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아빠와 딸.
아이실리아가 원하는 컨셉은 확고했다.
내가 애비, 아이실리아는 딸.
부녀 간에 있을 수 없는 금단의 쾌감을 탐하고자 했다.
이런 성향이 있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파파라고 부르거나 아빠라고 부르거나, 자주 있던 일이니까.
이번엔 그 이상.
노골적인 부녀 관계를 연기하고자 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이실리아는 벌써 역할극 준비를 마쳤다.
뿔을 밀어 넣고 평범한 인간처럼 모습을 꾸몄다.
얼핏 보면 드래곤이라는 생각 자체가 안 들 정도였다.
백발이 눈에 띄기는 하는데.
애초에 판타지에서 머리색쯤이야, 무지개만 아니면 허용범위 안이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시련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잖아. 우리 둘만 집중하면 돼."
아이실리아는 진지했다.
그 어떤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이제까지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나야 뭐, 언제든 집중할 수 있는 배우지."
가면 쓰고 보낸 시간이 있다.
제2의 자아는 원래 내 자아만큼이나 익숙하다.
"그럼 이제부터 아빠라고 불러."
"키랑 가슴도 줄이는 편이 더 집중하기 편하지 않을까?"
"아니. 가슴은 커야 해. 클수록 좋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기쁘게 만든다.
여성의 젖가슴이란 그런 미지의 힘을 품고 있다.
"아, 알았어."
아이실리아는 그저 아빠와 딸 포지션만 확립된다면 뭔들 상관 없어 보였다.
나도 박을 수만 있다면 무슨 역할이든 관심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목적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자, 가보자. 적당히 고 랭크 의뢰 하나 클리어 하는 걸로?"
"오래 걸릴 수도 있어."
아이실리아가 태클을 걸었다.
오래 걸리면 좋은 거 아닌가?
나는 얼마나 걸리든 상관 없다.
딸을 향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줄 생각이니까.
"아빠한테 오래 걸릴 수 있어, 가 뭐냐."
"하, 하는 거야…?"
"당연하지. 네가 하자며?"
몰입은 순식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는 배우의 몰입력을 더욱 증폭시켜준다.
"큼, 흠!"
아이실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나를 쳐다봤다.
눈빛에 새로운 감정이 스며들었다.
간질간질한 기대감과 흥분으로 가득했다.
"아, 아빠…."
"그래, 이름은 아이리로 하자. 그래도 되지?"
"네, 넷…."
대답을 망설이던 아이리가 존댓말을 꺼냈다.
몰입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우리는 어느 외진 숲속에 있었다.
주위에 있는 아무 마을이나 도시로 가서, 용병으로서 의뢰를 받든 심부름을 하든 할 생각이다.
"움직이자."
아이리가 나를 졸졸 따라왔다.
역할이 부여되자마자 극히 수동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애정이 깃들었다.
종류와 분위기가 사뭇 이질적이다.
딸이 아빠에게 품어서는 안 될 그런 감정이었다.
숲에서 마을을 찾아다녔다.
인적이 드물지만, 사람 다니던 길은 있기 마련이니.
그 흔적들을 살피면서 움직였다.
"능력은 적당히 봉인하는 거다."
"방금 용병들처럼 막 죽이지만 않으면 되지?"
"되지?"
"되죠, 아빠?"
안 좋은 습관은 곧바로 지적해서 고쳐주었다.
아이리도 얼굴을 붉히면서 실수를 인정했다.
"착한 딸이 되려면 말도 예쁘게 해야지."
"알았다고…. 요."
"좋아."
아이리와 나는 마을을 찾아냈다.
둘 다 기본적으로 신체능력이 높기 때문에 오래 걸릴 이유가 없었다.
"시골 촌동네라기보다는 도시에 가까운데."
외곽 성벽이 둘러져 있을 정도라면, 영주가 중요시 여기는 도시일 가능성이 높다.
성벽의 역할을 생각해볼 때, 그 가치는 당연 다른 도시들보다 중요하니까 성벽이란 자원을 투자한 것이다.
현대 사회의 포장도로는 아니지만, 닳고 닳았다고 표현해야 할까.
마차나 사람에 짓밟혀 잡초 하나 자라지 못한 길을 쭉 따라 걸었다.
"통과."
다그닥, 다그닥-.
마차들이 성문 앞에 줄 지어 서있다.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 검문 시간이 의외로 오래 걸렸다.
경비병들은 각자 역할을 맡아 마차에 실린 물자를 확인하고 통과시켰다.
사람만 드나드는 것은 크게 제재하지 않았다.
외곽 성벽 밖에도 후진 가옥들이 있으니까.
사람들의 왕래를 하나하나 통제하면 너무 귀찮아진다.
비효율적인 것이다.
"잠깐."
은근슬쩍 지나가려는 찰나, 경비병이 우리를 붙잡았다.
비교적 가벼운 차림의 사람들은 마차에 비해 왕래가 자유롭다고 했지만, 척 보기에도 수상한 이들은 경비병 입장에서도 확인을 해볼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우리였다.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아.
나는 적당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왕이면 확실하게 복장을 갖추고 움직이는 건데.
어차피 가짜 세계라는 생각이 대충 행동하게 만들었다.
"고생 많으십니다."
가볍게 합장하며 경비병을 마주했다.
내 몸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다.
