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한국대학교 유다희&유다혜.
최병훈이 호명됐다.
그의 파트너인 나도, 무거운 발걸음을 떼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환호성과 박수가 동시에 터진다.
연합MT라서 그런가, 무대 앞에 사람이 너무 많다.
여길 봐도 사람, 저길 봐도 사람.
“김진우! 김진우!”
그 속에서 휘파람을 불어대는 여자애, 다혜.
뭐가 그리 신이 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다희랑 같이 염병을 떨고 있었다.
‘…맥주는 또 어디서 들고 온 건데?’
다혜를 말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스폰서 최측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생회 연합회장인 한지용도 손을 놓아버렸다.
다혜 혼자 특혜 아닌 특혜를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 로맨티, 큼! 자기소개 한 번 해주세요.”
“수학과, 18학번, 최병훈이라고 합니다.”
“최병훈 학생,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아요. 푸흡, 조금 목소리를 추스르고….”
그리고 내 차례.
“다음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죠? 우리 스폰서님, 친구를 위해 한 몸 불사르고자 나왔다고 합니다! 박수 한 번 주세요!”
MC는 이미 내 얼굴을 외워버린 듯 소개를 대신해서 끝내버렸다.
살짝 신이 난 것 같은 텐션.
미리 언질을 줬기 때문에, 최병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다 알고 있는 상태다.
대학생 친구들의 흑역사 생산 현장 속에서, 중년 아저씨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남학생들이 준비한 무대는 노래, 아주 로맨틱한 노래를 준비했는데요.”
숨이 막힌다.
신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미래를 보거나 하진 않는다.
때문에 이 고백이 어떤 결과로 끝나게 될지 전혀 모르고 있다.
최병훈은 한태연과 이어질 수 있을까?
확신하기 힘들다.
나는 99% 확률로 새로운 흑역사가 생기리라 예상하고 있는데, 운명은 모르는 것이니….
“왜 로맨틱한 노래를 준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MC가 옆쪽 사무실을 흘겨본다.
언제라도, 음악을 틀 수 있게 준비를 마친 상태.
신호만 주면 금방 반주가 튀어나올 것이다.
“최병훈 학생의 진심어린 노래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뜨거운 박수로 응원해주세요!”
함성과 박수가 쏟아진다.
수학과 쪽에서 유독 소리가 컸다.
최병훈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반주를 기다렸다.
긴장한 기색을 애써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 ♪ ♬
노래 반주가 흘러나온다.
“…빛이 들어오면 자연스레 뜨던 눈~. 그렇게~ 너의 눈빛을 보곤 사랑에 눈을 떴어.”
부드럽게 깔리는 음악에 이어, 최병훈의 목소리가 덧씌워진다.
나름 진지하게 부르고 있어서 그런가?
학생들도 무어라 꼬투리잡지 않고 감상하는 분위기였다.
조명 세기를 조절하며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통제실에서 생각보다 컨트롤을 잘해주고 있다.
낮게 깔린 톤은 생각보다 진중했고, 사람들은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쁘지 않을지도?’
나도 모르게 색안경을 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깔보고, 최병훈이 하는 일이라면 죄다 안 좋게 보는.
너무 친해서?
아니면 진짜 소름끼칠 만큼 경쟁심을 느끼고 있어서?
뭐가 됐든 쪽팔리는 일이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속으로 박수를 보낸다.
“남의 얘기 같던 설레는 일들이~. 내게 일어나고 있어~.”
신의 힘이 아니었다면, 초월자라는 위치가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꿨을 무대다.
내 원래 성격이었으면….
아마 절대 안 올라왔겠지.
그런데 최병훈은 해냈다.
한태연한테 고백하겠다는 병신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의 벽을 뛰어넘은 것이다.
“나에게만 준비된 선물 같아, 자그마한~ 모든 게 커져만 가. 항상 평범했던 일상도, 특별해지는 이 순간~.”
1절이 끝나고 간주가 나온다.
최병훈은 숨을 고르면서 이쪽을 흘겨봤다.
