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두견낙화(杜鵑落華) (6)
시간이 흘렀다.
“내일이 날입니다. 이시헌 사도님.”
“알겠습니다. 물러나세요. 제가 할 일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니.”
“네. 그리고 이걸 받아 주십시오.”
일을 치르기 직전의 날, 나를 찾아온 신도가 내밀어 온 것은 마법 진이 그려져 있는 붉은 수정구였다.
“이 수정구를 사용하면, 3m이내의 한 사람을 데리고 저희 교단의 지하실에 이동하게 됩니다.”
“그렇군요.”
“ 예. 저희가 원목적을 수행할 동안, 사도님은 진달래 예비 사도님을 데리고 와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수정구를 받아들였다. 그 안에는 나조차도 해석 못 할 마법진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이건 뭐. 고양이한테 생선을 넘기는 격인데.’
하지만 그럴수록 경계를 단단히 했다.
일방적으로 전달된 지령은, 보통 진심을 숨기기 마련이니.
-스르륵.
검은 후드를 쓴 이들이 사라진다. 이제는 그 움직임을 대충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디 보자.’
주머니를 뒤져, 헌드폰을 꺼내 이세영에게 연락을 넣었다.
“네 여보세요. 선생님. 물건 하나... 아니 두 개만 준비해 주실 수 있으세요?”
늦은 새벽, 나는 잠을 자지 않았다.
*****
술렁이는 가슴에 잠이 오지 않았다.
이시헌이 고지한 날이 바로 오늘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되는 중요한 날이지만, 긴장 때문인지 아무리 청해도 잠이 오질 않았다.
억지로 잠을 부르기 위해 술을 마셨다.
술이 들어가니 몸이 달아올랐다.
나는 분홍색 베개를 끌어안고, 그곳에 얼굴을 묻었다.
[달래야. 이 말을 명심해라.]
퉁퉁 불어있는 눈두덩이 사이로, 그 때 보았던 아버지의 유서가 아른거린다.
[그 남자를 믿지 마라.]
피 묻은 편지를 끌어안은 작은 여자 아이. 토끼 인형을 끌어안은 그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다.
아이는 목메어 울고 있었고, 그런 아이의 앞에는 목이 꺾인 남자가 쓸쓸하게 누워 있었다.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다.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미안하다.]
사과만을 반복하던 색이 바랜 편지. 그 속에 녹아 있던 눈물 자국들.
그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져서, 오래전 행복했던 나날이 그리워 졌다.
[아빠가 미안하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 주었던 사람.
어린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었다. 무너지기 직전인 사람이 어떠한 표정을 짓는지, 서서히 부수어지는 인간의 얼굴이 어떠한지.
그 남자가 죽기 전날 밤. 그때 보았던 공허하고 허량한 표정은 아직도 가끔씩 꿈에 나타나곤 한다.
그 사람의 원망을 기억한다.
언제나 찡그리고 있었던 얼굴의 의미를 열두 살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짹, 짹?
격해진 감정에 반응한 자그마한 새 한 마리가 내게로 날아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 못 하는 중급 정령. 그 남자가 내게 남긴 마지막 선물.
-찌르르르, 찌르르르.
기분 좋게 우는 정령의 볼에 얼굴을 비비며, 나는 애써 잠에 들었다.
*****
“부탁한 거 가져왔어. 이거 두 개면 돼?”
“이 정도면 떡을 치죠.”
이세영은 내 말에 질색하며 붉은색과 보라색으로 빛나는 크리스탈을 각각 하나씩 넘겨주었다.
“잘 써야 해. 이거 두 개가 수목환 하나 값이야. 엄청 비싸다고."
“수목환 하나가 대체 얼마길래 그래요?”
“시가마다 다른데. 희소할 때는 부르는 게 값이야.”
억 소리 나게 비싸다는 건 알겠다. 어쨌든 챙길 것도 챙겼고, 준비도 끝 마쳤으니 남은 것은 그들이 오는지만 지켜보면 된다.
‘오는 건 확정인 것 같고. 진달래는......'
내가 직접 차려 먹으라는 건지, 아니면 밥상을 차려줄 테니 알아서 데려가 라는건지.
사실 뭐든 상관이 없었다.
잠시 바닥에 내려두었던 백팩을 매니 세영이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2시쯤에 아카데미 총 회의가 있어. 아마 그걸 노리고 온 거겠지. 세계수님의 뜻아래에서 개최되는거라, 빠지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까 시헌아.”
"네."
“오늘 나 없어.”
말없이 고개를 까딱이니 한 팔로 내 목을 휘어 감은 세영이 툭툭 내 정수리를 두드렸다.
