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 회귀자를 따먹음-212화 (475/681)

〈 212화 〉

#60. 성자.

슬레이브즈와 연을 만들었다.

보잘 것 없는 줄이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이게 어떻게 쓰일지 아무도 모른다.

그 가능성을, 이백만 코인으로 구매한 것이다.

“잘 쓰겠습니다. 이 코인은 동지 포섭 및 레지스탕스 운영비로 쓰일 겁니다.”

“레지스탕스라….”

말했다시피, 이 새끼들은 노예 새끼들이다.

혁명군이고 나발이고, 그냥 노예.

슬레이브즈.

호선의 감사인사를 대강 넘기고, 다음 계획을 물었다.

이들이 작전을 실행하는 건 크리스티나와 접촉하고 난 이후인데, 과연 지금 단계에선 무얼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일단은 믿을 만한 동지를 모을 겁니다.”

“어떻게. 비밀결사 아닌가?”

“오리히메 때문에 굶주림이 심합니다. 볼품없는 한 끼 식사를 얻으려고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실정이죠. 그런 자들 중 저희와 어울리는 자들을 찾아낼 겁니다.”

코인을 가지고 무얼 하든 관심을 껐다.

신경 써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소설 속에서, 이들은 소다희와 엮이기 전까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오리히메가 압도적이긴 하니까.’

메인 빌런이라 봐도 무방하다.

오르드와 비슷한 느낌이면서, 오르드와 전혀 다르다.

오르드는 본인의 무력이 비교적 허접했지만, 오리히메는 아니다.

그녀 자체가 최종병기, 파국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나도 먼저 덤빌 생각은 없다.’

가면을 쓰고 있어도 사리게 된다.

만나지도 않았는데, 내 인격을 갱생시킬 정도이니.

오리히메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리라.

“다음 모임은 언제냐.”

“일주일 뒤에 모입니다. 후원 받은 코인이 제법 되니, 이제부터 자주 모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을 해야 코인을 받는다.

‘방’의 소유주는 코인을 자동으로 지급받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은 아니다.

노예인 플레이어들은 소유주의 자비에 기대야 한다.

근데, 코인을 공짜 나눠줄 소유주는 없다.

어떻게든 굴려먹는다.

노동력을 바치고 코인을 얻는다.

간단한 거래가 적용되고 있었다.

“어차피 바로 옆방이니까, 모이면 나 부르러 와라.”

“알겠습니다.”

슬레이브즈를 내버려두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512. 112.’, 무인도가 나를 반겼다.

해가 저물고 달이 떠올랐다.

달빛이 내 방을 비추었다.

낯선 냄새도 훅 풍겨왔다.

바다냄새였다.

“으. 하….”

동굴 안에 둔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유다희는 뭐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철썩, 철썩-.

파도가 모래사장에 부딪쳤다.

잠이 솔솔 오는 배경음이었다.

* * *

‘샐리가 이상했어.’

크리스티나는 샐리의 변화를 눈치 챘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듯 안절부절 못하고, 그러면서도 무언가를 바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샐리를 돌려보내고, 샐리가 일하고 있는 ‘방’에 대해 알아봤다.

‘513. 112.’

평범한 밭으로 이루어진 방이다.

크게 어려운 일은 없다.

끝자리 방이라서 위험할 수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디버프 때문에 생각보다 안전해.’

디버프를 뚫고 샐리를 괴롭힐 정도의 강자가 갑자기 나타날 리 없다.

게다가 샐리의 반응을 보면 괴롭힘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내일 아침, 일 하러 가는 것을 고대하는 듯했으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크리스티나는 내일 아침 샐리를 따라가기로 했다.

가만히 앉아서 고민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 진짜 같이 가시게요?”

“네. 어제 샐리 표정이 안 좋아보였거든요.”

“그건…!”

샐리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김진우에게 보지가 얼얼할 정도로 따먹혀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크리스티나와 샐리가 ‘513. 112.’에 도착했다.

일을 하다 말고 따먹혀서, ‘방’이 너저분했다.

그래봐야 밭이지만, 샐리는 허둥지둥 어제의 흔적을 지웠다.

크리스티나는 샐리를 관찰하듯 흘겨봤다.

‘무조건 찾아올 텐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

샐리가 발을 동동 구르며 밭일을 시작했다.

크리스티나도 팔을 걷어붙이고 일손을 거들었다.

원래라면 다른 ‘방’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지만, 샐리가 걱정되어 오전 시간을 따로 빼두었다.

이 정도는 괜찮았다.

“여기 일은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크리스티나 님은 크리스티나 님을 필요로 하는 방으로 가시는 게….”

“그럴 순 없어요. 제가 샐리에게 오늘 하루 휴식을 권했는데, 샐리는 괜찮다고 했잖아요. 걱정돼서 못가요.”

크리스티나는 단호했다.

혹시라도 큰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오전이나마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샐리가 묘하게 들뜬 원인도 알아낼 겸.

샐리는 기쁘면서도 부끄러웠다.