진짜 절정은 최병훈이 하고, 나는 중간에 한 구간을 떠맡았다.
시간으로 따지면 1분 정도 될까?
최병훈이 주인공이라서, 나한테 할당된 분량은 딱히 많지가 않았다.
♬ ♪ ♬
간주가 곧 끝났다.
가사로 들어갈 차례가 되었다.
“…별 생각 없이 지나치던 것들이~. 이제는, 마냥 내게 예뻐 보이고, 내 맘을 설레게 해~.”
마이크를 꽉 쥐고 목소리를 토해냈다.
평소보다 더 숨이 들어가는 느낌, 목이 제멋대로 마구 떨리고 있다.
무대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학생들.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다양하다.
다들 이 분위기를 즐겨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스마트폰을 들고, 영상으로 남기는 사람도 몇몇 있다.
다혜였다.
언제 꺼냈는지 모르겠다.
다희는? 다희는 어디에 있지?
저기 인파 중심에 다희가 보인다.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팔을 휘젓고 있다.
살랑살랑, 양옆으로.
부드러운 발라드라도 듣는 것 마냥.
넘실거리는 파도를 만들었다.
“…남의 얘기 같던 설레는 일들이~. 내게 일어나고 있어~.”
다희 주위에 앉은 학생들도 따라서 팔을 흔들어준다.
뭔가 대단한 가수 콘서트라도 열린 듯.
목을 꽉 쪼이고 목소리를 잘 뱉어낸다.
삑사리 나지 않도록 빌면서.
“나에게만~. 준비된 선물 같아. 자그마한 모든 게 커져만 가. 항상 평범했던 일상도, 특별해지는 이 순간~.”
한 구간을 끝마치자마자 다시 올라간다.
노래는 클라이맥스로 향해가고.
최병훈은 곧장 노래를 이어 받아서 부르기 시작했다.
“너를 알게 된 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예뻐 보여. 그렇게 신난 아이처럼~. 순수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아아아~.”
마이크를 슬쩍 배 아래로 내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신의 힘을 사용했는데도, 왜 이렇게 불안하고 긴장이 되는 걸까.
“?”
“?”
반주는 계속 나오는데 노래는 끊겼다.
서로 멍청하게 바라보는 중, 최병훈이 급히 노래를 이었다.
“…준비된 선물 같아, 자그마한~. 모든 게 커져만 가. 항상 평범했던 일상도~. 특별해지는 이 순간. 깊은 사랑에~. 빠진 순간….”
마지막엔 내가 불렀어야 하는구나.
깜빡했다.
멋쩍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학생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내 실수를 무마시켜주는 것이다.
‘미안하다, 고맙다…!’
자칫 잘못했으면, 마무리가 엉망진창이 될 뻔했다.
MC아저씨가 다가왔다.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최병훈에게 말을 걸었다.
“로맨틱한 노래였습니다. 생긴 거랑 다르게 노래를 꽤 부르네요?”
“예?”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어요. 이 늙은 아저씨가 느꼈을 정도니까, 여기 있는 학생들도 다 느꼈을 거예요.”
은근한 분위기로 몰아가는 MC.
학생들도 슬슬 눈치를 채고, 주위를 막 두리번거린다.
최병훈과 묘한 관계가 있었던 여학생을 찾아내려 한다.
“병훈 학생에게는 ‘선물’ 같은 여학생이 이곳에 있는 거잖아요.”
“예, 뭐…. 그렇죠!”
스포트라이트가 최병훈에게로 쏠렸다.
나도 열심히 노래 불렀는데, 나만 빼고 다들 신난 것 같다.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신의 힘을 살짝 보태서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아무도 눈치를 못 챘다.
한 사람이 대놓고 튀었는데도, 학생들은 고백 갈기려는 최병훈한테만 눈길을 보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자리로 복귀했다.
내 역할이 겉절이이기는 했지만….
진짜 관심을 못 받을 줄은 몰랐다.
“야, 최병훈 의외로 노래 잘 부른다?”
“그러게. 비교가 너무 심하게 됐어.”
