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화 〉
#88. 다툼.
유피텔과 마주쳤다.
놈은 우리를 아는 체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이쪽을 흘겼다.
나와 유다희가 정말로 싸웠는지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유피텔의 세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싸움까지는 아니어도 사소한 다툼 정도는 있었어야 정상이었다.
그래서 냉랭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왕성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나와 유다희는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다.
유피텔은 그 모습이 퍽이나 만족스러운 듯 방긋 웃었다.
“질리네.”
유다희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 놈은 글러먹었다며, 일주일 내에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마왕성으로 들어왔다.
유피텔은 유피텔이고, 나는 나다.
내 성장을 멈출 수는 없었다.
‘신성력을 새롭게 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천사 우리엘에게 물어서 알아낸 정보다.
원작에 기대지 않고 얻어낸 첫 번째 지식.
신성력을 가두고 있는 껍질을 녹여야 한다.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신성력이 전신에 퍼질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선 천사의 도움이 필요해.’
천계의 일원이 껍질을 허물어주면, 나도 다른 성직자들처럼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
굳이 자지를 드러내지 않아도 남을 회복시키고 축복하는 게 가능해진다.
5층 제1고리에 머물고 있는 천사는 우리엘 하나뿐.
인간의 피가 섞인 유피텔도 껍질을 허물 수 있다고, 우리엘이 말했다.
근데 그 놈이 날 도울 리가 없지.
‘지금도 나쁘진 않은데….’
자지로 신성력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만의 특징,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하면 흥분되고 좋다.
하지만, 슬슬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상황이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탑재할 필요가 있다.
군복무 중에는 누구보다 꼰대로 살아가더라도, 전역을 하게 되면 일반인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강간도 줄이고 자극적인 쾌락을 멀리하는 연습을 할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하고….’
그 대상이 케라우노스의 여자들.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리엘까지.
“진우야, 저 앞에 듀라한.”
유다희가 듀라한들을 가리켰다.
얼른 잡고 오라는 의미였다.
이런 귀찮은 과정을 거치며 사냥을 하는 이유는 나를 성장시키기 위함이다.
유다희 혼자서 올라가면 금방 클리어 할 수 있음에도, 유다희는 열심히 나를 끌었다.
‘신’을 마주하고 싶다는 내 마음을 응원해주었다.
그 응원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듀라한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틀이란 시간이 흘렀다.
사냥을 하고 적당히 연기를 하는 일상을 보냈다.
어제는 유피텔이 보는 앞에서 싸우기까지 했다.
멀리서 이 상황을 보고 있는 유피텔을 위해, 치얼스.
“네가 뭘 안다고…! 나도 힘들어, 계속 고민된단 말이야!”
“…오우오우, 조금 많이 리얼한데?”
집, 중.
유다희는 입 모양으로 내게 의사를 전달했다.
유피텔에게 선보이는 연극에 집중하라며 나를 다독였다.
나는 감정을 끌어올렸다.
“이런 씨발년이!”
“꺄, 아아악.”
유다희의 머리채를 쥐어뜯을 기세로 잡았다.
유피텔의 시점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각도로 고개를 비틀었다.
유다희가 키득거리며 웃고 있어서, 무조건 숨겨야 했다.
“진우야, 너 욕하는 거, 은근히 섹시하다?”
유다희는 입술을 촉촉이 적시며 입맛을 다셨다.
어딘가에 꽂힌 듯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중에 더 해주면 안 돼?”
“…좀 그런데.”
“왜애, 해주라.”
“알았어. 나중에.”
소음만을 차단하는 마력장막을 펼쳐둔 상태다.
유피텔이 보기에 우리는, 서로 화나서 싸우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이거 놔!”
유다희가 빼애액 소릴 지르며 나를 밀쳤다.
진심을 다했다면, 내 몸이 터져나갔을 텐데.
유다희는 최대한 힘을 죽이고 살살 밀어냈다.
“유다희!”
그리고 쏜살같이 도망쳤다.
내가 붙잡기도 전에 사라졌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것으로, 역할을 마쳤다.
‘이제 알아서 하겠지.’
유피텔이 유다희에게 접근할 것이다.
적당히 가까워지다가 마왕성으로 진입.
마왕성 2층 안전지역에 베이스캠프를 잡고, 유다희는 유피텔을 죽인다.
아주 괴롭게 고통을 안겨주면서.
시간이 더 흘렀다.
일주일 정도가 더 지나간 시점, 유다희가 유피텔과 마왕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이거를 사진으로 남기면….’