김진우에게 박히고 싶어서, 크리스티나의 권유를 거부하고 온 것이기에.

끼익-.

“샐리, 내가 왔…. 다…!”

크리스티나는 샐리를 따먹으러 온 김진우와 마주쳤다.

바지를 입지도 않고 당당하게 문을 여는 김진우를 보며, 크리스티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김진우는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었다.

컨셉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가면 너머로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샐리가 보기에, 자신을 범하던 어제의 여유가 안 보였다.

‘저 남자가 원인이구나.’

크리스티나는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덜렁거리며 자랑스레 드러낸 아랫도리를 보고, 어제 있었던 일을 알아챌 수 있었다.

어째서 샐리가, 저 남자의 성기를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흘겨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진우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무례한 모습이네요. 당연하다는 듯 제 영역으로 넘어오는 태도도 어처구니가 없어요.”

크리스티나가 김진우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성녀라고는 해도, 능력치가 약하진 않다.

동급의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후위 역할을 맡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효율의 문제.

‘게다가 이 사악한 마력….’

흑마술이다.

저 남자는 흑마술사다.

자연의 섭리를 어기고 타인의 생명을 갈취하는 이단의 존재…!

원래라면, 흑마술을 쓰기 전까지 흑마력을 못 느껴야 정상이다.

흑마력이어도 흑마력이 아니다.

크리스티나의 고향차원에서 쓰이는 흑마력과 ‘투쟁의 탑’에서 김진우가 가지고 있는 흑마력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눈치챘다.

흑마력의 냄새를 맡았다.

적운의 코트, 김진우의 가면, 흑마술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민감한 자들은 흑마술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제 보여.’

샐리의 변화도 이해가 되었다.

김진우에게서 이어져있는 불길한 기운.

‘저 남자가 샐리에게….’

크리스티나가 메이스를 꺼내들었다.

찬란한 광휘에 휩싸였다.

김진우는 그 광경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쪼그라진 뇌를 열심히 굴렸다.

그리고 내린 판단.

샐리를 낚기 위해 막 던진 컨셉을 다시 한 번 주워 쓰기로 했다.

“눈이…!”

김진우의 성기에서 빛이 뿜어졌다.

그 어떤 때보다 강렬한 빛이어서, 크리스티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가렸다.

“크리스티나 성녀님, 당신의 명성 익히 들었습니다.”

“닥치세요, 강간마. 샐리를 괴롭히고, 또 다시 괴롭히러 온 거죠? 그렇게 두지 않을 거예요.”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강간을 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김진우는 뻔뻔하게 말했다.

지나치게 당당한 태도 때문에, 크리스티나는 실소를 흘렸다.

“본인이 내뱉고 있는 말이, 말 같지도 않다는 거 알고 있죠?”

“크리스티나 성녀님을 설득하기 위해서, 일단 제 소개부터 드려야겠군요.”

김진우가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인사에 맞춰, 성기의 빛이 휘황찬란하게 터져 나왔다.

“저는 성자입니다. 크리스티나 성녀님과는 다른 차원에서 성자 일을 했었죠.”

“성자? 성자라고요?”

크리스티나는 어이가 없었다.

스스로를 성자라고 칭하는 뻔뻔한 모습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성자와 성녀라 함은, 신의 선택을 받아 아주 강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사람을 뜻한다.

그들의 신성력은 누구보다 강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위험하고 약한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성자라는 단어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세요. 장난처럼 사칭해도 되는 직위가 아니에요.”

크리스티나는 메이스를 위협적이게 휘둘렀다.

잘못 맞았다간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김진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는 듯이, 크리스티나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저는 누구보다 떳떳합니다. 여신님께 성자로 선택받았고, 용사와 함께 마왕을 무찔렀습니다.”

“하!”

크리스티나가 썩은 미소를 보였다.

그녀는 김진우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믿어주실 겁니까.”

“그 꼴을 하고 있는데, 당신을 어떻게 믿겠어요. 본인 형색부터 올바르게 하고 말씀하시죠?”

단단했다.

도저히 뚫을 수가 없었다.

김진우는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고 싶었다.

강간마로 몰린 이 순간, 역전시키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뚝배기가 날아가고 말 거야.’

김진우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성기의 빛에 떨림이 생겼다.

마치, 김진우의 감정변화를 대변이라도 하듯이.

“…혹시 성녀님은, 다른 차원의 문화에 대해 색안경부터 끼고 바라보는 그런 야만인입니까?”

“예?”

“제 고향차원의 문화를, 성녀님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잖습니까. 다른 야만인들처럼…!”

김진우의 감정호소에 맞춰 성기가 빛을 화악 뿜었다.

‘신성력’의 발산이라, 따스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이, 이건…?!’

김진우에게선 흑마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엄청난 순도의 신성력도 느껴졌다.

크리스티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의 여신 푸시는 모두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합니다. 저희는 그 교리를 바탕으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랑을 전합니다. 상대가 누구든, 어떻게 생겼든, 교미를 통해 오물을 정화하고 행복을 전하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저희 고향차원의 사람들은, 오히려 푸시의 신도들을 보면 음부와 음경을 내어줍니다. 교접을 통해 신성력을 주고받아, 서로의 몸을 정화할 수 있으니까요.”