다혜랑 다희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무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딱히 관심이 없는 듯했다.
“힘쓴 거 아니야? 근데 왜 이렇게 못 불렀지?”
“우리한테는 있는 그대로 들려. 힘에 면역이 있어서.”
“아, 진짜? 어쩐지, 생목으로 갈기더라.”
낄낄거리면서 속닥거리는 다혜와 다희.
지금 상황 자체가 신나나보다.
스마트폰에 찍어둔 영상을 보여주면서 히죽 웃는다.
─ 나에게만 준비된 선물 같아~.
“아니, 내 목소리 왜 이래?”
“신의 힘으로 포장하고도 이 정도야. 진짜 못 불러.”
다희가 혀를 끌끌 차며 말한다.
“진혁이는 가수 못 시키겠다.”
“…너무하네, 진짜.”
반박할 수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
“세 학과 중에 있겠죠, 당연히?”
“예, 그렇습니다.”
MC아저씨가 긴장감을 북돋았다.
최병훈과 접점이 있었던 여학생들은 은근히 긴장하기 시작했다.
불려나가면 망신, 개망신!
“어디 학과죠?”
“…체육교육과입니다.”
“체육교육과! 로맨티스트 병훈 학생의 선물은 체육교육과에 있다고 합니다.”
체육교육과 쪽에서 격하게 웅성거리고 있다.
누군지 찾으려는 움직임이 분주히 일어났다.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다혜 뿐이었다.
“받아줄 확률 몇 퍼센트라고 보냐?”
나는 은근슬쩍 다혜에게 물었다.
아다킬러, 동정사냥꾼, 한태연이랑 같은 학번 동기니까.
뭐라도 알고 있지 않으려나?
내 물음에, 다혜가 대충 답했다.
“모르겠는데.”
“몰라?”
“엉, 내가 어떻게 알아. 한태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친한 거 아니었어?”
“친하면 뭐, 다 알고 지내야 해? 남자관계까지는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고개를 미어캣처럼 빼들고 한태연을 찾았다.
체육교육과 진영에서, 뭔가 찔리는 기색으로 앉아있는 여학생이 한태연이었다.
“이름을 불러주세요. 최병훈 학생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학생은 누군가요?!”
“체육교육과, 19학번 한태연!”
최병훈이 용기를 내 소리쳤다.
한태연 이름을 부르자마자, 체육교육과가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자기 무리 속에서 한 사람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한태연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쏠렸다.
안 올라갈 수 없는 분위기.
“올라와주세요!”
MC까지 작정하고 그녀를 불렀다.
한태연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무대 위로 올라갔다.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체육교육과 19학번 한태연입니다.”
“태연 학생, 병훈 학생의 노래를 잘 들었나요? 들으면서 본인을 바라보는 애절한 감각을 느꼈다거나, 그런 건 없었나요?”
“…….”
한태연이 우물쭈물 말을 머뭇거렸다.
섣불리 대답을 못했다.
원나잇으로 끝날 줄 알았던 관계가 여기까지 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여기서는 크게 당황하는 것이 당연했다.
“…자, 잘….”
“아하하, 그렇습니까?”
MC아저씨의 표정이 마구 씰룩거렸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제3자 입장에선 그저 즐거운 유흥이었다.
“병훈 학생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네요.”
MC가 마이크를 넘겼다.
발언권을 받은 최병훈, 곧장 한태연을 마주보고 소리친다.
“태, 태연아. 그날 널 만난 순간부터 넌 나한테 뜻 깊은 선물이 되었어! 사랑한다, 태연아! 나랑 사귀어줘라!”
“큽!”
입을 틀어막았다.
괜히 부추겼다.
최병훈을 아예 끝장내버린 것 같아, 죄책감이 느껴졌다.
사방에서 녹화되고 있는데.
이제 끝이다.
최병훈은 군필 예비역 병장, 군대로 도망도 못 간다.
‘잘 가라, 병훈아.’
노래 잘 부르는 척 하더니, 꼴이 좋아.
잠깐 고민하던 한태연.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 좋아!”
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