조금만 흘려주어도, 빛의 신을 믿는 이들에게 호감을 살 수 있다.
경비병의 얼굴이 밝아진다.
사제의 신성력은 곁에 있기만 해도 몸을 편안하고 가볍게 만들어준다.
"아, 빛의 사제님이셨습니까."
은은하게 피어나오는 신성력은 그 무엇보다 확실한 신분이었다.
빛의 신을 믿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힘, 빛의 신이 그 신분을 증명해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경비병은 나를 완전하게 믿었다.
시선이 아이리를 향한다.
"그 여자 분은…?"
"제 딸입니다."
"아아…."
전혀 닮지 않았지만, 일단은 딸이다.
아이리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드래곤이 일개 인간 경비병에게 인사한다.
유희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사제님, 혹시 성함을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라이언 입니다."
"라이언 사제님, 로베르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경비병을 지나쳐 도시로 들어갔다.
도시 안의 전경은 3층 킹덤보다 못한 수준.
오랫동안 머물 곳은 못 된다.
"일단 사제 코스프레로 시작했으니까, 교단 먼저 가보자."
교단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찾아볼 생각이다.
적당한 난이도의 의뢰를 하나 맡는 것.
그게 우리의 목적이니까.
교단에게 받든 길드에게 받든.
크게 의미는 없었다.
의뢰 성공 유무조차도.
보상도 관심 없다.
우리 둘 사이에 만들어진 역할, 이것을 훨씬 자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면 만족한다.
"네. 아빠."
아이리는 아빠라는 호칭에 힘을 주었다.
아찔하게 느껴지는 배덕감 때문에 호칭이 귀에 착 감겼다.
유다희도 그렇고 아이실리아도 그렇고, 누군가 나를 아빠라고 불러주는 것에 쾌락이 느껴졌다.
비정상적인 역할극에 불알이 떨렸다.
빛의 교단으로 가는 길.
복장을 더욱 단정하게 갖추었다.
크리스티나의 사제복을 봐둔 것, 그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
아니었다면 애매하게 입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입으니까 완벽한 빛의 사제네."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완벽한 위장이다.
시련 속 인간들은 절대 의심하지 못 한다.
은은하게 풍기는 신성력은 내 굳건한 믿음의 방증이니.
나에 대한 의심은 빛을 향한 불신인 것이다.
'성녀나 천사가 거의 깡패 같은 직책이잖아.'
무슨 말만 하면 빛에 대한 이단, 불경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
말싸움에서 질 수 없는 필승 카드를 쥐고, 자기들끼리만 즐기고 있었다는 게 억울하다.
교단을 찾아 헤매고 있던 그 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평범한 시민들과 달리 무장을 하고 있는 인간.
용병인가 모험가인가.
그들은 하나 같이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문 밖으로 뛰어가는 발걸음은 어딘가 다급한 분위기를 풍겼다.
"드래곤이야. 드래곤이 도시 근처에 나타났다고."
"확실한 정보 맞아? 갑자기 드래곤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무어라 떠들면서 움직이는데,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한 무리는 드래곤을 보겠다는 일념 하에 뛰고, 한 무리는 드래곤에게서 도망가겠다는 마인드로 움직였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드래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야, 꼬맹아."
급하게 뛰어가는 애새끼를 붙잡았다.
지금 도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물어보기 위함이다.
'아는 게 있을까 싶지만….'
뛰어다니는 거 보면, 아예 모른다고 보기엔 어렵다.
"아, 왜 잡아요!"
"물어볼게 있어서 그런다. 잠깐만 얘기 좀 하자."
"아! 싫어. 시간 없다고…!"
버둥거리는 애새끼 앞에 은화 한 닢을 꺼내주었다.
'신'의 배려를 받고 있기 때문에 시련에서 여러 편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이 편리한 환전 시스템.
가지고 있는 코인이 이 시련 세계의 화폐가 된다.
꼬맹이의 눈이 돌아갔다.
은화를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어떤 느낌인지 알지? 너는 정보를, 나는 이 은화를."
"뭐, 뭐가 궁금한 건데요?"
곧 죽기라도 할 기세로 발광하던 애새끼가 잠시 누그러졌다.
은화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지금 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으니까. 그냥 네가 왜 뛰어다니고 설쳤는지 얘기해."
"드래곤. 도시 근처에 드래곤이 나타났대요. 그래서 드래곤 보려고 가는 중이었어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이유였다.
꼬맹이가 드래곤을 만나러 가겠다는 게 우스웠다.
겁도 없지.
"드래곤은 왜 보러 가냐? 벌써 죽으려고?"
"죽으러 가는 거 아니야. 뭐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가는 거야."
꼬맹이는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시선은 내가 쥐고 있는 은화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 가져가라."
"이제 풀어줘!"
내 은화를 챙긴 꼬맹이가 다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어, 나는 놈을 풀어주었다.
"……."
내 손에서 풀려난 녀석은 은화를 꽉 쥐고, 나를 흘겨보았다.
"사제. 사제구나."
내 복장을 확인했다.
반응이 참 느리구나 싶었다.
"사제지."
은화를 하나 더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빛의 교단이 어디에 있는지 아냐?"
"……."
"선불이여? 지랄 맞네."
놈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은화 한 닢 쯤이야, 가뿐하지.
나는 녀석의 손바닥 위에 은화를 던져주었다.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