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화 〉
#77. 반란.
“…….”
샐리는 눈을 깜빡깜빡 떴다.
분명 꿈은 아니고, 현실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시간이 바뀌었다.
미래가 아닌 과거로.
‘분명히 아침점호를 받고 있었는데….’
일터로 나가기 전, 크리스티나는 인원점검을 한다.
정해진 시간마다 모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긴 것으로 간주하기 위해.
모두에게 통신도구를 구해줄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거쳐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였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샐리는 회귀했다.
자신은 변한 것이 없는데 시간선이 달라졌다.
그 사실을 얼마안가 깨달았다.
눈치 못 채는 게 더 이상했다.
‘또, 또 회귀할 줄이야.’
기준은 모르겠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되돌아가는 건지, 샐리의 머리로는 알아낼 수 없었다.
‘성자님!’
다 필요없고, 성자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비록 가면을 쓰고 있어 본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샐리는 성자가 누구보다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안길 때면 세상만사 다 잊을 수 있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살아있다, 라는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샐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일터로 향했다.
성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또’ 나타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해할 수 없었다.
저번과 똑같은 과정을 거쳤는데, 성자만 안 보였다.
말이 되는 일인가?
샐리는 시무룩해진 상태로 일을 마쳤다.
이전 회차 때처럼 축 늘어져서 복귀했다.
그 상태가 며칠째 반복되니, 크리스티나가 샐리를 수상쩍게 바라봤다.
이전 회차의 기억들 때문에 안 그래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샐리.”
“아, 크리스티나 성녀님.”
크리스티나는 자연스럽게 샐리에게 접근했다.
샐리는 이 접근조차 익숙했다.
“요즘 힘든 일 있어요?”
“힘든 일….”
샐리는 이 생활이 마음에 든다.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살만해서 좋았다.
다만 부족한 것이 있다면, 나날이 커져가는 성욕인데….
‘전부 성자님 때문이야.’
샐리는 성욕이 적은 편에 속한다.
남편과의 담백한 관계를 제외하고, 먼저 바라거나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남편을 배신하고 먼저 바랄만큼 성자와의 섹스가 기분 좋았다.
“힘든 일…. 있어요.”
샐리가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나는 이후 나올 말에 집중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도와줄 수 있을까.
샐리는 성자의 부재에 대해 말했다.
성자가 김진우를 의미한다는 것을, 크리스티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남자 때문에….’
크리스티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푸시 여신의 성자, 사랑을 베푼다는 명목 하에 여자를 범하고 다니는 남자.
강간범인 그를 좋게 볼 리 없었다.
“한 번 찾아보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크리스티나 성녀님.”
나름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말했지만, 결국 섹스가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이렇게까지 변한 샐리가 낯설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샐리는 남편을 사랑하여 그리워하는 여자였으니까.
남자와의 성관계를 바라며 헤프게 몸을 굴리는 여자가 아니니까.
‘그런데 어떻게 찾아?’
애매했다.
단서라곤 성자가 나타난 ‘방’의 좌표뿐이다.
과연 그를 찾을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확신할 수 없었다.
샐리는 크리스티나를 슬쩍 흘긴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리히메의 노예 수용소에 잡혀갔을 것 같아요.”
“오리히메라고 하면 그…. 오니 말하는 거죠?”
회귀의 굴레에 휩쓸린 샐리에겐 노예수용소 반란이 벌어지기까지의 정보가 있다.
뒤에서 구경했지만, 과정 정도는 알고 있었다.
“네.”
“…알았어요. 한 번 알아볼게요.”
크리스티나는 그 뒤로 오리히메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
소수 인원을 꾸려서 조금씩 갉아 들어갔다.
김진우 덕분에 부드러워진 오리히메는 노예들을 크게 자극하지 않았다.
노예들은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중이었다.
노역과 감시가 헐거워진 틈을 타, 호선은 노예 수용소에서 보다 멀리 이동했다.
그 때, 크리스티나 일행과 마주하게 되었다.
“…….”
크리스티나 일행을 만난 호선은 그들이 구명줄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 챘다.
날카로운 감각은 나약한 그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서로 정보를 교환.
