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
#57. 초신성.
킹덤이 한바탕 뒤집혔다.
신성 ‘알브헤임 중앙 기사단’의 등장 때문이다.
“어제 지렸지. 적운이 꼼짝도 못하더라. 역배에 건 놈들, 대체 얼마를 먹은 거야?”
“이름이 유다희, 라고 그랬나. 인간이면서 진짜 강하던데? 그 정도면 하운드도 이기지 않을까?”
“에이, 그건 너무 갔다. 킹덤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게 하운드인데,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신입한테 진다고? 말이 안 되지.”
플레이어들은 가십거리를 물고 뜯었다.
어린 아이처럼, 누가 더 강하네약하네, 떠들어댔다.
직접 경기를 보지 못한 대부분은 유다희를 무시했고, 두 눈으로 똑똑히 관전한 이들은 유다희의 우세에 손을 들어주었다.
“적운을 상대할 때도 진심을 안 보였다니까? 거의 가지고 놀 듯이 이겼어.”
실제로 유다희는 본 실력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까지 모아온 가호들 덕분에, 적운의 NTR패거리보다 몇 단계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층에서 머물고 있는 ‘수컷’을 상대로는, 지고 싶어도 절대 질 수가 없었다.
“하아….”
나는 멍청하게 앉아있다.
킹덤의 어느 한 카페에 앉아, 어제 있었던 일을 되새겨봤다.
‘도대체 뭘까? 왜 나한테 화난 거지?’
정확히 말하자면, 화를 내거나 하진 않았다.
조금 냉혈한의 모습을 보여줬을 뿐.
‘일주일 뒤에 4층으로 가자고?’
스타팅 포인트 때문에 조금이나마 망설여야 하지 않나?
혹시라도 4층에 고정되어 버리면, 유다희 입장에선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다.
회귀자 입장에서, 스타팅 포인트가 갱신되기 전에 모든 관계를 올바르게 재정립해야 된다.
엉켜있는 관계가 있다면 풀고,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친해져야 한다.
근데, 유다희는 그런 것들에 개의치 않았다.
일단 4층으로 올라가겠단 생각뿐이었다.
이제까지의 행보를 생각해볼 때, 말도 안 되는 판단.
‘이상해….’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평소 유다희가 아니었다.
“쯧….”
“주인님.”
눈 깜빡할 사이에 티타니아가 나타났다.
검은 장막을 통해 어디든 이동할 수 있기에, 나는 굳이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불렀다.
유다희를 통해 4층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들었으니, 슬슬 필요한 것들을 챙길 생각이다.
티타니아의 경우, 복종서약을 할 수만 있다면 하는 편이 좋다.
“이젠 주인님이라고 잘도 부르네.”
“이, 이렇게 안 부르면 정액 안 줄 거잖아. 안 먹으면 죽어. 죽어버린다고….”
목숨 값에 비하면 자존심 값 정도야 싼 편에 속한다.
“차라리 복종서약을 하는 게 어때?”
“…….”
티타니아는 말이 없었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티타니아 입장에서, 반에 반쪽짜리 회귀가 진행 중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자지를 물고 빠는 기억이 전달되고 있다.
처녀를 빼앗기고 종속관계를 맺는 것까지 빠짐없이.
‘어차피 선택지가 없잖아.’
내 정액 말고는 답이 없는 문제였다.
시기에 따른 문제일 뿐, 티타니아가 내게 굴복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결말.
티티나이라고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물론, 복종서약을 맺고 회귀를 시작하면 태도가 바뀔 것이다.
왜 이제야 했을까, 하면서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티타니아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복종서약을 하면, 책임져주는 거야?”
“책임?”
“정액, 배부르게 먹여주는 거냐고.”
“죽게 둘 순 없으니까.”
책임이란 단어는 내게 너무 무겁다.
가장 싫어하는 단어라고 볼 수 있다.
“…잠깐 고민 좀 해볼게.”
내 미적지근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지, 티타니아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말했다시피 티타니아에겐 선택지가 없다.
당장 내가 4층으로 올라가버리면, 티타니아는 3층에서 굶어죽을 뿐이다.
“아, 참고로 나 일주일 뒤에 4층으로 올라가.”
“뭐?”
말을 꺼내자마자, 티타니아가 화들짝 놀랐다.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는 말이었으니까.
저렇게 놀라는 것도 얼추 이해가 됐다.
“그렇게 됐어.”
