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본격적인 시작 (1)
입학식.
경쟁자들의 얼굴을 직접 눈으로 보고, 학업 성취를 향한 의욕을 돋우는 데 간편한 이벤트.
단상에는 샛노란 머리칼을 한 교장이 엄숙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주저리 떠들고 있었다.
-엘 아카데미의 새 가족이 된 신입 생도 여러분, 아카데미의 교직원을 대표하여, 여러분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환영합니다. 엘 아카데미에서는......
이름이 안젤리카라고 했나. 교장이자 세계수의 대리자인 그녀의 연설을 줄이자면 대충 이런 내용이다.
[아카데미 와서 축하하고! 으이?]
[우리가 얼마나 잘해주는 거 알지? 모르면 지금 알아 가고.]
[니들이 받는 수혜 전부 세계수님 덕분이니 처신 잘해!]
딱 이런 느낌의 말을 안젤리카는 아주 길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겹지 않을 리가 있나.
번역기를 통해 들려오는 무감정한 말소리를 버겁게 넘기며 소리 없이 하품했다.
'우리 시바 물 줄 시간인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다시 하품을 한 번.
가면 안에서 눈동자만을 굴려 주위를 둘러보니, 교장을 바라보는 생도들의 눈이 하나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생도들의 얼굴을 세영에게 건네받은 자료와 하나씩 대조했다.
'정진반을 운영한다고 했었나.'
엘리트 중의 엘리트, 엘 아카데미 정진반.
언젠가 나 또한 그곳에 닿아야 할 테니, 미리 그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 편이 좋았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세계수의 '남편'으로서의 가치를 강요하는 시스템이, 아카데미에서 내게 어떤 역할을 강요할까.
이는 당연케도 생도 1위이리라.
식목도감의 보상이 내 형펜에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았으니, 그걸 다 모을 때까지는 세계수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
마침 신입생 대포 선언 차례다.
나는 눈을 뜨고 앞으로 펼쳐질 광경을 눈에 담았다.
-한국 신입생 대표. 정시우, 산수유.
교장의 말이 떨어지자-
가장 앞자리, 뚫린 중앙을 기준으로 남녀가 갈린 그곳에서 국기를 든 두 남녀가 일어섰다.
붉은 나무 자수가 새겨진 망토가 남녀 한 쌍의 걸음에 맞춰 휘날린다.
정시우.
현재의 수석이 호기롭게 나아간다.
산수유.
현재의 차석이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기대를 받는 유망주인 그들은 한국 신입생 대표이자, 엘 아카데미의 수석과 차석이다.
'설마 내가 상대했던 사람이 수석일 줄은 몰랐지.'
그 둘은 선서를 짧게 마무리하고, 교장의 양옆에 자리를 잡았다.
동시에 교장이 한 번 더 입을 연다.
-유망주 스콜라. 전원 앞으로.
스콜라는 성적 우수생을 부르는 아카데미만의 호칭이다.
선언이 끝나자 앞줄에 앉아있던 수십의 생도들이 단상 위로 올라섰다.
각자 자신의 국기를 들고 올라선 다국의 생도들.
웅장한 배경 음악이 깔리며, 양 옆으로 커다란 축포가 터진다.
스콜라끼리는 단상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개중에는 당연한 듯 진달래도 섞여 있었다.
적어도 나와 만났던 이들은 전부 저 유망주 그룹에 속해있다는 것이다.
"저게 정진반 그룹? 맞지?"
"응, 아카데미 하교 후에 따로 불러서 저녁까지 훈련한다고 하던데?"
"와 미쳤다. 나도 받고 싶다."
그들을 바라보는 생도들의 눈빛에는 자신도 저들처럼 되고 싶다는 시기와 순수한 선망이 담겨 있었다.
나는 주위 반응을 지켜보다 눈을 감았다.
어찌 됐건, 나로서는 전부 넘어야 하는 산이었다.
본격적인 시작이다.
*****
입학식이 끝나고 가장 먼저 배정된 반으로 들어왔다.
적당히 왼쪽 창가 맨 구석 끝 자리에 앉아 기다리니 곧 한국 1반 생도들이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내가 아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정시우, 산수유, 진달래 등등.
정진반은 저녁부터 개시하는 특별 수업 비슷한 거니, 조례와 오전 수업은 여기서 함께 들어야 한다.
원래 계획은 정예만을 모아서 따로 반을 만들 계획이었는데 언어적인 문제 같은 게 겹쳐 도중에 변경되었다고 했나.
수업 같은 경우 오전에는 영어나 수학 같은 교과 위주를, 오후 수업은 자신이 선택한 강의를 들으면 된다.