크리스티나는 날짜에 맞추어 노예 수용소를 터트리기로 작정했다.
호선의 계획에 숟가락을 얹는 것에 가까웠다.
‘이 남자는 대체 뭐지?’
크리스티나가 보기에, 호선은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언제라도 탈출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그 계획은 전부 리나에게서 나온 계획이었다.
호선과 통화하며 섹스 했던 경험, 그것이 생생하게 기억으로 전달되어서 가능했다.
디데이를 정하고 헤어졌다.
호선은 원래의 노예 수용소로, 크리스티나는 인원을 모집하기 위해 자신의 영역으로.
일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시련이 끝난 당일에, 노예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 * *
“반란?”
반란이라 함은 무엇인가.
쿠데타, 아랫놈이 윗사람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다.
4층에서 오리히메에게 쿠데타를 벌일만한 놈이 있을까?
없다.
굳이 만들어내자면 크리스티나.
‘근데 크리스티나도 유다희가 있을 때나 벌였지.’
크리스티나가 적을 늘릴 성격은 아니었다.
노예 수용소에 갇혀 있는 이들이 불쌍하고, 속으로는 구하고 싶어 미칠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절대 반란을 주도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노예 수용소에서 탈옥이라도 하고 있는 거냐.”
“네, 넵. 노예들이 우르르 탈출을 시도해서 간수 몇이 죽는 바람에…. 다들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내가, 너무 유하게 대해준 것 같네.”
“…끕…!”
오리히메가 살기를 일으켰다.
눈앞의 여자는 오리히메의 기세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서방님은 푹 쉬고 계세요. 제가 다 처리하고 올게요.”
“됐어. 도와줄게.”
“아니에요. 제가 할 일이에요. 노예들 때문에, 서방님께 피곤한 일을 떠넘길 순 없어요.”
“…다 같이 빨리 끝내고 다 같이 빨리 쉬자. 그게 나아.”
“서방니임….”
오리히메는 거의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리히메가 내려다볼 수밖에 없어서, 기분이 조금 묘했다.
이것이 암컷의 시선…?
뭔가 불쾌한 것 같으면서도 나쁘지는 않았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으니.
“그래, 그냥 다 죽여 버리면 되는 건가?”
“…그러면 편하긴 하지?”
몸을 풀면서, 유다희가 중얼거렸다.
지금 유다희를 막지 않으면 대량학살이 펼쳐질 것이다.
상관은 없지만….
굳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다녀올게. 다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
유다희나 티타니아, 아이실리아는 두고 갈 생각이다.
데리갈 필요가 있을까 싶다.
유다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를 훑어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당당한 나조차 움찔하게 만들 정도로.
“…괜히 우르르 가봐야 고생만 할 것 같으니까….”
“난 괜찮아.”
“편히 쉬어야지. 몬스터 잡느라 고생했잖아.”
“전혀? 그렇게 따지면 네가 더 고생했지.”
자지 세우고 허리 흔들고.
제법 고생하긴 했다.
“…쯧.”
유다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 짓도 안했는데 나쁜 놈이 된 것 같다.
“아, 몰라. 난 쉬러 갈 거니까, 네 알아서 해.”
유다희 쪽에서 먼저 포기했다.
나를 따라오지 않고 물러나기로 한 것이다.
등을 돌려 멀어지는 유다희를 바라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리스티나 따먹어야 하는데 데려갈 수는 없지.’
노예들의 반란은 내게 좋은 소식이다.
노예들 때문에 위험하다면 모를까.
내 경지에 이런 이벤트는 그저 반가운 일이었다.
“너네도 쉬고 있어.”
“저도 주인님 따라 갈래요.”
“나도.”
티타니아와 아이실리아는 짐에 가깝다.
그냥 얌전히 꺼져주는 게 나를 돕는 길이다.
“그냥 가서 쉬어.”
“아아앙, 주인님이랑 놀고 싶어요.”
티타니아에게 명령을 내렸다.
로봇처럼 뻣뻣한 걸음으로, 티타니아가 점점 멀어졌다.
“주인님! 주인니이이이임!”
한 년을 보내고.
