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대천사, 우리엘 브릴리언스.
우리엘에게 명령 아닌 명령을 내린 빛의 신.
녀석은 칭찬해달라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과해도 너무 과했다.
우리엘은 나를 흘겨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빛의 신에 의해 굽혀야 하는 이 상황이 달갑지 않나보다.
‘일단 돌아가라.’
─ 하잇!
빛의 신은 힘찬 경례를 올리고 복귀했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 앞에서 안 보이면 되었다.
지휘관실에는 우리 둘만 남게 됐다.
빛의 신이 사라지자마자, 우리엘은 고개를 들었다.
“원하는 게 뭐니?”
우리엘은 여전히 내게 적대적이었다.
빛의 신 때문인지 아닌지, 아까보다 더 까칠하게 굴었다.
빛의 신이 나무라는 바람에 기가 죽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아요? 빛의 신이 왔다가 갔는데도?”
“빛께서 하신 말씀을 거부할 생각은 없단다. 하지만 빛께서 말씀하셨다 하여 그것을 무작정 따라야 하는 건 아니지.”
“예?”
이곳은 천계다.
대천사인 우리엘은 신격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그런데 무슨 말인가.
우리엘의 말은 빛의 신에게 대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자격이 있다는 말이란다.”
우리엘은 당당하게 말했다.
빛의 신 앞에서 굽실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되는 일이야. 천천히 알려줄 테니까, 잘 따라오렴.”
우리엘은 자신이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자기합리화 과정을 내게 주장해,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 같았다.
“네가 빛보다 더 상위격의 신인가? 빛의 반응으로 미루어볼 때, 이건 이견이 없는 명제구나. 그렇다면 요루엘의 격은 어찌 되는 것인가?”
“……?”
요루엘은 내 아이다.
신격을 따지자면, 빛의 신이나 다른 신격보다 더 상위격의 존재다.
요루엘에게는 진짜 신의 힘이 있다.
차원이 아니라 세계를 지탱하는 기둥의 힘.
정신적으로 성장하여 그 힘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 해당 차원의 신격들은 요루엘의 손짓 한 번에 사라질 수도 있다.
그야말로 풍전등화.
우리엘은 그 부분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요루엘의 어미인 나의 격은 어찌 되는 것인가?”
“음….”
솔직하게 대답하자면, 그건 우리엘이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는 우리엘에게 천계 신격의 자리를 내어줄 마음도 충분히 있었다.
‘스윗한남이니까.’
자의로 낳았든 타의로 낳았든, 우리엘은 요루엘을 낳았다.
요루엘은 내 피를 이어받은 아이.
내 아이의 엄마에게 그 정도 자리도 못 해줄까.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다.
크리스티나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성녀 그 이상의 것을 만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에겐 믿는 종교가 있었다.
신이 존재하는 세계, 그녀들은 빛을 믿고 따랐다.
빛을 등지고 내게 기대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옳다고 믿어온 가치관에 반하는 짓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엘은 한 걸음을 떼고자 했다.
‘빛의 신이 나한테 굽히라고 말한 것 때문에?’
그 명령이 그만큼 충격적인가?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니면 내 신격에 영향을 받은 걸지도.’
임신과 출산.
수컷과 암컷의 유전자를 반반 섞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
그 과정 중에 암컷은 수컷의 유전자 일부를 흡수한다.
유전자 단위에 흔적이 남는 것이다.
우리엘은 내 아이를 낳았다.
대천사의 음탕한 몸뚱어리에는 당연히 내 기운이 스며들어있는 상태다.
빛의 신에게 반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 가정해도 딱히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긴 하지.’
나에 대한 반감이 곧 빛의 신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진 셈이다.
“그건 우리엘 님이 생각하기 나름 아닐까요?”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네.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리엘 님의 말에도 일리가 있거든요.”
빛의 신이 병균, 요루엘이 백신.
그런 느낌.
표현력이 부족해서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우리엘은 젖가슴 아래 팔짱을 끼고서 무덤덤하게 고민을 했다.
빛의 신이 남기고 간 말을 거슬러도 되는지 걱정하는 것이다.
“빛의 신을 따르든 말든, 저는 상관없어요.”
우리엘이 빛의 신을 따른다.
그럼 나는 우리엘을 임신시키면 된다.
여자에게 씨를 뿌리는 것은 질리지가 않는다.
우리엘이 빛의 신을 거역한다.
그럼 나는 반항하는 우리엘을 임신시키면 된다.
싫어하는 여자를 범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흐음….”
선택지가 주어졌는데도, 마땅히 하나를 고르지 못하는 모습.
누군가 등을 떠밀어줘야 할 것 같았다.
“천천히 고민해보세요, 우리엘 님. 어느 쪽을 고르든 응원하겠습니다.”
“…욕망이 아주 노골적으로 느껴지고 있단다. 이제는 숨기지도 않는구나.”
“빛의 신을 개처럼 다룹니다. 숨길 필요가 있을까요?”
빛은 물론이요, 이 차원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신격을 괴롭힐 수 있다.
녀석들에게 성(性)이 있었다면 수컷은 소멸시키고 암컷은 내 자지를 핥게 했을 것이다.
무성이라서 이 정도로 끝내주는 거다.
우리엘은 내 말에 일부 공감하는 눈치였다.
고개를 주억이며 욕망을 인정해주었다.
“격을 초월하여 신이 되었다면…. 그래도 되는 거겠지. 안 되는 이유는 없어. 네 말이 옳다.”
“그죠?”
“너는 새로운 경우다. 이전 신격들은 모두 감정을 초월해 부정한 욕망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유일무이한 신격이네요.”