우리엘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 * *
유다희는 일주일 동안 화를 꾹 눌러 담았다.
찝쩍거리는 유피텔을 죽이고 싶어서, 그 분노를 참는 게 고역이었다.
‘왜 자꾸 만지려는 거지?’
이따금씩 올라오는 손을 쳐낼 때마다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다.
안전지역이라 분질러버릴 수도 없고.
PK경고를 이용하면서 뜸을 들이고 있었다.
때문에 유피텔은 달아오른 상태.
당장이라도 유다희가 엉덩이를 대준다면, 그 위에 올라타 발정한 개처럼 허리를 흔들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유다희는 유피텔의 파티에 가입했다.
김진우와 다투고 헤어졌다는 설정이었다.
“환영합니다, 다희 양.”
유피텔은 기다렸다는 듯이 유다희를 받아들였다.
그 나약한 김진우와는 달리, 자신이라면 유다희를 마왕성 2층 3층 4층까지 안내해줄 수 있다며 자신만만했다.
그리고 오늘, 그 결실을 맺을 때였다.
유다희는 유피텔 파티에 속해 마왕성으로 들어왔다.
유피텔이 보내는 세뇌의 텔레파시에 적당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꼴에 자존심이 있는 건지 아니면 수컷으로서 정복욕구인지, 세뇌의 강도는 아주 약한 편이었다.
두리뭉실하게 감정을 고양시킬 뿐인 정도.
평소에 좆같은 상대가 약간 다르게 보이는 것 같은 느낌.
물론, 정신방벽이 두터운 유다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2층부터는 조심해야 됩니다, 다희 양. 위험한 녀석들이 나오거든요.”
유피텔은 당당하게 앞장서 걸었다.
여성 프리스트의 버프를 몸에 두른 채, 전격 마법을 발동했다.
콰과과광-!
지면을 타고 흐르는 뇌전이 마왕성 2층으로 퍼져나갔다.
유피텔과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가 새까맣게 타들었다.
강하다.
5층 제1고리에서 내로라 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유다희에 비하면 어린 애 장난에 가깝다.
‘…….’
김진우에겐 전력을 보여주지 않았다.
힘의 3할 정도를 진심으로 숨기고 있으니까.
─ 다희 님, 다음에 만날 때는 저도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엘레나와의 대련에서 엘레나에게 인정을 받았다.
7층에서 활동하는 톱클래스 플레이어, 8성 엘레나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유다희를 상대로, 유피텔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임자 있는 그녀에게 찝쩍거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마왕성 2층에는 도플갱어들이 우글우글 거린다.
도플갱어는 듀라한과 달리 전투에 유연하게 반응했다.
열화 버전에 가깝지만, 플레이어들의 스킬을 흉내 내기도 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선 무의미하지만.
당장은 유피텔이 설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다희 양은 편하게 저만 따라오시면 됩니다.”
유피텔은 유다희 앞에서 자신이 가진 힘을 자랑했다.
동물들이 마음에 드는 암컷에게 구애를 하듯 있는 힘껏 무위를 선보였다.
“대단하네….”
유다희는 시큰둥한 티를 감추고 입을 열었다.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고, 느껴지는 감정은 없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기분이라 웃음을 꾸며내기가 힘들다.
‘김진우, 보고 싶어.’
따로 행동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그리운 건지 모르겠다.
김진우를 떠올릴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너무도 소중했다.
‘빨리 끝내야겠다.’
얼른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안전지역에 들어왔다.
마왕성 2층에 마련된 쉼터였다.
“이곳은 마왕성의 쉼터입니다, 다희 양. 위험한 마왕성 내에서 자유롭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죠.”
“와, 진짜네.”
“몬스터도 나오지 않고 PK도 불가능하니, 편하게 쉬시면 됩니다.”
유피텔은 유다희에게 알려주듯이 자랑스레 말했지만,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다.
이전에 비슷한 패턴으로 들은 적도 있기 때문에 신선한 느낌도 없었다.
‘죽이자.’
유다희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유피텔이 눈치조차 못 챌 정도로, 찰나의 순간에 살기를 제어했다.
고문에 대해 빠삭하진 않다.
오히려 무지한 편에 가깝다.
그러나 상관없다.
유다희의 목적은 정보라든가 회유 따위가 아니다.
철저한 고통 그리고 공포를 심어주고 싶을 뿐이니.
전문적인 지식은 필요가 없다.
적당히 숨만 붙여둔 상태로 고통만 새겨주면 된다.
