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8화 〉 #004. 엘레나 트리가드(5).
#004. 엘레나 트리가드.
“엘런이 너무 예뻐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샤는 엘레나의 숙소에 자주 찾아왔다.
‘투쟁의 탑’에서 방금 막 나온 엘레나는 모르는 이야기지만, 엘리샤에겐 꽤 익숙한 일과가 되었다.
엘레나도 보고, 엘레나를 쏙 빼닮은 귀여운 아기도 보고.
일석이조,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엘리샤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일상이었다.
‘…….’
비록 엘프들 사이에선 아직도 어린 애 취급을 받고 있지만, 엘리샤도 다 큰 성인이다.
인간 상인들에게서 밀수해온 서적과 사진들로 교미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세계수님에 의해 탄생하는 하이엘프와 달리 다른 엘프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남녀 한 쌍이 살을 섞으며 교미해야 아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빈약한 성적 지식 때문에, 엘리샤는 자연스럽게 엘레나의 남자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엘레나를 침대에 눕히고 엘레나의 꽃잎에 단단한 양물을 삽입했을 그 남자.
이성적인 관심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누구일까, 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가슴은 쓰라렸지만,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엘리샤는 그 남자를 대충 눈치채버렸다.
‘보는 눈빛이 달랐어.’
엘레나와 엘지누.
침실에 단 둘이서 있었다.
엘레나가 신입 면담이라는 핑계를 댔지만 엘리샤는 전혀 믿지 않았다.
응접실도 있고 사무실도 있는데, 왜 개인침실에서 면담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엘런이 자고 있는 방에서?’
도대체 엘지누의 어떤 면이 엘레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남 부러울 것 없는 엘레나에게 씨를 뿌리려면, 과연 어느 정도의 남자여야 하는 것일까.
“…저는 슬슬 부하들의 훈련을 살펴보러 가야될 것 같습니다.”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기사님들의 수련을 보고 싶어요.”
엘리샤는 엘레나와 함께 있고 싶었다.
새로운 하이엘프의 탄생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지만,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많이 피로하지만, 그래도 엘레나와 있으면 피곤하지 않았다.
그리고 따라간 연무장에서 엘레나를 사로잡은 신입 기사의 잠재력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콰앙-!
* * *
“아.”
실수했다.
강하나, 올 마이티를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는 근력에 한참을 낮췄는데도 이 모양이다.
‘마나 때문인가.’
근력만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
이 세계의 생명체들은 마나를 이용해 자신의 육체를 강화한다는 점을 잊고 있었다.
마나도 쓰지 않고 그 수준의 근력을 유지했으니,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목검은 산산조각 나 흩날리고, 비크리가 연무장 벽에 처박혔다.
그런 비크리를 중심으로 연무장 일부가 무너지고 있었다.
“비, 비크리를 구해!”
“무너지는 연무장은 정령! 흙의 정령을 불러서 지지하도록!”
“기사들 중에 흙의 정령과 계약한 이가…. 없습니다!”
엘프 기사들이 우왕좌왕 염병을 떨었다.
능숙한 듯 허접한 움직임을 보였다.
대응은 하는데, 어설픈 느낌이랄까.
“모두 진정하세요.”
그 때, 엘리샤가 나섰다.
엘리샤는 흙의 정령을 불러내, 무너지는 연무장을 다시 도로 돌려놓았다.
거대한 흙의 정령, 신의 힘으로 확인하니 상급에 해당하는 녀석이었다.
‘대단하네.’
‘투쟁의 탑’에서는 일련의 너프 과정을 겪었다.
튜토리얼 0층에서 평소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빌빌거렸었는데.
“역시 엘리샤 공주님이십니다!”
“상급 정령이라니…. 역시 최강의 하이엘프, 최고의 정령술사…!”
“감사합니다, 엘리샤 공주님! 엘레나 단장님!”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
순수한 엘프들이 맞기는 한 걸까?
똥구멍 빠는 솜씨가 아주 남달랐다.
연무장에서 수련에 힘쓰던 엘프 기사들이 게걸스럽게 엘리샤를 빨아재꼈다.
따라갈 수가 없다.
“다들 괜찮으세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알브헤임의 소중한 기사님들이잖아요.”
“우오오오오오오!”
엘리샤는 겸손한 모습을 보이며 엘프 기사들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엘프 기사들은 가라앉을 생각을 안했다.
유명 아이돌 팬클럽들을 보는 느낌.
광기에 휩싸인 현장이 썩 달갑지 않았다.
그 소란 속에서, 벽에 박힌 비크리가 신음을 흘렸다.
“끄윽….”
“아.”
힘겹게 일어서는 비크리.
주변 선배들은 비크리를 일으켜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심하다는 듯 흘기는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불쌍한 선임을 향해 다가갔다.
“괜찮습니까, 비크리 선배님?”
“히익…!”
비크리는 울상을 지으며 나를 피했다.
뻗은 손은 애처롭게 공기와 악수했다.
엘콘이 다가왔다.
“누가 비크리 데리고 가! 아직 훈련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얼른 사라져라.”
엘콘은 비크리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자신만만하던 녀석이 내게 깨졌으니, 엘콘의 자존심이 퍽 상한 듯했다.