“나는? 난 어떻게 하고?”
“너는…. 나야 모르지. 네가 안 올라가겠다고 하면, 두고 갈 수밖에.”
같이 올라가자고 해도 올라갈 것 같진 않았다.
티타니아에겐 3층 킹덤에서 일구어 둔 것들이 있다.
이것만 잘 굴리면, 티타니아는 평생을 떵떵거리며 사는 게 가능하다.
“버리는 거잖아. 네 정액 없으면, 나 죽는다니까?”
“그래?”
“그래, 라고 할 게 아니야. 너 때문에,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오옹.”
“이, 이 개새끼야!”
티타니아가 내 머리채를 붙잡았다.
쥐어뜯으려는 순간, 주변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카페라서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뭐야뭐야, 사랑싸움?”
“어? 저 서큐버스는…. 티타니아 아닌가?”
“티타니아? 그, 오르드 육변기?”
누군가 그런 말을 꺼냈고, 티타니아는 억울한 듯 빼액 소릴 질렀다.
“오르드 육변기 아니야!”
그리고 내 손을 잡고 카페 밖으로 끌고 나왔다.
나는 얌전히 티타니아를 따라주었다.
“짜증나. 육변기 아닌데, 왜 자꾸 다들 나를 그런….”
“몰라서 묻냐? 서큐버스니까 그런 거잖아.”
“…나도 알아.”
허겁지겁 뛰어가다가 골목길에서 숨을 골랐다.
능력치가 높아서 체력이 부족하다거나 한 건 아니고, 그냥 쉬었다 가려는 것이다.
“서큐버스라서 그런 눈으로 보는 거 알지만, 짜증난다고.”
“섹스 할 땐 잘만 말하더니.”
“아니, 말 안하면 네가 안 싸주잖아.”
모든 것은 내 정액을 얻기 위함이었다.
주인님이라 부르는 것도, 육변기라 아양 떠는 것도, 전부.
“복종서약 해. 그럼 평생 정액 줄게.”
“…진짜?”
“어. 내가 죽은 것만 아니면, 정자는 계속해서 만들어지니까. 네가 너무 욕심내서 먹으려고만 안 하면, 충분할 것 같은데.”
티타니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있다.
수많은 선택지 중에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쥐뿔도 없다.
티타니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두 개.
내 육변기가 되거나 시체가 되거나.
둘 중 하나다.
“…아, 알았어. 복종서약 할게.”
종속관계가 된 순간부터, 티타니아의 삶은 끝장이 났다.
살기 위해 한 남자에게 매달려야 하다니.
얼마나 구차하고 힘든 일인가.
티타니아는 어쩔 수 없이 복종서약을 맹세했다.
그런데,
[‘복종서약’이 거절되었습니다.]
말과는 달리, 복종서약이 적용되지 않았다.
티타니아가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일주일 뒤에 보자.”
“이거 왜 이래? 동의했는데, 왜 안 되지?”
“네가 덜 굶어서 그런 거야. 일주일 뒤에 봐.”
이 망할 서큐버스 퀸은 일주일 정도 굶으면, 알아서 복종서약에 동의할 것이다.
나는 그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티타니아를 보내고, 콜로세움에 도착했다.
유다희가 없어도 능력치 노가다는 계속 이어져야만 했다.
‘최대한 성장한다.’
4층은 ‘방’이 중요하다.
‘방’이 곧 힘이고 권력이다.
‘방’의 크기와 개수에 따라 버프와 디버프가 걸리기 때문.
그것만이 아니다.
4층에 올라가는 순간부터, 철저히 개인플레이를 해야 한다.
같은 곳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각자 다른 곳에서 시작해서 그렇다.
‘유다희 없이 살아남아야 해.’
4층 평균에 맞출 필요가 있다.
적어도 60레벨.
맞추지 못하면, 4층에서 빌빌거리며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4층에선 플레이어의 인권을 생각해주지 않으니까.
애초에, 플레이어의 자유나 권리를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종족이 얼마 없다.
나는 콜로세움 접수대로 향했다.
오늘은 ‘알브헤임 중앙 기사단’이 아니라 다른 걸로 출전할 생각이다.
용병.
그게 오늘 내 역할.
접수대에 다가가니, 콜로세움 직원이 나를 바라본다.
이어지는 친절한 목소리.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쟁탈전에 참여하려고요. 용병으로.”
“아, 용병으로 쟁탈전에 참가할 생각이세요? 용병 등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용병은 누구나 등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용병을 고용하는 건 길드의 선택이다.
