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화 〉 #103. 솔로 플레이(2).
#103. 솔로 플레이.
딸이란다.
나보다 어른인 여자가 관계상 내 자식, 딸.
라이언이 쉰을 넘겼다고 했을 때부터 꺼림칙했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던 건, 겉모습만큼은 애새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오나는 아니다.
막말로 가장 어른답게 생겼다고 봐도 무방했다.
“…….”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레오나는 개의치 않았지만, 라이언은 쌓인 게 많아보였다.
레오나를 노려보며 이를 갈고 있으니, 둘 사이의 관계를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다.
‘용사 하나에 졌다고 했지.’
라이언은 내 신성을 이어받았다.
완전한 100%는 아니지만, 최강에 군림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 라이언이 용사에게 패배했다.
그 용사도 라이언에 비견되는 힘을 지녔다는 의미다.
‘여기사님이 낳은 자식…. 밖에 없는 게 당연하지.’
시련에서 뿌린 씨앗이 얼떨결에 대륙 전쟁의 싹이 되었다.
“루미너스? 여기사님 성이 루미너스였나?”
“아니에요. 제 성은, 천계에서 계시가 내려와서 바뀌게 된 겁니다.”
크리스티나도 루미너스라는 성을 가졌다.
신성의 깊이가 진하면, 천계 측에서 루미너스란 성을 세례 한단다.
유다희가 물었다.
“혹시…. 지금 몇 살이니?”
“스물일곱입니다.”
“…….”
레오나의 나이는 우리보다 다섯이나 많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어린 편이었다.
“마왕을 물리치고, 아빠를 찾기 위해 대륙을 찾아다녔어요. 어머니는 믿고 있었거든요. 아빠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남몰래 마왕과 동귀어진 할 남자가 아니라면서….”
시련이 현실로 고정되었다면, 연합군 입장에선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과 같았다.
나와 마왕군이 동시에 사라졌으니, 내가 처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듯싶다.
“어머니가 주신 단서는 검은머리, 그리고 저랑 기운이 닮았다는 것. 두 가지만 가지고 대륙을 뒤지고 다녔죠.”
“…….”
“결국 찾지 못했어요. 도중에 ‘투쟁의 탑’으로 소환됐으니까요.”
레오나는 나를 찾은 것이 만족스러운 듯 활짝 웃었다.
“이렇게 인연이 닿을 줄은 몰랐어요. 소환되고 나서 못 만나고 죽으면 어쩌나, 했는데….”
레오나가 내게 다가왔다.
아까 전에 못 볼꼴을 보였는데, 아랑곳 하지 않았다.
“아빠. 한 번 안아주세요.”
나랑 비슷하게 큰 딸이 안아달라고 한다.
사심 하나 담지 않고, 덤덤하게 안아주었다.
포옹이었다.
“저보다 어려보이는 아빠라니, ‘투쟁의 탑’이 신기하기는 하네요.”
포옹을 끝마치고, 레오나는 어색하게 물러났다.
뒤늦게나마 방금 보았던 것을 떠올린 걸까.
붉어지려는 얼굴을 어찌 막을 수가 없다.
“그래도 다 큰 모습을 보니까, 뿌듯하기는 한데. 뭔가 아쉬워.”
“뭐가?”
“아무런 교류가 없었잖아.”
유다희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미련가지지 마. 네 애라고 해도, 크게 의미를 부여하면….”
유다희는 끝말을 삼켰다.
의미부여 해봐야 나만 힘들다는 그 말.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이미 늦은 일이고, 돌이킬 수 없다.
‘신’의 힘을 빌리면 또 개입할 수 있겠지만, 인위적으로 역사를 조종하고 싶진 않다.
뒤바뀐 과거를 간접적으로 접하는 것, 의외로 불쾌했으니까.
“슬슬 돌아갈 거야. 애들이랑 이제….”
유다희가 말했다.
회귀하고 돌아가자고.