김진우는 점점 더 당당해졌다.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설정에 녹아들고 있었다.

“크리스티나 성녀님은 다른 차원의 문화와 문명을 야만인으로 취급하는 그저 그런 자였군요. 자애롭고 숭고한 성녀님이 아니었습니다.”

김진우의 가랑이에서 뿜어지는 빛이 누그러졌다.

감정의 동요가 줄어들었다.

크리스티나에 대한 평가를 확실하게 한 듯했다.

크리스티나는 혼란스러웠다.

분명 김진우가 샐리를 강간했음은 확실한데, 그것이 고향차원의 ‘문화’였다고 스스로를 변호하고 있었다.

“그건 고향차원의 문화잖아요. 그 문화를 ‘투쟁의 탑’에서 강제로 실천하고 다닌다면, 야만인이라 모욕 받아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시작은 강제였으나 끝은 순애였습니다. 인간의 인생을 정의할 때 죽음의 순간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듯, 저의 교접 또한 끝은 순애였습니다. 저와 샐리가 나눈 것은 강간이 아니라 교미인 겁니다.”

이상한 논리가 서로 맞부딪쳤다.

누가 봐도 김진우가 잘못됐으나,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김진우는 이제까지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회심의 한 방을 쏠 차례다.

“샐리에게 물어보십시오. 여신 푸시의 사랑이 역겹고 혐오스러워 쳐다도 보기 싫은 것인지, 아니면 자애롭고 사랑스러워 다시 한 번 받고 싶은 것인지.”

김진우가 샐리에게 화살을 던졌다.

크리스티나는 샐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성관계라는 게 그렇다.

말 한 마디에 자칫 까딱하면 강간이 되고 사랑이 된다.

크리스티나가 보기에 강간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지만, 샐리의 입장에 따라 값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여신 푸시에게 배운 그대로, 저는 사랑을 실천했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 비록 힘이 사용되었다고 해도,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샐리, 당신이 말해보십시오. 저의 전도가 불쾌하고 싫었습니까?”

김진우의 성기에서 빛이 흩날렸다.

그 어떤 빛보다 성스러운 힘이었다.

‘진짜 성자인 거야?’

저런 문화를 가진 차원이 있다니.

크리스티나는 믿을 수 없었다.

“샐리, 사실대로 말해요. 지금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불쾌하고 힘들다고. 저에게 말만 해주면 제가 당장….”

“크리스티나 성녀님. 성녀님은 자신의 의견을 강제하는,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습니까?”

“샐리. 제가 저 남자의 머리를 깨부술 수 있도록, 저에게 힘을 실어주세요.”

정당성을 쥐어 달라고, 크리스티나가 간절하게 부탁했다.

하지만.

“저, 저는 나쁘지 않았어요…. 더, 더 받고 싶어서 오늘도 온 거고….”

샐리의 입에서, 크리스티나가 원하지 않는 대답이 나왔다.

“흑마술! 당신이 흑마술로 샐리를 조종하고 있어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전혀 아니라는 걸 아실 텐데 말이죠. 성녀님은 소인배처럼 옹졸하게 의견을 관철하려 하는군요. 실망했습니다.”

“아니, 잠깐…!”

“샐리, 이리로 오십시오. 오늘도 샐리에게 사랑을 나누어드리겠습니다.”

“샐리! 가지 말아요. 강간이잖아요. 강제로 당한 거잖아요!”

크리스티나는 샐리를 향해 애타게 손을 뻗었다.

샐리는 잠깐 크리스티나를 바라보더니,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크리스티나 님. 오늘 해야 할 일은 해놓고 복귀하도록 할게요.”

“거, 거짓말이죠? 저런 남자한테, 왜 제 발로 가는 거예요? 샐리?”

“함께 와주셔서 감사해요.”

힘겹게 끌어 모은 미소에서 샐리의 진심이 느껴졌다.

샐리는 진심으로 저 남자에게 안기러 가는 것이었다.

“성녀님, 설마 남녀 간의 평범한 정사까지도 방해하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런 쓰레기는 아닐 거라고 믿겠습니다.”

“…말도 안 돼요. 샐리, 도대체 왜…?”

“여신을 모시는 자로서, 다른 이의 신을 부정한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지만, 물고 늘어지지 않겠습니다. ‘투쟁의 탑’이니까, 다른 차원에 대한 예의와 예절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며 용서하겠습니다. 그 또한 교접을 통해 극복해야 푸시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겠지요.”

김진우는 승리의 여유를 뽐내며 주절주절 나불거렸다.

“저와 샐리는 교미를 해야 돼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성녀님도 만인을 사랑할 수 있기를.”

“아앙…!”

마지막에는, 샐리의 둔부를 꽈악 주무르며 자신의 방으로 등을 돌렸다.

끼익-.

닫히는 문을 보면서, 크리스티나는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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