다음부터 자신을 볼 때마다 공포에 질리도록.
자신이 회귀하면서 유피텔에게 정보가 넘어가게 김진우의 정액을 먹이고, 무자비한 경고를 담아 보내는 것이다.
“유피텔, 잠깐 나 좀 볼 수 있을까?”
죄책감이나 죄악감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다.
길을 걷다가 벌레를 밟을 수 있는 것처럼, 유다희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유피텔을 바깥으로 끌어들였다.
멍청한 유피텔.
유다희를 헤벌쭉한 얼굴로 바라보며 뒤따랐다.
머릿속엔 살과 살의 마찰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 뒤로 얼마 되지 않아, 처참한 비명이 마왕성에 울려 퍼졌다.
“유, 유피텔 님…!”
유피텔의 파티가 다급하게 유피텔을 찾았다.
커다란 젖가슴을 출렁거리면서, 피범벅이 된 유피텔을 마주했다.
“이, 이 년이 지금 누구를…!”
“유피텔 님, 구해드릴게요!”
“살려줘, 빨리 나 좀 살려달라고…!”
유피텔은 정말로 처절하게 소리쳤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짓뭉개진 상태에, 고간부에 중증 화상을 입었다.
당장 회복 마법을 받지 않으면 죽느니만 못한 상태가 될 지도 모른다.
추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미친년을 죽여! 이 시발, 커헉…!”
유다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유피텔의 얼굴에 물을 부었다.
김진우의 정액을 희석한 물이었다.
꿀꺽-. 꿀꺽-.
“커흑, 콜록!”
뱉으려고 하면 할수록 코와 입으로 물이 들어갔다.
역류하듯 흘러들어온 물 때문에 머리가 저려왔다.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됐다.
유피텔에게 김진우의 정액을 먹이고, 유다희가 움직였다.
모든 기억을 가져갈 수 있도록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촤악-!
“꺄아아아악!”
“안 보여, 눈이 안 보여요!”
“유피텔 님, 도와주세요! 죽고 싶지 않아요!”
파티가 전멸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여자들이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내지르며 죽었다.
5층까지 올라온 플레이어지만,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순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하는 사냥과 무자비한 살육 PK는 감당해야 하는 두려움의 무게가 달랐다.
“으, 으으….”
유피텔은 의자에 묶인 상태로 바들바들 떨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자신을 고문하기 위해 다가오는 유다희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살려줘, 살려줘…. 이제 그만, 그만해. 그만하라고…!”
그 어떤 목적도 없다.
유다희가 자신에게 하는 고문에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증오나 복수, 그런 감정이 하찮게 느껴진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고문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다희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줬으면….
“끄아아아아아아아악!”
고통만을 위한 고문에, 유피텔은 무력감을 느꼈다.
죽음이 유피텔의 몸을 옥죄었다.
* * *
“유피텔 어디 있어? 그 새끼가 내 몸으로 도대체 무슨 짓을…!”
“언니, 몸 괜찮아요? 치유의 노래!”
“흑, 흐윽…. 시발, 좆같은 놈…!”
케라우노스의 길드하우스.
유피텔에게 세뇌당한 여자들이 모여 지내는 장소다.
그녀들에게 있어 보금자리라 할 수 있는 곳이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들은 길드하우스를 낯설게 느꼈다.
“…죄송해요, 제 힘으로도 자궁까지는 회복이….”
“개새끼가 왜 안에다 오줌을 싸고 지랄이야…. 죽인다, 죽여 버릴 거야.”
이제까지 당한 짓들을 떠올리며 분노하고 있었다.
반쯤 세뇌 당해있던 상태가 해제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엘은 소란스러운 길드하우스를 둘러봤다.
여자들 얼굴은 익숙하지만,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다.
우리엘의 입장에서 저들은 유피텔의 장난감에 불과했다.
열등종족을 육변기로 쓰든 말든, 우리엘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뇌가 풀린 것은 꽤 큰 문제였다.
‘유피텔….’
천한 인간의 피가 섞였어도 동생은 동생이다.
천계의 일원으로서 그가 헛된 죽음을 겪지 않도록 옆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미 늦은 것 같지만.
복수라는 명목 하에 천벌은 이행해야겠지.
유리엘은 길드하우스에서 나와 김진우를 찾아갔다.
범인이라 할 만한 플레이어가 유다희 밖에 없으니, 유다희가 마왕성에서 나오기 전에 인질로 잡아둘 생각이었다.
“우리엘 님…?”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