애들이 회귀를 따르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원리를 생각해보면, 회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뭐, 어색하기도 하고…. 당장 돌아가자.”
“이제 안 쉴 건데, 괜찮지? 6층, 7층…. 끝까지 올라갈 거야.”
“그래.”
빛의 신과 마주했을 때, 유다희의 무력 수준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전달받았다.
한 달이면 ‘신’조차 눈을 속일 수 없을 거라고.
그 시간 안에 최대한 올라가야 한다.
신성 레벨을 80까지 억지로 끌어올린 것은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6층의 패러사이트도, 7층의 메카닉 봇들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능력치만 더 올리는 걸로 목표를 잡자.’
스킬 레벨은 신성 덕분에 부족함이 없다.
능력치 레벨을 조금 올려, 버틸 수 있도록.
[‘사망회귀’가 발동됩니다.]
온천 한 번 즐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32구역에 위치한 여관.
쾅쾅쾅-!
─ 레, 레이븐 님!
─ 닥쳐, 저리 꺼져!
누가 문을 격하게 두드렸다.
생각해보니까,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온천여관에서 적당히 휴식을 취하면서, 키리스를 만날 생각이었는데.
라이언을 만나는 바람에 벌을 받게 됐다.
벌을 받는 동안, 여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얼떨결에 키리스를 방치해둔 상황이 된 것이다.
“야, 인마!”
키리스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일주일 내내 기다리고, 그 결과가 회귀라니.
나였어도 화가 많이 났을 것 같다.
“키, 키리스 누나. 지금 유다희 온다. 오고 있어. 내가 다시, 잠깐 시간 내서 찾아갈 테니까….”
“이런 시발. 사람 바람 맞혀놓고, 이제 와서? 이제 와서어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어쩔 수 없었다니까?”
이미지에 안 어울리게 바락바락 화를 냈다.
키리스는 분을 억지로 식히며 나를 노려봤다.
“이 개새끼, 시발새끼.”
“누나….”
키리스가 발을 동동 굴렀다.
당장 무언가 하고 싶은데, 유다희 때문에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나의 맹세 해.”
“오케이, 할게.”
이번엔 구두약속이 아닌 맹세를 걸었다.
키리스를 오늘 안에 달래주러 가지 않으면 근력 수치가 5레벨 감소하게 된다.
다음날은 민첩이 5레벨, 그 다음은 마력이 5레벨….
오늘 무조건 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흥.”
키리스는 마나의 맹세를 받아낸 후에야 돌아갔다.
유다희와 엮이고 싶지 않아 했다.
“미안하기는 하네요. 주인님은 저희랑 놀아주느라 못간 건데.”
“뭐, 저 여자가 어쩔 거야. 파파랑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찡찡거려?”
티타니아의 자기반성과 아이실리아의 반발.
자기들끼리 떠드는 꼴을 보며, 유다희를 기다렸다.
끼익-. 끼익-.
“…….”
유다희가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유다희…?”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진우.”
“어, 예….”
“할 말이 있어, 둘이서만….”
유다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밖으로 나갔다.
좁아진 미간, 찌푸린 눈살.
웬만한 내용으론 흠집도 안 날 텐데, 보통 내용이 아닌 듯했다.
나는 애들을 방 안에 두고 유다희를 따랐다.
* * *
“자주 부르네.”
유다희가 자결의 가호를 발동하고, 다시 10층의 공간에 소환됐다.
심상만 부르면 된다고 하지만, 주기가 짧아졌다는 느낌을 숨길 수 없다.
“다희야. 선물은 어땠어?”
소다희가 유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간사하게 올라가는 입 꼬리는, 유다희를 화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왕좌에 앉아 거만하게 꼬고 앉은 자세로, 내려다보고 있다.
‘투쟁의 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제 손 아래에 두고, 김진우를 붙잡아두려 한다.
“…내가 고작 애들 때문에 물러설 것 같아?”
“하긴. 추억도 뭣도 없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긴 해.”