고등학교와 대학이 뒤섞였다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나름 축제도 있고, MT 비스무리한 것도 있던데.'
생각에 잠겨있으니 갑자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톡톡, 어꺠를 두드리는 감촉. 휙 고개를 돌리니 기다란 손가락이 내 볼을 꾸욱 찔렀다.
"킥킥킥."
잔망스레 기운 눈꼬리. 큼지막한 까만 눈이 나를 응시한다.
"너도 1반이야?"
"언제 적 장난이야?"
"이거? 요즘 유핸하는 인사법이라던데 몰랐어?"
구슬. 어제와 달리 오늘은 새하얀 후드를 입은 말티즈같은 생김새였다.
그녀는 내 옆자리에 의자를 끌어 앉더니 쭉 기지개를 폈다.
"끄으으응! 너 있어서 다행이다. 반에 아는 애들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리 말한 구슬이 히히 웃었다.
첫 만남에도 느낀 거지만, 부쩍 가까운 거리감이 내게는 거북했다.
솔직히 어제 처음 본 놈한테 이렇게 스스럼없이 군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 맞다, 야, 화과자 먹을래? 집에서 가져온 건데."
이것 봐라. 선뜻 주전부리까지 내어주고.
나는 적당한 크기의 화과자를 받아다가 입안에 넣었다. 달콤한 팥 맛이 혀를 감싸 돌았다.
혀끝에 남은 은은한 단맛을 음미하고 있으니 구슬이 나를 보며 감상을 재촉했다.
"우리 집 화과자 맛있지."
"엉?"
"맛있다고 해 얼른"
"맛없어."
"헉, 내가 다신 주나 봐라."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으니 강의실 앞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교사가 들어왔다.
"자, 주목!"
청량하면서도 듬직한 여성의 목소리가 강의실 전체를 메웠다.
떠들썩하던 반 내 분위기가 단숨에 잠잠해졌다.
"한국 1반을 맡은 이세영이다. 원래 대로였다면 진성훈 선생님이 맡았겠지만, 일이 생겨서 이번 1년은 내가 너희들이랑 함께 하게 됐다."
짧게 끊어서, 좌중을 끌어모으는 목소리로 의도를 정확히 전달한 세영은 교탁 앞에 서서 주변을 쓱 둘러봤다.
"오늘 수업은 레크리에이션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자기소개 지금부터 한 줄씩 준비해두고."
한 마디 한 마디를 당당히 내뱉던 그녀가 이번에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또각대는 굽 소리가 강의실 내에 울려 퍼졌다.
"이 반은 4년을 함께 할 거니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 싸움이나 따돌림은 엄히 처벌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생도인 너희들이 인간 혐오를 하지는 않겠지?"
세영의 눈빛이 일순 나를 향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엘 아카데미 내부에선 신분 차이를 산관 하지 않는다. 그걸 알아두도록. 그리고-"
움직임이 내 옆에서 멎었다.
그리고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중얼거렸다.
"넌 조금 있다 사무실로 따라와."
그 말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기에, 나는 한동안 멍하니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구슬이 다가와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야. 방금 선생님이 뭐랬어?"
"몰라."
"뭐야 그게."
짧은 순간 마력을 이용했는지 바로 내 옆에 있던 구슬도 알아듣지 못했다.
호들갑을 떨어대는 구슬의 목소리를 흘리며 나는 쉬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세영의 사무실에 들렸다.
-덜컥.
문을 열자 향긋한 꽃의 향기가 비강을 가득 메웠다.
"2학년 교사라더니, 무슨 일이래요?"
"앉아서 얘기해. 말할 게 많으니까."
어차피 둘 사이에 가릴 것도 없으니 적당히 눌러앉아 차를 한 입 들이켰다.
-호로록.
"오."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오자 세영이 피식 웃었다.
"맛있지? 차는 그렇게 끓이는 거야 등신아."
"우리 집 차가 그렇게 형편없었나 보죠? 이렇게 다과까지 준비하다니."
"뭐 그것도 있고, 솔직히 저번에 받은 수목환 덕에 이득 본 게 많거든."
그렇게 수목환이 가치 있는 물품이었나.
쿠키를 씹어 먹으며 다음번에는 더 큰 거래에 사용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왜 불렀죠? 또 한 판 하고 싶어서 부르셨나?"
"......미쳤어?"
팍 노려보는 세영의 눈빛에 일순 기대감이 비친 건 기분 탓일까.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차분히 말을 이었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은... 아, 그냥 충고니까 새겨 들어. 너 목인들한테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거야."