‘실순데.’
대화 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죄가 없다고, 엘콘에게 말을 걸고 싶다.
하지만 엘콘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
멀뚱멀뚱 구경하고 있는 엘레나를 흘기며, 어떻게든 설욕하려고 했다.
‘다른 기사단 눈치도 보이고….’
내 기를 꺾어놓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다른 기사단 인원들도 검은머리 엘프에 대한 적개심을 바탕으로, 제1기사단 엘콘의 짓에 암묵적인 동의를 한 상태다.
엘콘은 그 끝을,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근데 조금 그래.’
나도 꼴에 남자라서, 엘레나가 보고 있는데 질 생각이 없다.
신이네 어쩌네, 그런 격의 차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저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엘콘과 같은 이유였다.
엘콘은 목검 거치대로 다가가 목검을 꺼내들었다.
비장한 뒷모습에서 의도가 느껴졌다.
“너는 내가 직접 상대해주마. 네 실력이 조금, 내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으니.”
자신이 앞에 나서겠다.
그 말은 즉, 내 실력을 꽤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차례대로 보냈다간 다 깨질 것 같으니까, 직접 나서서 끝장을 내겠다는 뜻.
내 눈에는 가엾게 보였다.
‘엘콘의 힘을 수치화해서 보여줘.’
[엘콘 트리가드]
[Lv.52]
신의 힘은 아주 간단하게 놈의 실력을 레벨로 표현했다.
‘엘레나는 어느 정도?’
[엘레나 트리가드]
[Lv.269]
‘어나더 레벨이구나.’
레벨 간의 경험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육안에 보이는 숫자차이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세계관 최강자는?’
[사르티아 베르제르부]
[Lv.300]
‘…….’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현 마왕인지 전 마왕인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아이실리아의 시련 속에서 나에게 따먹히고 아이를 임신한 마왕이 세계관 최강자로 거론되었다.
이렇게 비교하니, 엘레나의 급이 어느 정도 체감이 되었다.
그리고 엘콘도.
‘같잖네?’
엘콘이 부들거리고 있는 게 우습다.
이곳에서 적당히 져주는 게 기사단 막내로서 역할을 다하는 것일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재능충으로 가자!’
루트를 변경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새끼들한테 빌빌 기어야 하는 건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내 레벨을 100으로 맞추었다.
육체와 마력의 밸런스에 균형을 잡았다.
그러다가 또 문득 드는 생각.
‘아니, 내가 왜?’
잠재력을 다시금 높였다.
엘레나 바로 아래, 부단장 레벨까지.
[Lv.140]
‘……?’
엘레나와 부단장 사이의 현격한 차이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 부질없구나.
내 평균 수준을 150으로 맞추었다.
신의 힘에 의해 적당히 조정되었다.
육신을 휘감는 힘, 순환하는 마나, 한결 가볍다.
엘콘이 내 앞에 섰다.
목검을 거만하게 쥐고 내게 겨누었다.
“조금 세게 갈 거다. 조심해서 막아보도록.”
주변의 소음이 일단락된다.
다른 기사단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다.
“선공을 양보해주마.”
엘콘은 목검을 까딱거리며 나를 도발했다.
느릿하게 흔들리는 목검.
이런 느낌이구나.
나는 느긋하게 마나를 끓였다.
가열된 마나는 내 육체를 순환하고 달구었다.
세상이 느리게 변한다.
그 세상 속에서 나를 올곧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엘레나 한 명뿐.
콰직-!
짧게 내리쳤다.
목검이 단숨에 부서졌다.
“……!”
엘콘의 눈이 크게 뜨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내려친 목검은 그대로 엘콘을 향해 그어졌다.
진검도 아니고 오러를 일으킨 것도 아니다.
뼈가 부러질 뿐, 다치지는 않을 것이다.
콰앙-!
흙먼지가 세게 일어났다.
시야가 가려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후욱-!
무언가 부딪쳤다.
엘콘인가 싶지만, 엘콘은 아니었다.
엘콘의 실력으론 내 힘에 물러서지 않고 맞설 수 없다.
다른 이가 개입했다.
‘누가?’
이 연무장에서 제1기사단 부단장보다 강한 자가 있나?
있을 리가….
흙먼지가 걷혔다.
엘레나였다.
“엘콘을 치유실로 데려가라.”
엘레나는 한 팔로 내 목검을 막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넵, 알겠습니다!”
엘레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제1기사단 인원들이 움직였다.
뻣뻣하게 굳은 엘콘을 데리고 연무장 밖으로 뛰어갔다.
최고선임 하나는 엘레나에게 경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엘지누.”
“…….”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엘레나가 뿜어내는 기세에, 마른침을 삼킬 뿐이다.
“엘지누!”
“옙.”
엘레나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그제야 나는 대답을 꺼냈다.
내 현재 신분을 자각시켜주는 외침이었다.
“…따라와.”
엘레나가 나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등을 돌렸다.
하극상, 이라고 봐도 무방하니까.
아마도 기사단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엘레나를 따라 연무장을 벗어났다.
뒤편에서 엘리샤가 엘프 기사들을 다독여준 후,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