“초월한 신격이 하등종족이나 갖고 있는 부정한 욕망을 드러내며 허리를 들썩이는 꼴은….”
우리엘이 혀를 찼다.
“참 볼품없구나.”
“에이, 하등종족들과 가까운 신격. 마치 사병들과 가까운 간부.”
“됐다. 너랑 대화해봤자 머리만 아프구나. 저리로 가 앉아라.”
우리엘은 빈 소파를 가리켰다.
“아랫도리 덜렁거리지 말고. 앉아서 기다려.”
“한 발 빼주면 안 됩니까? 우리엘의 보지가 그리워서 올라온 건데요.”
“…분명히 요루엘을 만나러 온 거라고 하지 않았니?”
“겸사겸사.”
소파에 앉아 방을 둘러봤다.
익히 볼 수 있는 지휘관실.
군부대와는 다르게 살짝 화사한 느낌.
벽지도 하얀색이고, 여러모로 포근한 공기를 품고 있는 방이었다.
“저건 뭐에요? 방 안에 무슨, 자연 모형이 있네.”
군부대 지휘관실에서는 거북이나 물고기를 키운다.
어항, 상징적인 의미다.
이곳에는 어항 대신 자연 모형이 뒤편 탁자 위에 놓아져 있었다.
높게 솟은 산과 구름 그리고 신전.
정교하게 깎아 만든 조각을 보는 듯했다.
우리엘은 자연 모형에 힐끔 시선을 흘기며 말했다.
“…신전이다.”
신전.
하계에 위치한 신전이란 의미.
누구의 신전인가.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것은 우리엘의 신전이다.
대천사쯤 되면 하계에서 신앙을 모을 수가 있는 듯했다.
물론, 대천사를 따르고 모시는 신도는 없을 테지만.
‘신기하네.’
대천사 우리엘은 이 자리에서 저곳에 간섭할 수 있다.
하계 신전이나 교단에서 내려 받는 계시 따위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우리엘 님, 제가 내려가서 우리엘 님의 위대함을 퍼트리고 다닐까요? 우리엘 님을 믿는 신도들을 만들어 교회를 세우고 신성을 모으겠습니다.”
“…….”
나를 쳐다보는 우리엘의 눈빛에서 관심이 스쳐지나갔다.
내 제안이 순간 혹하는 듯했다.
대천사에서 새로운 신격으로, 꿈에만 그리던 일일 테니까.
“크흠, 흠!”
우리엘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신성 쌓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구나.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거겠지.”
“어떻게 쌓는데요?”
“…….”
관심 있으면 알려줘.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우리엘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른 신격들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말거라. 네가 못난 모습을 보이고 무시를 당하면 요루엘의 신성도 무너진다. 어쩔 수 없구나. 무지한 신을 위해서라도 내가 알려줘야겠어.”
“고맙습니다.”
“…신성을 쌓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은 하나로 이어진다. 대륙에 믿음을 퍼트리는 것. 그 믿음이란 무엇이냐….”
구체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신성을 쌓는 것은 신격에 대한 구체적 믿음을 대륙에 각인시키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빛의 신이 존재하기에 빛이 내려쬔다.
내 입장에선 해가 뜨고 지는 단순한 일몰일출 현상이 이 세상에서는 믿음과 신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먼저 선수 친 녀석들이 날로 먹는 구조네요.”
편하게 생각하면 그렇다.
신격들 입장에선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솔직히 걔네도, 눈 떠 보니까 신격이었겠지.’
태초의 차원에 두 존재가 태어났다.
대부분 신화는 이 지랄로 시작되는 법이니까.
이곳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좋아, 결정했습니다.”
“…나는 내 신성을 쌓아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네가 제멋대로 결정한 거야.”
우리엘이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켰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우리엘 님, 제가 그냥 해줄 사람으로 보입니까?”
공짜로 해줄 생각은 없다.
이왕 천계로 올라왔으니까, 뽕은 뽑아야지.
실컷 구경하고 놀다가 우리엘 임신시키고 내려갈 것이다.
우리엘의 뺨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노골적인 욕망을 느끼고 부들부들 떨어댔다.
“너, 너는…!”
우리엘이 무어라 소리를 치려는 찰나, 누군가 노크했다.
똑똑똑-.
─ 우리엘, 나 왔어!
“!”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
훈련소장, 군대식 계급으론 장군인 우리엘을 반말로 부를 수 있는 아이가 있다니.
‘쓰리스타인가?’
내가 의문을 느끼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동안, 우리엘은 한걸음에 날아가 문 앞에 섰다.
얼핏 보인 우리엘의 눈빛은 보통 상태가 아니었다.
달짝지근하게 풀려있었다.
하트가 뿅뿅, 그려져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하트 색상이 핑크색은 아니라는 점이 특이사항?
“들어오세요, 요루엘.”
“요루엘?”
요루엘?
요루엘은 우리 둘 사이에 만든 아기….
우리엘이 허락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다섯 살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머리 위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헤일로가 두둥실 떠있고, 등 뒤에는 앙증맞은 하얀색 날개가 곱게 접혀져 있었다.
아기천사.
“훈련은 잘 받았나요, 요루엘?”
“응, 너무 쉬웠어.”
아장아장 걸어 들어오는 요루엘.
우리엘처럼 분홍색 머리칼에 까만 눈동자를 가진 내 딸아이.
요루엘이 나를 힐끔 쳐다본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랐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불리니까 너무 어색한데.”
“아버지이이이!”
오도도도, 요루엘이 뛰어와 날아올랐다.
그대로 몸통박치기 하듯 내 품에 안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