“새끼. 가면 쓰고 분위기 잡기는”
“아니 시발, 분위기는 선생님이 잡은 거 아닙니까?”
욕을 들은 세영이 좋다고 킬킬댔다.
“뭐래.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 했는지 알고 있냐? 아카데미 동기 다리 붙잡고 동서남북으로 울부짖었다. 우리 애 도와 달라고.”
“우리 애는 무슨.”
“넌 아직 애기지. 애기."
“와, 선생님 취향이 그쪽이었어요? 이건 좀 실망인데.”
“미친 새끼 한마디를 안지네.”
침묵.
내 목을 끌어안은 그대로, 세영은 툭툭 때리던 손에 힘을 풀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그냥 뒤지지 말라고. 섹프 죽으면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으니까.”
“솔직하게 나 없으면 외롭다고 말 하시지 그래요.”
“전혀? 자의식 과잉도 적당해야 귀여운 거야 인마.”
한 차례 웃은 나는 슬쩍 편지 하나를 세영에게 건넸다.
“이건 뭔데?”
“만약 제가 아카데미까지 돌아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리면 이거 진달래한테 전해주세요. 자초지종은 이야기 해야 할 것아닙니까?”
세영은 고개를 갸웃이다가 흔쾌히 그것을 받았고, 우리는 잠깐의 아이컨택 후 서로 멀어졌다.
一드르르륵.
이세영은 교사로서 교실 안으로 들어왔고, 나 또한 한 사람의 생도로서 교실에 들어왔다.
-타악!
들어온 그녀가 강하게 교탁을 두드리자 생도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자!”
피식 미소를 지은 이세영이 생도에게 고했다.
“나 왔다 다들 일어나! 진수야. 어제 술이라도 마셨냐? 선우, 너는 어젯밤에 또 남자 만났어? 졸음도 깰 겸 오늘은 특별 히 선생님이 만든 아침 기합을 외치도록 하겠다. 불만 있는 사람?"
불평불만을 외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따라 하지 않는다면 가만 안 둔다는 제스처를 하고 있었으니까.
"훈련을 실전처럼. 언제나 경계를 풀지 말고 임해라.”
-훈련을 실전처럼. 언제나 경계를 풀지 말고 임해라.
“예상외의 일이 생길 시, 강당으로 집합하라.”
-예상외의 일이 생길 시, 강당으로 집합하라.
강당에는 수비에 용한 온갖 마법 생명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강당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공격적인 행위는 용납되지 않으며, 그 자리에는 한마리의 수호자가 위치 하고 있다.
“강당이 어디 있는지는 알지? 바로 중앙 건물이다.”
-네!
“좋아! 선생님은 회의가 있으니 아침 비행기를 타야 한다. 적당히 자습하고, 수고해라!”
-드르르륵.
문 소리가 한 번 울리고, 생도들은 다시 잠에 빠지거나 자기 학습을 시작했다.
나는 들고 온 백팩을 두드리며, 머릿속으로 시물레이션을 굴렸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사이의 간극을, 나는 조용히 즐겼다.
10시. 수학의 쪽지 시험이 제법 어려웠다.
11시. 자리를 비운 교수 덕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12시.홀로 식당에 나와 밥을 먹었다.
1시. 나는 진달래가 볼수 없는 곳에 자리를 잡고 그녀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슬며시 느껴지는 불안이,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압박한다.
-우우우응.
공기 중의 마력이 움직이고 있다. 몇몇 감이 좋은 생도들은 이변을 눈치챘는지 쑥덕이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세영이 전달해 둔 번호로 연락을 넣었다.
-두르르르. 뚝.
[여보세요~ 세영이 짝지니?]
“예 누님. 짝지입니다. 선생님이 신세 좀 지셨다고 들었어요.”
〔어머 애 봐. 당돌하네.]
“아무래도 지금 당장 시작될 것 같습니다."
[알고 있어, 그게 지금-]
-치지직.
[-이미 싸우고 있거든.]
푸학- 핸드폰 바깥으로 육편이 튀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특수 부대, 경비, 경찰이 한 곳에 모인 건 또 처음 보네. 너 덕분에 일사천리로 해결되고 있어. 고마워. 덕분에 실적 좀 올릴 수 있겠다. 세빡이들의 힘을 보여주겠어.]
“예 고생하십쇼. 원조는 못 합니까?”
[......그건 힘들겠는데. 아-]
-이 씨발 새끼가 남이 전화하는데 통수를!
[-이만 전화 끊을게.]
-뚝.
“꺄아아아악!”