소다희는 유다희의 의지를 부정하지 않았다.
라이언과 레오나는 김진우의 미련을 무겁게 만들기 위한 도구일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김진우가 떠난 세상은 무너질 수밖에 없으니, 세계 자체를 지우는 것과 같다.
유다희는 자신을 비롯한 다른 여자들의 목숨까지 단번에 버리겠다는 각오를 다진 상태다.
뜬금없이 나타난 김진우의 아이들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리가 없다.
소다희는 유다희에게 양심의 가책 따위를 기대하지 않았다.
이건 맛보기,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발판.
“그러면, 그 추억이 생긴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
“네 몸에 수작을 부리는 건 아예 안 되더라. 이제는 내 힘…. ‘신’의 힘으로도 불가능한 경지에 이른 거겠지. 관계 횟수가 다른 애들에 비해 적기도 했고.”
“그건….”
“알아. 비련의 여주인공 마냥 정 떼려고 하는 꼴이 웃겨서 그래. 다 의미 없다고 해도 꿋꿋한 게 보기 좋아. 칭찬해.”
소다희가 키득키득 웃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회상하며, 기분이 썩 좋아졌다.
유다희는 과연 무슨 표정을 지을까.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아마…. 김진우의 의지가 간섭하지 않는 이상, 네 자궁은 아이를 임신하지 않을 거야. 날짜가 맞으면 몰라도, ‘시스템’의 신성에 의한 강제잉태는 불가능하겠지.”
“…….”
“근데 다른 애들은 아니야. 아직 진실을 모르는 상태이기도 하고, ‘시스템’인 신성을 조작해서 몰래 임신시키는 것쯤은…. 아주 쉬운 일이지.”
소다희의 말을, 유다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불러내서 임신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게 이해 안 됐다.
“내가 임신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
“상관없지. 상관없어. 근데 김진우는 아닐걸.”
소다희가 히죽 웃었다.
올라가는 입 꼬리에, 유다희는 어느 때보다 커다란 불안감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짓을 꾸몄기에….
“김진우도 마냥 싫어하진 않을 거야. 걔는 은근히 바라고 있었으니까.”
“너….”
소다희는 자신의 아랫배를 쿡쿡 찌르고, 쓰다듬었다.
“여기, 지금 너만 비어있어.”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일 것 같아?”
소다희가 허공에 팔을 휘저었다.
무언가를 조작이라도 하듯이 휙휙.
“이해하기 편하도록 잠깐 보여줄까?”
시야 공유, ‘시스템’의 일부를 보여주었다.
유다희 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각자의 정보가 빼곡하게 기입된 인터페이스.
그녀들의 모습, 하복부 쪽에 자궁 형태의 그림.
[플레이어, ‘엘레나 트리가드’]
[상태 ─ 회임 완료]
[플레이어, ‘아이실리아 본 화이트’]
[상태 ─ 회임 완료]
[플레이어, ‘티타니아 세쿠스리스’]
[상태 ─ 회임 완료]
[플레이어, ‘오리히메 레도니즈’]
[상태 ─ 회임 완료]
“어떻게 해야 회귀를 무시하고 임신시킬 수 있는지…. 고민을 엄청 했어.”
“…….”
"김진우 때문에 이것저것 해보면서 가능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 뒤로 계속 방법을 찾아다녔지."
소다희는 유다희를 흘기며 설명을 이었다.
“회귀할 때마다 육체 능력치가 전승된다. 왜? ‘시스템’의 일부니까. 그 생각을 조금 비틀어, 아이에게도 적용시키니까…. 짜잔.”
마술을 끝낸 마술사 마냥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아직도 김진우를 돌려보낼 거야? 김진우는 절대 안 가려고 할 텐데.”
“이, 시발…. 개 같은 년이!”
“앗하하핳!”
소다희는 유다희를 쫓아냈다.
유다희는 발걸음을 재촉해 김진우를 찾아갔다.
도대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