“김진우 플레이어, 전적을 확인해드리겠습니다.”
“네.”
“일반전 0전0승0패, 랭크전 1전1승0패.”
“맞습니다.”
처참하기 짝이 없는 성적.
하지만 괜찮다.
이런 나라도, 당장이 급한 길드가 있기 마련이니까.
3대3이나 5대5가 아닌 20대20.
용병 수요의 대부분은 20대20 대규모 쟁탈전에서 이루어진다.
“아, 벌써 파견을 요청한 길드가 있어요. ‘적운’에서 김진우 플레이어를 원하네요?”
“예?”
소설에서도 나오지 않은 ‘적운’, 대체 뭐하는 길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오늘 콜로세움에 죽치고 있어도 크게 이상하진 않았다.
사냥으로 코인을 버는 플레이어가 있는가 하면, 쟁탈전으로 코인을 버는 플레이어들도 있다.
둘 다 위험한데, 후자는 명성까지 얻을 수 있다.
‘어제 얘기 들어보면, 적운은 다른 부업도 있는 것 같고.’
AV유통.
3층 킹덤에선 상점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을 만들고 파는 상업경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종류가 그렇고 그런 것이지만, AV도 그 중 하나였다.
“대규모 쟁탈전에서 파견요청이에요. ‘적운’길드 쪽에서 용병을 구하고 있어요. 수락하시겠어요?”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어떻게 보면 적운과는 적이다.
내가 그쪽 능력치를 빼앗았으니까, 나를 좋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파견요청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존나 궁금하긴 해.’
우리가 적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함께 강간이나 다니며 친목을 다졌을 텐데.
‘…아니다.’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이렇게 대놓고 파견을 요청하고, 쟁탈전 중이나 후에 나를 공격한다?
그런 미련한 짓을 할 것 같진 않다.
NTR패거리가 얼마나 소중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파견 요쳥에 대해, 내 육감이 말하고 있다.
당장 수락하라고.
나는 인벤토리에서 가면을 꺼냈다.
새하얀 가면.
제2의 자아, 나만의 아이덴티티.
“수락하겠습니다.”
콜로세움 직원이 시스템을 조작했다.
[‘적운’에 소속됩니다.]
적운 길드에 가입됐다.
“적운 측에 연락을 넣어둘게요.”
곧 있으면 ‘적운’ 쪽에서 사람이 올 것이다.
보인다.
적색 구름이 그려진 코트를 입은 플레이어가 두리번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
“…가면은 뭡니까?”
“컨셉이요.”
상대는 내 가면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투쟁의 탑’에는 가면 쓴 미친놈보다 신기한 종족들이 많다.
적운 소속 길드원이 내게 코트를 건넸다.
적운 길드원이라면 입어야 한다고 한다.
나는 코트를 걸쳤다.
뭔가 그럴 듯한,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신라텐세…!”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얼굴에 검은색 쇠막대라도 박아야 하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며 남자의 뒤를 따랐다.
“대규모 쟁탈전은 처음이죠?”
“예.”
“일반 쟁탈전이랑 크게 다르지 않아요.”
남자는 내게 여러 가지를 알려주었다.
용병으로 고용하긴 했어도, 내 전적이 썩 믿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급해서 인원 채우는 용도로 데리고 온 것 뿐.
‘애초에, 적운의 요청에 응하는 플레이어가 있을까?’
반쯤 맛이 간 길드다.
보통 플레이어 입장에서, 패배에 대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용병으로 참가해서 승리하면 이익이지만, 패배하면 어이없이 대가를 내놓아야 하니까.
그래서 ‘붉은 머리 용병대’의 님프 앨리도 팀원을 못 구했다.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용병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대규모 쟁탈전에서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버프요.”
“구역이 아니라 버프…. 오, 아시네? 공부하고 왔어요?”
대규모 쟁탈전에서 버프는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버프를 확보한 길드가 이긴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설명할 필요가 없다.
남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대기실로 향했다.
20대20, 대규모 쟁탈전을 치르는 길드는 대기실도 엄청 넓다.
스무 명을 수용해야 하니 당연한 것이었다.
방도 여럿 나뉘어 있고, 스물이 생활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다만,
“아앙! 하앙! 앙!”
적운 길드의 대기실에선 보기 민망한 난교가 펼쳐지고 있었다.
스물 그 이상이 왔다갔다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