곧바로 새된 비명이 들려왔다.
한창 수업이 진행 중이었던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교관이 서 있던 자리에 핏물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거칠게 뜯겨나간 머리가 바닥을 구르는 그 모습에 순간 구역질이 치밀었다.
"......후"
쿵, 쿵, 쿵, 쿵. 처음 본 광경에 적응 할 시간을 갖기도 잠시. 실습실 전체를 둘러싼 검은 인영을 보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끊어진 핸드폰을 백팩 안에 집어넣고, 잘 벼려진 검을 꺼냈다.
그런 내 등 뒤로, 검은 후드를 쓴 인물이 나타난다.
“이시헌 사도님. 준비됐습니다. 지금부터 작전 설명을-”
“어 그래. 말해봐.’’
“......사도님?”
당황에 빠진 여자의 목소리.
후드를 뒤집어쓴 신도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흉부를 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대체 왜-”
"정신력이 올라서 다행이네. 원래였으면 구토를 몇 번이나 했을 텐데.”
-파확!
심장을 뚫은 검을 단번에 빼낸다.
건물 사이의 골목에 한 차례 피가 낭자한다. 차갑게 식어버린 내 볼 위로 핏방울이 튀었다.
신체가 확 꺾인 여성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곤 천천히 허물어졌다.
처음 사람을 죽였다.
손잡이를 타고 느껴진, 살갗을 베는 감촉.
더러운 감상이었다.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은 느낌이다.
그러나 멈출 생각은 없었다.
-서걱.
재차 나를 따라온 신도의 목을 베었다.
마음을 굳게 먹은 덕분인지, 두 번째부터는 별다른 심상이 일지 않았다.
베고, 터뜨리고. 잘라내고.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십 수명을 베어 넘겼을까.
조금씩 쌓이는 경험 속, 그 짧은 사이에도 나는 점점 노련해지고 있었다.
뼈와 근육의 위치. 어디를 베어야 사람이 간단히 죽는가.
신도들은 빨랐지만, 그 속도에 적응하니 마력을 쓰지 않아도 눈으로 쫓아 잡아낼 수 있었다.
“이 배신자놈!”
“아아. 사도님 어째서!”
어귀를 빠져나오니 한 신도가 그리 소리쳤다.
나를 포함한 생도들을 둘러싼 신도들은 잔뜩 얼굴을 굳힌 채 살기를 담아 날 노려보고 있었다.
공포에 빠진 생도들이 슬쩍 나를 쳐다보고, 내 꼴을 보고 기겁했다.
"......시헌이 너.”
“시헌. 나 약속 지켰어.”
정시우는 살짝 놀란 얼굴로, 산수유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와 그녀의 손에는 하나같이 신도에게서 빼앗은 검이 들려 있었다.
“이시헌 사도! 자네의 행위는 용서 받을 수 없다!”
괴기스럽게 소리치는 신도의 얼굴에 흉흉한 안광이 비친다.
나는 한 차례 숨을 쉬고 눈앞의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딱 보니 제가 이럴 거라 예상한 거 같은데. 아닙니까?"
이들과 똑같은 로브 후드를 뒤집어 쓴 익숙한 풍채의 남자.
그 남자는 후드의 모자 부분을 벗더니,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쓴웃음을 흘렸다.
“아쉽네, 형제. 나는 자네가 이번 일을 훌륭히 완수하고 꼭 우리 편으로 들어왔으면 했거든.”
“그럽니까?”
“하지만 신탁은 어길 수 없다네. 이 번은, 그래. 그분의 시련이겠지. 사랑을 보답하지 않으면 안 돼. 지금이라도 교화한다면 잘못은 묻지 않겠네.”
【 ‘순결의 세계수’가 중지를 치켜 올립니다! 】
“방금 세계수님이 말해줬는데. 좆 까시랍니다.”
“하하. 이런 자리에서 농담을 하고 싶나?”
“진짠데.”
“뭐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잡아서 세뇌하는 수밖에 더 있겠나? 마지막 기회라네 이시헌 사도.”
【 ‘순결의 세계수’가 표독하게 소리칩니다! 】
“......세계수님이 니 엄마 창녀라고 전해달라네요."
“선을 넘었군.”
굳어진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웃었다.
“세계수가 좆같긴 하죠.”
나는 명백한 적의를 담아 검 끝을 성한에게 겨누었다.
성한은 얼굴을 와락 구기며 혀를 찼고 어느 한쪽에 눈짓했다.
그곳에는 새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내가 보지 못했던 한 단계 높은 신도들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방어막으로 그 검을 받아내는 진달래가 보였다.