"예?"
"목인은 뼛속까지 선민사상에 박혀 있으니까. 네가 득 볼 게 없다는 말이야. 괜히 접근했다가 사건이 일어나면? 그럼 네 탓이 되는 거지."
"아니 그걸 목인이 말하면...... 음."
먹던 쿠키를 투박하게 내려놓고,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이 세계에 사는 세영이 하는 말이니 그 말은 옳을 것이다.
그럼 댕댕이... 아니 구슬이도?
'걔는 모르겠어.'
만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걔는 목인이긴 해도 가문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선민사상에 절여져 있다기보단 오히려 온실 속에서 자라난 고귀한 꽃처럼 순수해 보이는 여자였다.
거리를 벌려야 하나? 모르겠다.
"야. 강간범."
고민하는 내 얼굴을 본 세영이 선심을 쓰듯 말했다.
"나한테 하는 것처럼만 안 하면 돼. 뭘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어?"
"그럼 그냥 친구 사이는 괜찮죠?"
"당연하지, 근데 누가 너랑 친구를 해? 못생긴 강간범한테."
살짝 다가온 세영이 콩- 하고 내 이마에 딱밤을 먹인다. 나는 순간 벙쪄서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 차리고 항변했다.
"아니 근데 자꾸 저한테 강간범 프레임을 씌우려 하시는데. 그거 엄밀히 따지면 쌍방과실이거든요?"
"됐어, 강간범. 너는 강간범이야. 알았어?"
세영은 슬쩍 상체를 젖히고 손을 뻗어 낙인을 찍듯 내 가슴팍을 꾹꾹 찔렀다.
씨익. 반달이 된 눈에 올라간 입꼬리가 참으로 요망해 보였다.
-우우웅!
순간 주머니의 스마트폰에서 진동 알람이 울렸다.
이에 세영의 눈꼬리가 슬쩍 올라가더니, 내게 묘한 눈초리를 보내왔다.
내게는 그 눈빛이 연락을 안 받아도 되겠냐는 물음으로 보였다.
나는 적당히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아무튼, 오늘 말씀해 주신 건 새겨들을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아, 가기 전에 하나 알고 싶은 게 있다.
"그런데 왜 잘해주는 거죠?"
내 물음을 들은 세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태연자약하게 답변을 내놓았다.
"내가 내 학생 챙긴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입에 침이라도 발랐으면.
"예, 가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 자기소개 준비 잘하고."
-쿵.
문을 닫고, 그 문에 기댄 채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이번 입학식에 참여한 생도들을 환영하는 문구와 일부 공지 사항. 그걸 채 다 읽어 내리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스템이 반응해왔다.
-띵!
이 효과음은 십중팔구 세계수에 관한 시스템의 알림이다.
이번엔 뭐냐?
마음의 준비를 단단하게 한 덕분에 뭐가 오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세계수년이 나한테 자식을 떠넘겼을 때부터 나는 해탈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정보창으로 받아들인 소식은 간단했다.
【 호감도 메뉴에 새로운 성목이 추가되었습니다. 】
호감도 메뉴.
그러니까 내가 이용하는 상점인 세계수 옥션에서 제공하는 호감도 시스템이다.
바로 들어가 확인하니, 순결의 세계수만이 달랑 쓰여있던 그곳에 상상도 못 했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 세계수 옥션 】 - 【 호감도 메뉴 】
▶순결의 세계수 : ♥♥♥♥♥(100/100)
▶이세영 : ♥♥♥♡♡(64/100) - [정보 확인]
▶없음
※더 많은 성목과의 인영이 필요합니다. 호감도 등록은 50부터 가능합니다.
---
【 새 성목과의 인연으로 640p가 입금됩니다. 】
"......이 여자가 왜 여기 있지?"
확실히 목인일지언정 이세영은 어엿한 한 그루의 성목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호감도는 또 왜 이렇게 높은 건지. 사실 나와 그녀 사이에 호감도가 오를 만한 접점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스레 정보 확인 쪽에 손이 갈 수밖에 없었다.
---
이름/성별 : 이세영(女)
나이/키 : 26세, 170cm
섹스 판타지 : 강간.
연애 판타지 : 손잡고 영화관 관람, 자연스러운 스킨쉽, 키스.
---
스마트폰 위로 떠오르는 수많은 정보들.
나는 눈을 비볐다가 다시 확인했다.
-섹스 판타지 : 강간.
지금껏 그녀가 내게 보여준 행동들이 오버랩된다.
어우. 기겁했다.
"개연성 미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