아이실리아를 바라봤다.
아이실리아도 가기 싫다는 듯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어.”
아이실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명령의 힘을 알기 때문일까.
어느 정도 순종적이었다.
토닥토닥-.
“가서 쉬어.”
엉덩이를 토닥여주었다.
아이실리아는 시뻘게진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조금 그런가 싶어, 손을 뗐다.
떼자마자, 아이실리아가 말했다.
“더, 더 해줘….”
“얌전히 쉬고 있으면, 나중에 잔뜩 놀아줄게. 원 없이.”
“흐읏, 힉…!”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두드렸다.
아이실리아는 요란하게 신음하며 엉덩이를 내주었다.
움찔거리는 폼이 매우 귀여웠다.
“가.”
“아, 알았어….”
아이실리아가 멀어졌다.
어딘가 아쉬운 듯 자꾸 뒤를 힐끔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을 외면하며 노예수용소가 있는 좌표로 향했다.
이미 경험을 해봤기에, 헤매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노예들은 어떻게 할까요, 서방님?”
“이제 곧 5층으로 올라갈 거야. 네 알아서 해.”
“네, 알았어요. 서방님은요? 어디로 가실 거예요?”
“나?”
크리스티나를 찾으러 갈 것이다.
‘이 반란을 크리스티나가 주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타이밍이 절묘하다.
익숙한 느낌이 풍기니, 크리스티나와 호선이 그리울 수밖에 없다.
‘리나의 보지도 있구나.’
호선의 여자친구, 리나.
여기사 리나.
코인 몇 푼에 보지를 허락하고 만 헤픈 보지.
츄릅.
맛있어 보이는 보지가 많았다.
“일단 나 혼자 움직일게.”
“…네….”
“너도 그냥 쉬어도 돼. 나 혼자서도 안 위험하니까.”
“아뇨, 이 난리가 났는데 치우기는 해야죠.”
노예들만 생각하면 화가 나는 모양.
오리히메는 노예들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그럼 나중에 봐요, 서방님.”
“그래.”
오리히메를 보내고, 나는 가면을 꺼내 썼다.
이 가면만 있으면 또 다른 자아를 연기할 수 있으니 두려움이 없다.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
노예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고 있다.
얼마나 많이 잡아둔 건지, 역류하듯 끊임없이 나왔다.
“뭐, 뭐야? 가면?”
“무시해.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오리히메 오기 전에 도망쳐.”
나는 그들을 거슬러 움직였다.
다들 분주하게 움직여서, 서로 부딪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만났다.
“고맙습니다, 크리스티나 성녀님.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어요.”
“아뇨…. 그런데요, 그…. 어떤 남자 못 봤나요? 가면을 쓰고 스스로를 성자라 칭하는 남자인데….”
“죄송합니다만, 그런 남자는 못 봤습니다.”
“그런가요?”
호선과 리나를 비롯한 슬레이브즈.
크리스티나에게 신세지고 있는 플레이어들.
한 자리에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신은…!”
크리스티나가 나를 발견했다.
그녀에겐 낯선 가면일 테지만, 대충 비슷한 새끼라고 느낀 듯했다.
“여기서 끝을 보면 되겠네.”
“뭐라…. 크리스티나 님!”
내 살기를 눈치 챈 녀석이 서넛 있다.
놈들은 잽싸게 서로를 감싸며 몸을 굴렀다.
성검, 엑스칼리버.
제3초식, 정자다발포(精子多發砲)
바지 앞섶이 찢어지며 포문이 드러났다.
쏟아지는 빛줄기가 흙벽을 강타했다.
콰앙-!
미처 피하지 못한 이들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대부분 슬레이브즈 인원들이었다.
‘리나랑 호선은 살려야지.’
그 정도 조준은 할 수 있었다.
“모, 모두 전투준비해요!”
크리스티나가 나를 보며 소리쳤다.
질색하는 것을 보니, 내가 성자라는 것을 대강 눈치 챈 듯했다.
“여신 푸시의 가르침을, 몸에 새겨드리겠습니다.”
“역시 당신은 강간범이었어요. 성스러운 의무가 있는 성자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