 보며, 김진우는 놀란 듯 감탄을 흘렸다.
─ 오오….
─ 이렇게 끊임없이 마나를 빨아먹는다. 아무리 쏟아 부어도 부서지지 않아.
─ 그걸로 뭘 하는데. 존나 쓸모없네.
─ 쯧, 체내의 마력을 키우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게 무엇인지 알아? 가지고 있는 마나를 전부 소진하는 거야. 비워내고, 비워내고, 비워내면, 어제보다 고농도의 마력을 품게 되는 거지. 그리고 이 돌을 이용하면 좋은 점은 이렇게….
영상 속 엘레나는 돌에 주입한 마력을 다시 회수했다.
일부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회복보다 훨씬 빠르게 마력을 채울 수 있었다.
─ 조금만 휴식하고 다시 진행하면 된다는 점이다.
─ 오, 괜찮네.
처음 돌을 보았을 때, 김진우는 수련법에 대해 떠올릴 수 있었다.
소설 속 유다희와 엘레나가 지나가는 듯 나눈 대화여서, 지금까지 전혀 기억나지 못했다.
공허의 돌 자체가 상층부에서나 구할 수 있는 것인지라 크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것이 문제였다.
─ 근데 이걸로 무슨 내기?
─ 이 공허의 돌을 오늘 안에 깨면 네가 이기는 거고, 깨지 못하면 내가 이기는 걸로.
─ …어떻게 깨는 건데?
─ 이제부터 나는 내 마력을 여기에 주입해둘 생각이야. 근데, 내가 주입한 마력만큼 네가 마력을 주입하면, 공허의 돌을 깰 수 있어.
영상 속 김진우가 흥미롭게 엘레나를 바라봤다.
─ 너도 빌고 싶은 게 있나보네? 복종서약 풀어 달라, 뭐 이런 건 안 들어줄 건데.
─ …이제 와선 굳이 풀어달라고 할 생각도 없어.
시큰둥하게 투덜거리는 엘레나.
유다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 그럼 뭐야. 소원으로 뭐하게?
─ 내가 원하는 건….
그 때, 영상이 끊겼다.
파손된 크리스탈이어서, 영상기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아!”
당황한 엘레나는 자신의 마력으로 크리스탈을 수습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마력조작으로 망가진 크리스탈은 고칠 수 없다.
“죄송합니다, 다희 님….”
“아뇨,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유다희는 짜게 식은 눈으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유다희의 눈가에 푸른 빛이 맴돌았다.
[‘간파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크리스탈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엘레나가 푸르게 빛난다.
진실.
“어떻게 된 걸까요? 왜 멀쩡하던 크리스탈이…. 이런 건 들어본 적 없는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엘레나가 붉게 빛났다.
거짓.
엘레나는, 이 크리스탈이 왜 이렇게 됐는지 알고 있다.
‘시발, 깐프 년!’
‘아이씨, 김진우…. 이런 짓 해버리면, 나만 다희 님께 미움 받잖아. 이거 봐, 다희 님 표정 좀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